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카이네스는 점심 티타임을 루이셀과 보냈다. 아직 수리하느라 시끄러운 본관을 떠나 정원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루이셀은 티팟을 들었다.
“계속 모른 척하실 겁니까?”
“뭘?”
졸졸, 찻잔에 차가 채워지는 소리와 야외의 산들바람 소리가 섞여 들렸다.
“지금 나무 뒤에 숨어 자신이 안 보이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요.”
루이셀이 눈을 접어 웃었다.
‘귀엽기도 하시지.’
나름 조심스럽게 찾아온 건지 에스타의 행색이 단출했다. 하녀도 대동하지 않고 홀로 나무 뒤에 숨어서 카이네스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사실 에스타가 카이네스를 쫓아다니는 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산책로에서 마주치는 건 다반사, 식사 시간마다 먼저 찾아가고, 집무실 앞에서 출근 전에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그걸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먼저 피한 게 카이네스였다.
“도련님도 이미 눈치채셨잖아요.”
카이네스는 바람을 타고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을 애써 모른 척하며 찻잔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놔둬. 지치면 돌아가겠지.”
“하지만 햇볕에 약하신 분이시잖습니까. 계속 햇볕 아래 서 계시면 힘드실 텐데요.”
루이셀이 나무 뒤에 숨은 에스타를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카이네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지?”
에스타에 대해 먼저 말한 적은 없었다. 오롯이 눈치만으로 알아차리기에는 힘든 일 아닌가?
카이네스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루이셀을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가 눈치가 빠르잖습니까.”
공작가에서 지내며 사람이 인외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에스타도 그런 사람이 아닐까 눈여겨본 것뿐이었다.
루이셀은 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고 숟가락을 휘저었다. 찻잔을 카이네스의 것과 바꾸어 놓아 준 뒤 자리에 앉았다.
“저택이 유달리 빨리 녹은 것 하며, 저택이 침수돼 나무가 썩을 거라고 했는데 꼭 햇볕에 말린 것처럼 빠짝 마른 것 하며, 늘 우중충하던 도련님의 얼굴을 쫙 펴 준 것까지요.”
잘 듣고 있던 카이네스가 마지막 말에 얼굴을 확 구겼다. 루이셀은 마냥 재밌다는 듯 낮은 웃음을 쿡쿡 터트렸다.
카이네스가 짜증을 삭이기 위해 차를 한 모금 삼켰다. 루이셀이 만든 차는 꽤나 제 취향이었다.
단 걸 좋아한다고 제 입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루이셀은 알아차렸다. 그가 스스로 눈치가 좋다고 말할 법했다.
카이네스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았다. 에스타의 존재를 알아차린 이후 쭉 굳어 있던 어깨에 살짝 힘이 풀렸다.
“누님은 매번 저러지. 진심도 아니면서 오해할 만한 행동을 쉽게 해.”
찻잔을 쥔 카이네스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이게 누님의 단순한 호의라는 걸 받아들이는 중이야. 여전히 이해는 못 하겠지만.”
가정 폭력을 당하는 소꿉친구를 구해 주기 위해 결혼을 결심하는 게 일반적이지는 않잖아.
순간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타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네스,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에스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자신을 피하는 카이네스에게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어떤 말을 해야 화가 풀릴까 하고.
하지만 에스타가 찾아왔음을 알리자마자 카이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루이셀에게 말했다.
“승마를 하러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불청객이 찾아와서요.”
경어를 쓰는 카이네스가 깍듯이 인사까지 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게 에스타를 향한 불편함을 내비친 거라는 것을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울먹거리는 에스타를 본 루이셀은 당황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졸지에 벌떡 일어나 에스타를 달래기 시작했다.
“제, 제가… 많이 잘못했나 봐요. 어떡해요. 어떡하면 좋아요.”
털어놓을 곳이 없던 에스타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제 잘못이었지만, 에스타는 여전히 카이네스의 마음을 모두 헤아릴 수가 없었다. 꼭 중요한 하나를 놓친 기분이었다.
‘내가 아직 모르는 게 뭐지? 내가 뭘 놓친 것 같은데….’
훌쩍이던 에스타는 루이셀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졌다.
“좀 도와주세요, 카이네스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요.”
에스타가 울먹이며 부탁했다.
“물론이죠!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루이셀은 환히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품 안의 손수건을 꺼내 에스타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에스타가 흐릿하게 웃으며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어쩌면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르겠는데?’
루이셀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내적으로 춤을 췄다. 울먹인 탓에 눈 아래가 살짝 붉어진 에스타를 보며 안쓰러움을 느끼던 찰나, 어쩐지 제 볼이 따끔거렸다.
‘뭐지?’
의아한 기분에 볼을 긁적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미 멀리 떠난 줄 알았던 카이네스가 저 멀리 서서는 루이셀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루이셀이 그제야 에스타와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는 걸 깨달았다.
흠칫 놀라며 멀어졌지만, 속이 멋쩍은 건 숨길 수 없었다.
‘내 나이가 몇인데 딸뻘인 작은 마님과 같이 있다고 질투를 하시나요….’
에스타는 돌연 갑자기 멀찍이 떨어진 루이셀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리다 한 걸음 다가갔다.
“도와주신다는 말은….”
한 걸음 다가가자 루이셀이 두 걸음 더 멀어졌다.
“거기서 말씀하세요.”
“왜 점점 떨어지세요?”
“죄송합니다, 작은 마님. 제가 가까이서 말하는 걸 불편해해서요. 그곳에서 말씀하셔도 잘 들립니다.”
“아, 그렇군요….”
어딘가 겸연쩍었지만 크게 걸고넘어질 건 아니었다.
“카이네스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하고 싶어요.”
에스타의 질문에 루이셀이 환히 웃었다.
“제게 아주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 * *
“그게 정말 통할까?”
루이셀의 말을 의심하고 싶진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믿기 어려웠다.
“자꾸 찾아가면 곧 화가 풀릴 거라니.”
에스타는 별수 없이 마구간 앞, 큰 나무 밑을 서성이며 카이네스를 기다렸다. 유난히 뜨겁게 타오르는 날 때문에 몸에 열이 찼지만 꾹 참아 냈다.
카이네스와 화해하지 않으면 죄책감에 숨이 막혀 콱 죽어 버릴 것 같았다.
특히 상처받은 카이네스와 눈을 맞출 때면 더더욱 죄책감이 커졌다.
‘나 상처받았어요.’라고 하는 듯한 눈이었으니까. 카이네스가 평소 무덤덤하게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기에, 상처받은 그 눈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손톱을 깨물다 결국 피가 터지고 말았다. 검지를 입에 물자 입 안에 비릿한 피 향이 퍼졌다.
그때 저택 뒤로 이어진 산길에서 카이네스가 말을 타고 내려왔다.
익숙하게 말 고삐를 잡고 걸어오는 카이네스를 눈에 담았다.
이미 성인만큼이나 커져 버린 몸, 밤을 닮은 검은 머리칼.
카이네스가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타오르는 핏빛 눈동자.’ 이미 소설에 등장했던 카이네스의 특징을 모두 나열할 수 있을 만큼 그는 존재감을 뿜어냈다.
‘어릴 때 그대로 잘 자랐구나. 정말 잘생겼어.’
남주의 성장 과정을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빙의는 처음이니까. 서툰 탓에 남주에게 모든 걸 들킬 줄은 몰랐다.
“카이네스.”
에스타가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카이네스를 불렀다. 그러곤 삐꺽거리는 몸짓으로 그늘 밖으로 나갔다.
카이네스는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고 지나쳐 마구간 앞에 멈춰 섰다. 말에서 내리기까지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고 매정하게 굴었다.
“카이네스, 조금이라도 대화할 수 없을까?”
감정이 울컥 올라왔지만 꾹 눌러 참았다. 여기서 울었다가는 진심으로 사과할 수 없었다.
울음을 빌미로 사과를 얻어 내고 싶지 않았다.
카이네스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게 허락이라는 걸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그, 그게…. 내가 절대 너를 나쁘게 속여 먹으려는 게 아니었어. 작은 오해였는데, 그것 때문에 네가 상처를 받은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해.”
묵묵히 듣던 카이네스는 승마용 채찍을 말 등 위에 얹어 두고, 쓰고 있던 헬멧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헬멧에 조금 놀라 뒷걸음질 쳤다. 카이네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한 걸음 다가왔다.
카이네스는 안전을 위해 가슴 쪽만 은빛 경갑을 덧댄 승마복을 입고 있었다.
잘 관리된 경갑 위로 당황한 제 얼굴이 비쳐 보였다.
“누님은 제가 왜 화가 났는지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 풀어 줄 수도 없죠.”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 같았던 카이네스가 서서히 거리를 좁혀 왔다.
에스타는 졸지에 뒷걸음질 쳤고, 어느새 나무 그늘 밑으로 돌아와 있었다. 등 뒤로 딱딱한 나뭇결이 느껴졌다. 카이네스는 그제야 걸음을 멈췄다.
카이네스는 무언가를 꾹 눌러 참는 것 같았다. 꽉 다문 입술, 자꾸만 흔들리며 불안해 보이는 눈동자까지.
카이네스는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잡았다가 놓기를 반복하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줄 알지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누님의 마음에 동참할 수 있게끔.”
생각보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에스타가 얼마나 안했는지, 카이네스는 모를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더는 다가오지 말란 말이에요.”
카이네스는 머리를 만지던 손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조금 더 단호해진 얼굴로, 흔들렸던 적 없다는 눈으로 에스타를 쳐다보았다.
“제가 오해하게 하지 마세요. 다정하게 굴지 말고, 여지도 주지 마세요. 세상에 저밖에 없는 것처럼 이렇게 매달리지도 말고요.”
언제 붙잡았는지도 모를 내 손을 카이네스가 단호하게 떼어 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카이네스!”
에스타의 부름에도 카이네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빠른지 금세 저택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에스타는 그늘 아래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비가 올 것처럼 날이 우중충해지고 있었다.
“더는 다가오지 말라니….”
카이네스의 말과 더불어 루이셀의 조언이 떠올랐다.
“적어도 세 번은 더 찾아가 대화를 나누셔야 합니다!”
신신당부하던 게 떠올랐다.
“무슨 말을 따라야 하는 거야?”
머리가 어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