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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3/83)

52화

카이네스는 호텔 방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대부분 업무는 처리해 둔 덕분에, 당분간 급한 업무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루이셀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며 정신이 반쯤 날아간 듯한 카이네스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카이네스와 걱정스럽게 찾아온 에스타, 그리고 얼어 버린 저택을 종합해 보면 대강 감이 잡혔다.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으실 겁니까?”

루이셀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카이네스에게 물었다.

평소라면 장난이라도 치며 분위기를 풀었겠지만, 카이네스의 상태가 영 심각했다.

공작에게 ‘교육’을 받은 다음 날에도 이렇게 침울해하진 않았었다.

루이셀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카이네스의 답을 기다렸다.

“돌아가야지.”

그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낮게 굽은 어깨 또한 펴질 줄 몰랐다. 루이셀은 한숨을 푹 쉬었다.

“작은 마님과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니.”

대답이 무척 늦게 나왔다. 대답하던 카이네스의 눈동자가 흔들렸음을 이미 눈치챈 루이셀이 제 안경을 치켜올리며 넌지시 말했다.

“며칠 전에 찾아왔을 때 작은 마님께서 무척 걱정하시던데요.”

“에스타가?”

순간 카이네스의 눈이 분노에 사로잡혔다.

제 예상과 전혀 반대되는 카이네스의 행동에 놀란 루이셀이 크게 눈을 깜빡였다.

평소라면 ‘에스타’라는 단 세 글자에 미소를 흘리던 카이네스였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정작 카이네스는 더는 할 말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창문도 아닌 공허한 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며칠째 이러고 있었다.

저대로 내버려 두어선 안 되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힘들어 보이는 카이네스를 방에서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쯤 포기한 루이셀이 한숨을 폭 쉬곤 소파에 주저앉았다.

카이네스는 날카로워진 눈으로 루이셀을 째려본 뒤 시선을 거뒀다.

“저택은 다 녹았답니다. 다만 저택 곳곳에 물이 너무 많이 스며들어 보수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하더라고요.”

루이셀은 묻지도 않은 말을 뱉었다.

“인부들을 시켜 진행하고 있긴 하지만 최악의 상황에는 이사하셔야 합니다.”

카이네스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루이셀은 그가 듣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택 사람들은 별채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작은 마님도 별채에서 기거하시고요.”

작은 마님이란 말에 카이네스의 눈썹이 움찔 떨렸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루이셀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서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작은 마님께서 사람들을 잘 통솔해 주셨습니다. 저택이 얼어 중앙 통로에 거대한 빙벽이 생겼을 때도 솔선수범해 물을 나르셨다고 하더라고요.”

“왜?”

카이네스가 물었다. 진심이냐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위층에 도련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죠.”

“…거짓말.”

“정말이랍니다. 작은 구멍이 나자 제일 먼저 삼 층으로 뛰어갔다고 하시더라고요.”

“위험하게!”

카이네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루이셀은 그런 카이네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그러셨습니까? 저택을 얼려 버릴 만큼 큰일이 있었던 거지요?”

루이셀은 페이시아 가문에 내려오는 힘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는 페이시아 공작과 알게 된 이후, 남다른 능력으로 공작의 신임을 얻어 지금까지 일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작은, 공작가를 위해서라면 제힘을 사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기에 몇 번이고 마법을 사용하는 걸 본 적 있었다.

비밀을 함구한다는 약속 끝에 여태까지 페이시아에 몸담아 일하고 있었지만, 루이셀은 페이시아의 피에 흐르는 힘이 꼭 죄악 같았다.

제 몸을 갉아 먹으며 성장하다니. 게다가 제어하지 못하게 되면 이성을 잃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카이네스의 힘든 모습을 봐 와서인지 루이셀은 카이네스가 안타까웠다.

“아무 일도 아니야.”

카이네스는 헛웃음을 뱉으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시군요.”

루이셀이 조용히 대답하며 카이네스의 곁을 지켰다. 더는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저 옆에 앉아만 있었다.

카이네스는 턱을 괸 채 루이셀을 바라보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타가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

아버지에게 폭행당한다는 말에 결혼을 결심할 만큼, 에스타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최소한 카이네스가 보이기에는 그러했다.

게다가 가끔 홀린 듯 바라보기도 하니까. 비록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예전과 다른 방향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지만.”

카이네스가 짓씹듯이 말을 뱉어 냈다.

그의 성난 눈길을 뒤늦게 이해한 루이셀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고백하셨습니까?”

“아니.”

“그러면 거절이라도 당하셨습니까?”

“아니.”

루이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대체 왜 착각이라고 여겼을까?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다행이지. 붙잡을 수라도 있으니까.”

카이네스가 자조적인 웃음을 뱉었다.

“날 떠나려고 해. 말도 없이, 신분까지 바꿔 가며.”

카이네스가 손바닥을 폈다 쥐기를 반복했다.

“…네?”

“여태까지 계속 잘해 주면서, 네 편이다, 구해 주겠다 하던 사람이 뒤에서는 몰래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얼마나 배신감이 드는지.”

주먹을 쥔 그의 손등에 푸르딩딩한 핏줄이 튀어나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놀란 루이셀이 재빨리 물었다.

“오, 오해가 있으셨던 게 아닐까요?”

“오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아무리 그래도 작은 마님께서 왜 갑자기 떠나신단 말씀입니까?”

“누님은 내 비밀도 알고 있으면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어. 다시 생각해 보니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 날 놀렸던 거야. 떠나려는 이유? 비밀을 알게 되니 내가 괴물처럼 보였나 보지.”

카이네스는 에스타가 자신을 배신하려 했단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봤었던 신분증과 집 증서, 그리고 아버지의 증언.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굴던 에스타.

“…근데 익숙한 느낌이 나는 게 내가 아는 사람 같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살포시 웃던 에스타가 떠올랐다. 에스타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응. 눈앞에 두고도 날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든다니까. 진짜 이상하지 않아?”

당시에는 아기 새처럼 경계심 없이 구는 에스타가 걱정되어 눈치채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의미심장한 말 같았다.

“도련님, 그런 말씀 마세요!”

뜬금없이 루이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상념에 빠진 카이네스를 깨웠다.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도련님이 자꾸 지하 동굴을 파고 들어가니까 그렇잖습니까!”

루이셀이 단호한 태도로 팔짱을 끼고는 물었다.

“작은 마님과 진솔한 대화는 나누어 보셨습니까?”

“무슨 대화?”

카이네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걸 왜 해야 하냐는 듯한 태도에 루이셀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 줄 아십니까?”

“뭔데.”

“진솔한 대화입니다. 서로 터놓고 얘기해 보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고 말아요. 사람들에게는 각자만의 사정이라는 게 있거든요.”

루이셀이 검지를 펼쳐 보이자 카이네스가 옅은 흥미를 보였다.

루이셀은 아직 어린 도련님에게 자신이 가르쳐야 할 게 많이 남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도련님도 비밀을 가지고 있잖습니까. 모든 걸 작은 마님께 꺼내 놓으시지 못하셨죠. 그렇죠?”

가문에 내려오는 비밀이 있다는 것, 마력이 타고났다는 것, 마력을 다루지 못하면 몸이 커진다는 것, 마력의 총량을 늘리기 위해 페이시아 가문에서 자행되는 일이라든지.

카이네스가 작게 눈썹을 찡그렸다.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루이셀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작은 마님에게도 비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탓에 말을 못 했을 수도 있죠.”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에스타가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단 사실에만 화가 나서. 이유를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대화 전에 화를 내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대화 후에도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면 그때 화를 내도 늦지 않을 겁니다.”

루이셀이 말을 끝마치며 살짝 웃었다. 카이네스는 얼이 나간 표정으로 제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연애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왜 여태 결혼을 못 했나?”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되레 빈정거리는 말이 튀어나갔다. 당황한 카이네스의 귓불이 살짝 달아올랐다.

루이셀은 그런 카이네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작은 미소를 흘렸다.

“연애 상대가 많으면 결혼은 자연스레 못하게 되거든요.”

농담 어린 어투로 말하자 분위기가 살짝 풀어졌다. 딱딱하게 굳었던 카이네스의 얼굴도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좋아한다고는 하셨습니까?”

루이셀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알기로 작은 마님께는 쉬지 않고 뱉으셨던 거로 기억하는데요.”

“알아.”

카이네스가 붉어진 볼을 손등으로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먼저 다가가세요. 그러다 나중에 후회하실 겁니다.”

루이셀은 창가에서 일어나 다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저택으로 돌아가세요.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진 작은 마님과 시간을 보내셔야죠.”

아카데미 입학이라니.

루이셀은 그 소식을 듣고도 바로 믿지 못했다. 살아생전에 페이시아가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걸 보게 될 줄이야.

작은 감탄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이제 영지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모든 정리를 마친 루이셀이 모자와 갈색 코트를 걸쳤다.

“제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편지하세요.”

카이네스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한 후 문으로 향하던 루이셀이 다시금 등을 돌렸다.

“무슨 사정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아카데미 일은 도련님께서 너무하셨….”

“나가.”

카이네스가 옆에 있던 쿠션을 집어던졌다. 약삭빠른 루이셀을 휙 피하고는 금세 방을 나가 버렸다.

“만약 오해가 아니라 진짜라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데….”

루이셀이 사라진 방, 홀로 남은 카이네스는 한참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둑해진 창밖으로 흐릿하게 페이시아 가문의 첨탑 끝자락이 보였다. 그곳은 지금 에스타가 기거하고 있다는 별채였다.

* * *

현재 지내고 있는 별채는 독특한 외관을 자랑했다. 본관 말고도 몇 채의 건물이 더 존재했고, 각 건물을 등진 채로 뒤편엔 숲길과 작은 연못이 있었다.

저택 앞으로는 정원과 온실이 있었는데, 카이네스와 페이시아 공작은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저택 관리는 안주인의 영역이지만, 여태까지 페이시아 가문에는 공석이었기 때문에 관리가 소홀했다.

카이네스의 어머니인 페이시아 부인은 카이네스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집사에게 들었다. 그 탓에 저택 관리는 더 관심 밖의 일이 되어 버렸다는 말 역시.

하지만 이제부턴 달라질 것이다. 저택이 엉망이 된 기념으로 정원까지 싹 다 엎어 버리기로 한 것이다.

에스타는 나름 머리를 굴리며 정원사들과 어떤 꽃을 심을 것인지 논의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계절별로 유명한 꽃을 심는 게 좋겠어요.”

꽃에 대해선 잘 아는 바가 없는 에스타가 두루뭉술한 답을 뱉었을 때였다.

저택 정문이 열리며 페이시아 가문의 문양이 박힌 마차 한 대가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 정체를 안 사용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작은 주인님께서 돌아오셨나 봐요!”

엘리가 에스타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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