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4/83)

53화

에스타는 곧장 돌아서 방으로 걸었다. 정원에 심을 꽃이고 잔디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 작은 마님, 어디 가세요?”

당황한 엘리가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작은 주인님께서 돌아오셨어요. 계속 기다리셨잖아요.”

“알아.”

“그런데 어디 가세요?”

엘리는 급하게 자리를 뜨는 에스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이네스와 마주치기 싫어. 불편해질 거 같단 말이야.”

에스타는 며칠 전 호텔에 다녀온 이후로 쭉 기분이 좋지 못했다. 엘리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이제야 그게 카이네스 때문이란 걸 알게 된 엘리가 입을 합 다물었다.

할 말 있으면 본인이 오겠지.

어차피 오늘도 가문 일만 확인한 뒤 급하게 호텔로 돌아갈 것이다.

“차라도 내올까요?”

엘리가 에스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됐어.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나가 봐.”

“네, 작은 마님.”

엘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갔다. 에스타는 괜히 애먼 곳에 화풀이한 것 같아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조금만 시간 때우다 나가지, 뭐.”

얼떨결에 생긴 휴식 시간에 멍하니 거울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엘리라면 굳이 문을 두드리지 않을 텐데.

의아했던 찰나 목소리가 들렸다.

“누님. 여기 계신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카이네스였다. 금방 돌아갈 줄 알았던 그가 문밖에 있었다.

피하던 중 아니었나? 왜 이제 와서 찾아온 거지?

의문과 울화가 한데 뒤섞였다.

“….”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있다고 하면 대화를 해야 할 텐데,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당장 입을 열면 화를 낼 것 같았는데, 카이네스와 싸우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던 중, 카이네스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누님, 저와 대화를 나누지 않으실 겁니까?”

대답하지 않으면 금방 돌아갈 줄 알았던 카이네스가 예상보다 끈질기게 굴었다.

여기서 피해 봤자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우린 법적으로는 부부니까.

참다못한 에스타가 결국 문을 벌컥 열었다.

“네가 할 말이 있기나 해?”

예상처럼 화가 먼저 튀어 나갔다.

며칠 전 저택에 거대한 사고를 치고는 사라져선 계속 피하지 않나, 말도 없이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않나.

사춘기가 올 시기도 아닌데 엇나가도 너무 엇나갔다.

카이네스는 평소보다 가라앉은 눈으로 에스타와 시선을 마주했다.

에스타 역시 미묘하게 들끓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카이네스 역시 마음이 그다지 평화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럼 말해 봐. 저택은 왜 얼렸으며, 그동안 뭘 했고, 나는 왜 피했는지. 아카데미 입학은 무슨 소리인지.”

에스타가 비스듬히 비켜서자 카이네스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일부러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카이네스는 시선을 돌릴 생각도 없이 에스타를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차분히 가라앉은 분위기와 굳은 얼굴. 그는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에스타는 팔짱을 낀 채 보란 듯이 날카로운 눈으로 째려봐 주었다.

카이네스는 며칠 새 얼굴이 아주 퍼석해졌고,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에 안쓰러워질 것 같았지만, 모른 척했다.

에스타는 스스로가 카이네스에게 유달리 약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날 일이 일찍 마쳤습니다. 그래서 누님과 외출하려 찾아다녔습니다.”

…갑자기 이 말을 왜 하는 거지?

카이네스는 목이 갑갑한 것처럼 단추를 풀었다. 그의 셔츠가 살짝 벌어졌다.

“누님의 하녀가 무언가를 들고 오더군요.”

…카타르샨의 편지!

그날 받긴 했지만 에스타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저택과 카이네스 때문에 정신이 팔려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뒤늦게 떠오른 카타르샨의 편지와 불안할 정도로 위태로워 보이는 카이네스.

‘설마 그걸 봤단 말은 아니겠지?’

에스타의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물론 편지는 보지 않았습니다. 누님의 개인적인 편지를 볼 만큼 어리석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카이네스의 시선이 살짝 떨렸다. 동시에 에스타의 눈동자 역시 떨렸다.

“누님의 방 안에서 아버지의 마력을 느꼈습니다. 아버지의 것인 줄 모르고 찾아냈지만요.”

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주먹을 꽉 쥔 카이네스가 날카로운 시선을 감추지 않은 채 말했다.

“누님, 이제 누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이 있죠.”

꿀꺽, 에스타가 침을 넘겼다.

대답을 들을 준비를 하고 온 카이네스는 물러섬 없이 물었다.

“왜 제 곁을 떠나려 하셨습니까? 결혼 생활 중에 불편한 점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니면 제가 괴물 같아서요?”

주춤거리며 눈을 내리깔던 그가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괴물이라니. 이것만은 절대 아니라 말할 수 있었다.

“오해야, 카이네스. 네가 괴물 같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이건 장담할 수 있다고.”

단호한 대답을 들은 카이네스의 눈이 살짝 누그러들었다.

“그럼 대답해 주세요. 왜 그런 걸 준비했는지.”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카이네스가 대답을 종용했다. 제대로 된 답을 듣기 전에는 떠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재깍대는 시계 초침 소리가 에스타의 귓가에 울렸다. 꿀꺽, 긴장감에 침 삼키는 소리가 귓전에 퍼졌다.

손에서 땀이 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카이네스와 눈을 마주칠 때면 죄책감이 마음을 쿡 찔렀다.

“결혼 전에 약속했었으니까. 네가 성인이 되면 헤어지기로.”

카이네스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단번에 인상을 구겼다.

“그럼 가짜 신분증은요? 인적이 드문 곳에 사 둔 저택은요?”

“…….”

에스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원작 때문에 미리 준비해 둔 거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사용하지 않는 게 제일 최상의 결과였다고, 나 역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카이네스는 본인이 소설 속 남주인지 전혀 모르니까.

에스타가 대답을 머뭇거리던 사이, 카이네스의 눈빛이 서서히 무너졌다.

빛이 사라진 탁한 눈동자가 올곧이 그녀를 바라봤다.

“저를 피하고자 사 두신 거 맞잖아요.”

비어 버린 눈동자에 서서히 원망이 차올랐다.

에스타는 아무 변명도 할 수 없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누님, 저와 무슨 사입니까?”

에스타는 갑자기 이게 무슨 질문인가 싶었다. 

카이네스는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눈망울을 일그러뜨렸다.

대체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

“계약으로 묶였지만 우린 부부입니다. 적어도 이런 얘기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말도 없이 사라질 준비를 하는 게 베일리 가문의 이혼 방법입니까?”

“내가 미안해. 카이네스.”

에스타의 사과에 카이네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필이면 일어선 카이네스의 소맷단과 에스타의 시야의 키가 맞았다. 여전히 소맷단에 그녀가 선물한 커프스단추를 끼고 있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죄책감이 그녀를 옭아맸다.

“당분간 누님과 웃으면서 대화하지 못 할 것 같습니다. 아카데미 역시 그래서 가려는 거고요.”

첫 만남보다 더 싸늘해진 얼굴로 카이네스가 손을 내밀었다.

“누님, 내놓으세요.”

“…뭘?”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 못 한 에스타가 몰라 눈치를 보며 물었다.

카이네스는 짜증 섞인 손길로 제 머리를 쓸어올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가짜 신분증이랑 저택 증서요. 설마 들켰으면서도 사용하려 하셨습니까?”

“아, 아냐!”

에스타는 서둘러 서랍을 뒤져 신분증과 저택 증서를 가지고 왔다.

카이네스의 손 위에 올려두자, 그가 확 움켜쥐었다.

“이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나지막이 말한 카이네스가 품에 신분증과 저택 증서를 넣은 뒤 에스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픈 정도는 아니지만, 벗어날 수 없을 정도의 힘이었다.

돌연 한 뼘 앞으로 다가온 카이네스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번 다시 말도 없이 이런 짓 벌이지 마세요.”

두 번 다시?

마치 한 번 더 기회가 있다는 듯한 말이었다.

표정은 당장이고 이혼하자고 말할 것 같은데도.

“그리고 명백히 말씀드리지만, 전 이 결혼을 먼저 깰 생각이 없었습니다.”

말이 과거형이었다. 이제는 아닌가 봐.

에스타는 뼈저리게 느꼈다. 카이네스가 정말 화가 났다는 걸.

차가운 눈, 날카로운 말만 튀어나오는 입, 분노가 섞여 옅게 떨리는 손까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경솔했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던 에스타는 변명 같은 사과만 줄줄이 늘어놓았다.

카이네스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도, 뭐에 그렇게 상처받았는지도 깊게 생각지 못했기에 당장 에스타가 할 수 있는 건 사과뿐이었다.

카이네스는 어깨를 놓으며 에스타를 살짝 밀어냈다.

“아뇨, 누님. 사과하지 마세요. 그러면 제가 더 비참해지잖아요.”

카이네스는 당장이라도 울 듯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갔다.

자신이 건넨 사과가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는 말이 에스타의 머릿속을 빙빙 돌아다녔다.

‘내가 정말 잘못했나 봐.’

상처뿐인 카이네스에게 또다시 큰 상처를 안겨 주고 말았다.

* * *

얼었던 페이시아 저택은 차츰 본래 모습을 되찾아 갔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얼음장 같았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살얼음판을 걷듯이 살금살금 걸으며 소음을 줄였다.

요즘 신경이 부쩍 날카로워진 소공작 때문이었다.

주방에서 아침을 챙겨 방으로 돌아온 엘리가 이마를 닦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휴, 오늘도 다들 얼마나 난리인지! 소공작님 눈치 보는 것도 일인데 오늘 아침에는 갑자기 수도관에 물이 터졌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래…?”

또 물을 얼렸구나. 그게 카이네스의 소행임을 알았기에 에스타의 마음이 더 착잡해졌다. 그마저도 제 탓 같았다.

“작은 마님은 또 왜 그러세요?”

“휴…….”

카이네스가 이상한 행보를 보였던 게 전부 자신의 탓이라는 걸 알았다.

믿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기분이겠지. 그 충격에 저택을 얼려 버릴 정도로 마력을 제어하지 못했다.

“이걸 대체 어쩌면 좋아.”

에스타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튀어나올 것 같은 울음을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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