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다음 날, 카이네스가 승마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에스타가 마구간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분명 그만 찾아오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제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에스타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불안하면 오지를 말든지.”
말 고삐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짧은 숨을 내쉰 뒤 카이네스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말을 타는 동안 시원해졌던 마음이 에스타를 마주하자마자 다시 불편해졌다. 낮은 심박 수로 뛰기 시작한 심장은 제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은 자꾸만 에스타를 쫓아 의식하지 않으면 빤히 보게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에스타와 눈이 마주쳤다.
“카이네스, 찾아와서 미안해.”
“미안하면 왜 오셨습니까.”
카이네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기다리고 있던 마부에게 고삐를 넘긴 뒤, 갈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수고했어.”
말은 마치 카이네스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푸르릉,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과 짧은 인사를 나눈 카이네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할 말이 있으면 하십시오.”
쳐다보지도 않은 채 비스듬히 서서 말하는 카이네스를 보며 에스타가 울상을 지었다.
“계속 고민해 봤는데…. 가끔이라도 마주쳐야 나중에 어색하지 않을 거 같아서.”
“그래서 찾아오셨다고요? 고작 하루도 기다리지 못해서요?”
카이네스가 삐딱하게 되묻자 에스타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이게 하루를 꼬박 생각해 만든 변명이냐!’
스스로가 생각해도 엉성했다. 루이셀의 조언을 따르기 위해 찾아오긴 했지만, 어쩐지 카이네스는 더 불편해 보였다.
‘괜히 왔나 봐.’
에스타는 제 드레스 앞자락을 비틀어 쥔 채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카이네스는 제게 마음도 없으면서 자꾸 애정과 관심을 주는 에스타가 얄미웠다.
왜 찾아오지 말라는지도 모르고, 왜 자신이 화를 내는지도 모르면서 자신이 화를 내니 화를 풀어 주고 싶다는 제 마음만 앞세운 게 에스타였다.
“하아…….”
한숨을 내쉰 카이네스의 귀 끝이 붉게 물들었다.
‘진짜 화났나 봐, 어떡해!’
에스타는 드레스를 쥔 채 바닥을 내려다보느라 카이네스의 기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카이네스, 내가 미안해!”
소리치듯 말하자 카이네스가 두 눈을 크게 뜨고는 깜빡였다.
“예.”
단호한 대답에 에스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더는 사과할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카이네스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카이네스는 곧 아카데미에 갈 거고, 돌아오면 이혼이었다.
카이네스와의 관계를 이대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누님, 말 탈 줄 아십니까?”
카이네스가 다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지만, 에스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급했다.
“응!”
“그럼 승마하러 가겠습니까?”
카이네스가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예상치 못한 카이네스의 호의에 에스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죠.”
* * *
“누님, 왜 거짓말하셨습니까.”
카이네스가 황당한 얼굴로 에스타를 내려다봤다.
“아니, 그게….”
나도 내가 말을 못 타는 줄 몰랐어.
예법을 기억하는 것처럼 말도 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에스타도 승마를 배우지 못했나 보다.
카이네스가 들으면 황당할 소리기에 입을 꽉 깨물어 대답을 참았다.
“미안해, 너무 급해서. 네가 먼저 제안해 줬는데 못난 모습 보여서 미안해.”
어색하게 웃자 카이네스가 고개를 홱 틀었다. 옅게 붉어진 목덜미를 보니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실망이라도 한 걸까?
‘못 탄다고 바로 말할 걸 그랬어.’
에스타는 생각이 짧았던 자신을 탓했다. 카이네스가 또 자신의 거짓말에 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긴장된 탓에 카이네스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용서해 줘. 거짓말한 게 아니야. 그냥 너랑 있고 싶어서….”
진심을 담은 눈초리로 카이네스를 올려다봤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카이네스의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
“누님. 지금 일부러 그러시는 겁니까?”
뭘 일부러 그런다는 거지?
그의 말을 뒤늦게 이해한 에스타가 얼른 말을 덧붙였다.
“설마 일부러 거짓말했다는 거야? 정말 아니라니까!”
너무 억울한 나머지 에스타는 카이네스에게 얼굴을 내밀며 진실한 눈동자를 강조했다.
“정말 아니야! 내가 이미 한 번 호되게 당했는데 또 거짓말을 할 사람으로 보여? 나 그렇게 생각이 없진 않아!”
“알겠으니까 일단 좀 떨어지십시오!”
어느새 에스타의 손이 카이네스의 승마복 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놀라 깃을 놓아주자 카이네스가 숙였던 허리를 펴며 제 옷을 탁탁 털어 정리했다.
“누님은 말을 못 모니 어쩔 수 없이 한 말로 타야겠습니다.”
“그래도 돼?”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부부인데.”
카이네스가 얇은 눈으로 에스타를 바라봤다. ‘부부’라는 말을 할 때면 꼭 그녀가 미운 것처럼.
“타시죠.”
카이네스가 먼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까 산에서 내려올 때 타고 있던 말은 그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검은색 말이었는데, 이번에 내온 말은 갈색이었다.
“다른 말이야?”
에스타가 카이네스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카이네스는 말 위로 오르는 그녀를 든든하게 지탱하며 대답했다.
“네, 이미 산을 달리고 돌아온 말을 또 힘들게 할 순 없어서요.”
“그렇구나.”
“자리는 편하십니까? 불편하신 점이나, 필요한 게 있다면 지금 말씀해 주세요.”
카이네스는 에스타를 세심하게 챙겼다.
“아냐, 없어.”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카이네스는 가볍게 뛰어올라 단번에 말 뒤에 안착했다.
‘어?’
에스타는 예상치 못한 불편한 점이 뒤늦게 알아차렸다.
카이네스와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거였다.
어린 시절부터 봐 온 카이네스가 이제 와서 남자로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새삼스레 그가 성장했다는 게 느껴졌다.
키가 컸고, 몸이 자랐다는 것은 눈으로 익히 봐 와서 알았다.
하지만 단단해진 몸이 등으로 느껴졌고, 언제부터인지 달라진 사향 향이 코끝을 스쳤다.
“고삐를 잡으셔야죠.”
그제야 고삐도 잡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은 에스타가 급히 붙들었다.
‘어? 어어??’
그런데 그녀의 손 위로 카이네스의 손이 얹어졌다.
“출발하겠습니다.”
언덕을 오르는 내내 에스타는 제멋대로 뛰는 심장이 불편했다. 그 상대가 카이네스라 더더욱 어쩔 줄 몰라 심장 부근을 손으로 내리쳤다.
* * *
토독, 긴장한 손등 위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어제부터 흐렸던 날씨가 결국에 비를 뿌리고 말았다.
“돌아가야겠습니다.”
하늘 위, 곧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 구름이 보였다.
하필이면 카이네스와 대화할 수 있게 됐는데 날이 따라 주지를 않았다.
“아쉽네.”
“많이 아쉽습니까?”
말 고삐를 당겨 방향을 바꾼 카이네스가 물었다.
“응,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사실 며칠 동안 계속 쫓아다녔어. 알아?”
“몰랐습니다.”
카이네스가 시치미를 뚝 떼며 대꾸했다.
‘거짓말. 사실 알아차렸으면서. 내가 찾아가면 늘 불편하다는 기색으로 자리를 떠났으면서.’
모른다고 말하는 카이네스의 얼굴이 너무 뻔뻔해서, 하마터면 ‘아, 그렇구나. 넌 몰랐구나.’ 하며 넘어갈 뻔했다.
‘카이네스는 생각보다 거짓말을 잘하는구나.’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대꾸하는 카이네스를 보던 에스타가 고개를 돌렸다.
바로 뒤에 앉은 카이네스를 보는 건 목이 아팠다. 그리고 곧 소설 속 남주인공이 될 나이라는 걸 인지하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누님,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마음에도 없다니?”
“그… 누님 특유의 실없는 소리 말입니다.”
설마 주접을 말하는 거니?
에스타는 조금 얼빠진 표정으로 말 고삐를 움켜쥐었다.
그 알맹이 없는 소리를 전부 귀담아들었다는 건 아니겠지?
“제가 잘생겼다느니, 예쁘다느니, 크면 절세미인이 되겠다느니, 내 편이라느니, 꼭 구해 주겠다느니…… 그런 말들이요.”
카이네스가 쉬지 않고 줄줄 나열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목덜미에 카이네스의 한숨이 스쳐 지나갔다.
어릴 적부터 습관처럼 잘생겼다는 말을 뱉었던 게 떠올랐다. 잘생긴 사람한테 잘생겼다고 한 건데.
“익숙한 줄 알았어. 넌 잘생겼으니까.”
“또. 하지 말라니까요.”
카이네스가 나지막이 핀잔을 주었다.
“알았어. 그게 싫은 줄은 몰랐어.”
“싫은 게 아니라요….”
카이네스는 뒷말을 뱉지 않았다. 무언가 말이 이어질 것 같았는데 뚝 끊겨 버렸다.
카이네스는 묵묵히 말을 몰았다. 저택 입구가 작게 보일 때쯤이었다.
“난 여전히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네가 상처받고 힘든데 내가 모르는 기분이라고.”
에스타가 카이네스의 눈치를 보며 말을 뱉었다. 카이네스는 또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잘 알고 계시네요.”
“알려 주면 안 될까? 난 너와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은데.”
고삐를 잡은 카이네스의 손등 위로 에스타의 손이 닿았다. 채근하듯 작게 흔들자 카이네스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그렇게 힘든데?’
에스타가 뒤돌아보자 카이네스는 곧바로 잔소리했다.
“앞을 보세요.”
카이네스는 저택 앞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꽤 비가 내려 옷이 서서히 젖기 시작했다.
얼굴이 점점 축축해지더니 빗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말에서 먼저 내린 카이네스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난 잡지 않았다.
“뭐 하십니까?”
카이네스가 고개를 들고 그제야 에스타와 시선을 맞췄다.
“왜 쌀쌀맞게 굴어? 아직도 화가 많이 났니? 풀리지 않을 것 같아?”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울음이 터졌다.
카이네스와 이대로 멀어질 거라 생각하니 서운하고 미안했다.
비와 섞여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카이네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에스타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자 카이네스가 에스타의 손을 잡아 멈췄다.
그는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에스타의 눈가를 토닥이듯 닦아 주었다.
역시나 다정하다.
“저 원래 다정한 성격은 못됩니다. 누님도 아시잖습니까.”
“이제는 달라졌잖아. 곧잘 웃었으면서.”
“아니요. 누님이라서 다정한 척한 것뿐이에요.”
카이네스는 에스타에게 손수건을 쥐여 주곤 그녀를 품 안에 안아 말에서 내려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바닥에 닿지 않았다. 카이네스가 품 안에서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받치고, 다른 팔이 다리를 받쳤다. 꼭 아이처럼 안아 든 카이네스는 움직이지를 않았다.
토독토독, 카이네스의 얼굴에 떨어진 비가 굴곡진 얼굴을 타고 흘렀다.
에스타는 손수건으로 카이네스의 얼굴을 닦아 주며 눈치를 봤다. 또 싫어하며 밀어 낼까 봐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카이네스는 짧은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미묘한 분위기에 에스타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카이네스에게 들리는 건 아니겠지?
“모르는 척하는 겁니까? 정말 모르는 겁니까?”
카이네스가 진중하게 물었다. 잔잔하기만 했던 눈동자가 파도가 치듯 진한 감정이 몰아쳤다.
얼굴을 닦던 손을 잡아 내렸다. 도착한 곳은 그의 심장 부근이었다.
“누님,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