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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58/83)

57화

“마력이 넘칠 만큼.”

올곧이 향하는 카이네스의 눈빛이 너무 간절했다. 예상치 못한 고백이 당황스러운 에스타가 손을 빼내려 했으나 카이네스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들어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좋아합니다.”

“읏!”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생소한 감각에 입에서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창피해서 볼이 확 달아오르자 카이네스가 귀엽다는 듯 낮게 웃었다.

“그게 누님이 알아차리지 못한 점이겠지요.”

카이네스가 에스타의 손을 놓아주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품 안에 안고 있었다.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내… 내려 줄래?”

“싫습니다. 내려 주면 도망갈 거 아닙니까?”

…어떻게 알았지? 눈치만 빠른 자식.

난감해서 얼굴이 잔뜩 달아올랐는데, 정작 고백한 사람은 평온한 얼굴로 자꾸 눈을 맞추려 한다.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냐고!

“누님 대답해 주셔야지요. 거절입니까? 아니면 승낙입니까?”

카이네스는 제 감정을 털어놓은 것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는 것처럼 생글생글 웃었다. 에스타가 시선을 피하자 얼굴을 내밀어 억지로 눈을 맞췄다.

사랑스러움을 가득 담은 붉은 눈이었다. 이게 어떻게 핏빛 눈동자랑 같은 눈이냐고.

“으으…. 치사하게 얼굴 공격하지 마.”

카이네스의 볼을 꾹 누르며 밀어 내자 카이네스가 또 손바닥에 쪽 하며 뽀뽀를 했다.

“쫌!”

에스타는 혹시나 누가 볼까 두려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이네스가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였다.

“누가 좀 보면 어떱니까? 페이시아 저택에서 부부가 애정 행각 좀 하겠다는데.”

쟤 진짜 부끄러움이 없나 봐.

“왜 참으려 했을까요? 이렇게 좋은데. 제가 멍청했습니다.”

에스타는 카이네스의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과하게 부담스러웠다. 자신의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카이네스가 날 좋아한다니?

원작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카이네스와 잘될 거란 선택지는 아예 없었다.

이유는? 카이네스가 에스타에게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계속 봐 왔다. 카이네스의 사춘기 시절도,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변성기가 오기 전, 미성이던 시절도. 자신보다 작았던 적도 있었고, 팔목이 가느다래서 자신이 지켜야만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남자로 느끼라고?

에스타의 눈에 카이네스는 여전히 아이처럼 보였다. 한없이 연약하고 지켜야 할 아이.

‘몸이 커졌다고 다 어른은 아니잖아?’

카이네스는 여전히 마음이 연약해 보였다.

‘그래. 거절해야겠어.’

이런 애매한 마음으로 카이네스를 받아 줄 수는 없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카이네스의 어깨를 두드렸는데, 카이네스의 얼굴이 너무 밝았다.

“카이네스, 진정 좀 해 봐!”

“싫습니다. 거절하실 거잖아요.”

“…어?”

카이네스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대답했다. 분명 눈은 환히 웃고 있는데, 이상한 부조화를 이루었다.

곧 고백을 거절당할 사람치고 너무 행복한 얼굴이었다.

“누님은 저를 좋아하지 않잖아요.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그런데 왜 고백을 했어?”

“제가 못 견디겠어요. 누님이 다가왔잖아요. 전 분명 그만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카이네스의 눈이 낮게 타올랐다. 물 마법사면서도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혀 잡은 손을 타고 온기가 느껴졌다.

타오르듯 닿기만 해도 화끈거림이 남았다.

“그러니 이제 누님의 몫이에요.”

카이네스는 브레이크를 잃은 트럭처럼 거침없이 돌진했다. 품 안에 갇혀 도망치지도 못한 채, 에스타는 점점 다가오는 카이네스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입을 맞출지도 몰랐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결국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이네스!”

어깨를 확 밀치자 카이네스가 밀려 났다. 그런데 너무 쉽게 밀려 난 게 문제였다.

강한 힘의 반동으로 몸이 휘청거리더니 몸이 곧 뒤로 넘어갈 듯 휘었다.

당황해서 팔을 허둥거리다 말 고삐에 그만 팔이 걸렸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고삐가 당겨 발을 크게 구르던 말 아래에 에스타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흙탕물을 굴러 찝찝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바로 위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커다란 말발굽을 보자마자 죽음을 직감했다.

‘진짜 죽는다!! 아이고, 원작 구경도 못 해 보고 죽네!!’

에스타는 눈을 질끈 감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제 말발굽이 자신을 밟으면 갈비뼈나 목뼈가 으스러지겠지. 과다 출혈이 날 테고, 이 시대에는 그다지 발달한 의술이 없으니 죽을지도 몰랐다.

카이네스가 잘 치료해 주면 살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카이네스는 마력을 잘 다루지 못하니까.

유혈이 낭자하게 죽어 가는 자신의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코끝에 짙은 사향이 났다. 몸을 붙잡은 카이네스의 거친 손길 역시.

눈을 번쩍 뜨자 같이 바닥을 뒹구는 카이네스가 보였다.

승마복을 입어도 가려지지 않았던 그 단단한 가슴이 날 맞이했다.

의아했던 찰나 카이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카이네스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떨렸다.

고개를 돌리자 말이 서 있던 바닥이 보였다. 바닥이 움푹 팬 것이 무언가 밟은 것은 분명했다.

그제야 에스타의 시야에 카이네스가 들어왔다. 오른팔이 으스러져 피를 잔뜩 흘리고 있는 카이네스가.

“카이네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사람들을 부르려 하자 카이네스가 왼손으로 에스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제가 물 마법사인 거 잊었어요? 조금만 이대로 있으면 돼요.”

“하, 하지만….”

피가 흘러 바닥을 적셨다. 빗물과 섞여 빠른 속도로 퍼져 갔다. 꼭 카이네스가 죽을 것만 같아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카이네스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누워 있었다. 그게 진짜 죽어 가는 것 같아 불안했다.

“카이네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사람들을 불러 방으로 옮겨 줄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어?”

울먹이며 묻자 카이네스는 힘겹게 손을 들어 눈가를 쓸어 주었다.

“가만히 있어. 움직이기도 힘들면서….”

“네, 누님.”

순순히 팔을 내리는 걸 보니 진짜 힘들긴 한가 보다.

빗속에서 그를 멍하니 보고만 있을 때 카이네스가 손을 내밀었다.

“잡아 주세요.”

덥석 손을 잡자 카이네스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조금이면 될 거예요.”

카이네스의 말이 거짓은 아닌지 기이하게 꺾였던 카이네스의 팔이 엉성하게나마 형태를 갖췄다.

“네가 물 마법사라 정말 다행이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카이네스의 손등을 적셨다. 죽은 듯 눈을 감았던 카이네스가 실눈을 뜨고는 날 쳐다봤다.

“작은 마님?”

계속 돌아오지 않는 작은 주인을 찾기 위해 돌아온 마부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

“자, 작은 주인님!!! 다, 당장 사람들을 불러오겠습니다!”

팔이 부러져 바닥에 누워 있는 페이시아 도련님, 그 옆에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울고 있는 도련님의 부인. 그리고 말.

이 상황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박이던 사이 마부가 소리를 지르며 본관의 문을 부서져라 두드렸다.

“도, 도련님의 팔이…!”

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카이네스를 보필했다. 의원과 치료사를 부르고, 카이네스를 방으로 옮겼다.

그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곧장 진찰을 받았다.

카이네스는 ‘낭패’라는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능력을 쓰면 한 시간이면 붙을 팔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들킨 이상 능력을 사용할 수가 없어졌다.

* * *

“나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낫는다면 적어도 반년은 걸릴 겁니다.”

암담한 표정으로 진찰을 하던 의원이 말했다.

“더는 팔을 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집사장과 시종장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하녀장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주인님이 봉변을 당해 팔을 못 쓸 수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에스타도 놀란 얼굴이었지만, 카이네스가 물 마법사라는 걸 아는 그녀는 다른 의미로 놀라고 말았다.

‘팔은 곧 나을 텐데. 부목을 반년 동안이나 차고 있어야 한다고?’

그 순간 카이네스와 에스타의 눈이 맞았다. 카이네스의 눈이 얇아졌다. 마치 그녀를 장난스레 탓하는 듯했다.

“그렇군.”

정작 봉변을 당한 주인이 너무도 침착한 탓에 사용인들은 애써 슬픔을 참았다.

그나마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라고는 루이셀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반년 정도 걸린다는 거군.”

자신의 팔이 다친 것임에도 무척 객관적인 눈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의 팔이라도 되는 듯 의원에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부목을 덧대던 의원이 카이네스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페이시아 소공작은 사교계에서 유명한 인사였다.

귀족 가문에서 후계 싸움은 흔한 일이었다. 누구나 권력을 쥐고 싶으니까.

하지만 페이시아 소공작은 그런 권력 싸움에서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유일한 직계 혈통이었으니까.

늘 고고하고 우아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다친 와중에도 고고한 자태를 유지했다.

귀족에게 장애는 분명 그의 입지에 큰 흠일 텐데도, 장애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말에 흔들림이 없었다.

“치료는 다 끝났습니다. 자연적으로 낫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최대한 움직이지 마십시오. 약은 처방해 드리겠지만 움직이지 않는 게 최선입니다.”

“알겠네.”

대답하는 소공작의 입가에 큰 미소가 걸렸다.

의원은 영문도 모른 채 약을 처방해 준 뒤 돌아갔다.

* * *

집사장의 성화에 못 이겨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낮잠을 자고 말았다.

눈을 뜨자 침대 맡에 잠든 에스타가 보였다.

팔이 부러진 이후 쭉 곁을 지키던 에스타였다. 다른 사람들이 있어 둘만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에스타가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불편하게 잠든 에스타를 보며 카이네스는 조심스레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질척이지 않으려 했는데. 누님이 이러니 욕심이 나잖아요.”

자꾸만 다가오는 에스타, 마음 가는 대로 하라는 에스타.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가지라던 에스타.

머릿속에 에스타가 했던 말들이 자꾸만 그를 부추겼다.

욕심이 난다면 틀어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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