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카이네스는 이른 아침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쳤다. 공작을 대신해 공작가의 일을 하는 것도 당분간은 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곧 카이네스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때문이었다.
카이네스는 집무실로 돌아가 업무를 마무리 짓고는 자리를 정리했다.
당분간 오지 않을 자리였다. 곧 자신을 대신해 공작가의 업무를 처리할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 급한 자료만 추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때마침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리며 카이네스를 찾았다.
“소공작님, 루이셀 경께서 오셨습니다.”
“내려가지.”
카이네스는 짧게 대답한 뒤 일 층으로 내려갔다.
일 층 응접실에는 다소 격앙된 표정의 루이셀이 며칠 전 호텔에서 챙겨 나간 짐을 그대로 들고 서 있었다.
카이네스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루이셀이 눈썹을 움찔 떨었다.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도련님.”
“오랜만이군.”
빈정거리는 루이셀의 말에 카이네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제 보니 도련님은 공작님이 이런 선택을 하실 줄 알고 계셨나 보군요.”
“아버지가 믿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니. 대강은 예상했지.”
“그런데 왜 아무 말씀도 안 해 주셨습니까! 수도가 영지 바로 옆 동네인 줄 아십니까? 제가 기차와 마차만 며칠을 탄 줄 아십니까? 다 합치면 일주일이 넘습니다!”
루이셀이 다 죽어 가는 듯한 표정으로 억울한 듯 소리쳤다.
“그때는 결정 난 게 없었으니까 미리 말해 줄 수 없었어. 힘들었다면 유감이야.”
“어휴, 내 팔자야.”
“일단 앉지.”
카이네스가 자리에 앉자 루이셀이 맞은편에 앉았다.
따뜻한 차가 나오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러니 꼭 제가 손님이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손님이지. 저택에 기거하는 방도 없고, 일하러 저택까지 온 거니.”
“제가 이 저택에서 일한 게 몇 년인데 손님이라뇨. 농담이라도 서운합니다.”
루이셀은 피식 웃으며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보니 작은 마님이랑은 잘 해결하셨습니까?”
말하자마자 카이네스의 온화했던 표정이 차갑게 굳어 버렸다.
금세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차를 들었지만, 그것조차 표정을 가리기 위해서라는 걸 루이셀은 알 수 있었다.
“아직 해결이 안 되셨나 보군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제가 바보인 줄 압니까? 전 도련님이 태어난 순간부터 봐 왔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뭐가 불만인지, 웬만큼은 알 수 있다고요.”
루이셀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카이네스를 바라보았다.
“흐음, 제 소견으로는 작은 마님과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오해가 아니었던가요?”
루이셀이 쓸쓸한 말투로 물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어떻게 해도 루이셀은 카이네스의 편이었다.
“전부 내 착각이었어. 그뿐이야.”
접시 위에 꿀이 발린 스콘이 차와 함께 나왔다. 페이시아 공작저에 에스타가 온 뒤로 생긴 변화였다.
단 걸 좋아하는 에스타를 위해 준비된 다과였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자신이 티 타임을 가질 때도 항상 나오곤 했다.
스콘만큼이나 자신에게 달게 행동했던 에스타가 떠올랐다. 카이네스는 자신도 모르게 스콘을 잘라 한입 먹었다.
“인정하기 싫었는데, 인정하니까 포기는 빠르더군.”
카이네스는 스콘을 먹는 것처럼 에스타를 가지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에스타도 그걸 알고 포기한 게 아닐까. 돌연 자신을 포기했으니까.
“포기하실 겁니까?”
“그러면?”
정작 루이셀은 포기한다는 카이네스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음이 그렇게 쉽게 변합니까?”
쉽게 변하지 않았다. 포기하기 싫은 건 카이네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오히려 도망가지 못하게 지하 감옥을 만들어 그곳에 에스타를 가둬 버릴까, 하는 음침한 생각까지 한 게 자신이었다.
하지만 질척일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붙잡는 건 미련하다는 걸 아니까.
움켜쥘수록 사람은 떠나게 된다.
단 걸 먹었는데도 어쩐지 카이네스의 입 안이 썼다. 그는 인상을 찡그린 채 포크를 내려놓고 입가를 닦았다.
“마음은 쉽게 변치 않지. 그래서 내가 떠나려는 거고. 삼 년이면 정리하기에 충분하니까.”
“도련님…….”
“이만 가 봐. 괜히 들쑤시지 말고.”
카이네스는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단 뜻을 내보이며 시선을 돌렸다.
루이셀은 시작도 않고 포기하려 드는 카이네스가 안타까웠다.
카이네스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서는 것에 서툴렀으며,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그 틈을 비집고 힘겹게 에스타가 들어간 것이다. 포기한다고 했으면서 미련 뚝뚝 떨어지는 눈을 한 카이네스를 보고 루이셀은 양손을 불끈 쥐었다.
“그, 그러면 작은 마님께서 아직 미련이 남으셨다면요!”
“…뭐?”
“혹시 모르잖아요. 정말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았을지도요. 포기가 너무 빠르신 거 아닙니까?”
루이셀의 도발 섞인 목소리에 카이네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듣기 좋은 말로 회유할 생각은 마. 짜증 나니까.”
듣기 좋은 말이라니! 이렇게 대놓고 미련을 보이면서 포기하겠다니!
루이셀은 더욱 눈을 반짝이며 의욕에 불타올랐다.
“즈, 증거를 찾아오겠습니다! 작은 마님이 작은 주인님을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증거요!”
“알아서 해.”
루이셀이 자리를 뜰 기미를 보이지 않자 카이네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아주 남아도나 보군.”
카이네스가 빈정거리며 자리를 뜬 뒤에 루이셀의 정신이 차츰 돌아왔다.
‘만약 작은 마님이 정말 도련님을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루이셀은 호텔에서 내내 침울하해던 카이네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연인과 헤어진 것보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해서 치를 떠는 모습이었다.
카이네스에게 에스타는 연인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존재라는 것.
어쩌면 유일한 가족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직 본인은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에효.”
루이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튀어나왔다.
* * *
요즘 카이네스와 자주 마주치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으니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카이네스는 호텔에서 지내며 가끔 저택으로 돌아와 일을 처리했고, 난 여전히 별채에서 지내는 중이었다.
본관은 절반 정도 모든 수리를 마쳤고, 내 방 역시 재건을 마쳤지만 어쩐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카이네스랑 마주치면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탁자 위에 반쯤 널브러지듯 엎드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루이셀과 집사장이 함께 찾아왔다.
루이셀은 영지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온 걸 보니 카이네스가 아카데미에 들어가 있는 동안 공작가의 대리인으로 일할 사람이 그인가 보다.
“무슨 일이세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말씀하세요.”
“작은 마님께서 공작가의 일원이 되셨는데도, 파티를 주관하지 않아서 사교계에 이런저런 말들이 떠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본관의 수리가 끝나는 대로 파티를 주관하심이 어떠신가요?”
할 때가 지나긴 했다. 벌써 했었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카이네스도 나도 그다지 파티에 관심이 없어서 계속 미루던 일이었다.
“그러죠.”
흔쾌히 대답하자 집사장이 예상치 못한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카이네스가 아카데미에 입학한다면 더욱 미뤄질 것이었다. 꼭 해야 할 일이라면 그 전에 하는 게 나았다.
“파티를 주최하시는 것이 처음이라서 부담되신다면 가볍게 오찬으로 진행해 보심이 어떻습니까?”
난 가볍게 고개를 저어 집사장의 제안을 거절했다.
“아뇨, 만찬으로 하죠.”
자주 여는 파티도 아니었고, 이번 파티를 마지막으로 몇 년은 파티를 열지 않을 작정이었다.
오찬 역시 세를 과시하기엔 좋았지만 만찬에 비할 수는 없었다.
귀족들에게 페이시아가 건전하다는 것을 과시하기에는 화려한 만찬이 제격이었다.
“이번 파티는 거대하게 열고 싶어요. 아주 화려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게요.”
세를 과시하겠단 말을 바로 알아들은 듯 집사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럼 가 봐요.”
집사는 공손히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갔다.
나가기 직전 루이셀과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루이셀을 위아래로 훑는 집사의 눈이 꽤 살벌했다.
문이 닫히자마자 루이셀이 어깨를 으쓱였다.
“집사장은 제가 작은 마님을 괴롭히는 줄 안다니까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없는 소리였어요.”
루이셀은 빙그레 웃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보랏빛의 독특한 머리카락 색을 가진 그는 아버지 또래의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어려 보였다.
독특한 행동이나 특유의 말투가 어려 보이는 그의 외모와 잘 어울렸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호텔에서 봤던 게 그리 길지 않은데요.”
“그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 두고 계십니까?”
루이셀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저절로 어깨가 움찔거리고 말았다.
루이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이듯 말했다.
“저는 이제 저택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공작가의 대리인으로 일하게 되어서요. 저택 내부의 일과 사업체 관련으로 일하지만 저택의 안주인이신 작은 마님께서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당연한 소리였다. 고개를 끄덕이자 루이셀이 눈을 접으며 웃어 보었다.
“그 전에 인사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앞으로 제가 일하는 데 있어 작은 마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도와주시겠어요?”
공작가에서 오래 일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사람이 무슨 도움이 필요할까?
하지만 바라보는 루이셀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 보여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루이셀이 과하게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여기에서 근무하는 걸 무척 좋아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