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식사가 나오자 큰 문제가 생겼다. 왼손으로 포크를 쥔 카이네스가 자꾸만 음식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툭, 바닥으로 고기가 떨어지며 소스가 튀었다.
“…….”
식당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갓 수저질을 시작한 아이처럼 자꾸만 음식을 흘리는 카이네스와 그를 안쓰러워하는 하녀들.
아직 한 입도 먹지 못한 카이네스를 보며 에스타는 제 속만 채울 수는 없었다.
“왼손으로 먹는 거 힘들지?”
그녀가 조심스럽게 묻자 카이네스는 멋쩍은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좀 불편하네요.”
카이네스가 한 입도 먹지 않고 포크를 내려놓자 식사를 돕던 하녀장이 공손히 말했다.
“제가 식사를 도와드릴까요?”
“곧 성인을 앞둔 나를 하녀장이 먹여 주는 건 보기 좋지 못할 텐데.”
카이네스가 가볍게 거절하자 다음은 시종장이었다.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시종장을 바라보는 카이네스의 눈이 묘하게 불손해졌다. 뒤늦게 눈치를 채고 시종장은 고개 숙인 채 뒷걸음질 쳤다.
카이네스는 예쁜 미소를 걸친 채 왼팔로 턱을 괴곤 에스타를 쳐다봤다.
그가 원하는 게 뭔지 너무 훤히 보였다.
에스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그의 수저를 쥐었다.
“내, 내가 먹여 줄게.”
이 말 한마디가 뭐라고 이렇게 떨리는 건지.
뱉고 나서도 부끄러워서 에스타의 볼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부인이요?”
“난 네 부……인이니까. 이, 이건 팔이 다친 너를 보필하는 일이잖아.”
어렵사리 말하자 카이네스가 눈을 더욱 반짝거렸다.
샹들리에 아래 앉아 있는 그는 샹들리에 불빛보다 더 훤했다. 미남의 힘이란 실로 대단한 거였다.
“그렇군요. 누가 봐도 오해할 일이 없겠어요.”
“하하.”
연극이라도 하듯 카이네스와 마주 보고 이상한 웃음을 흘렸다. 하녀장과 시종장이 흠흠 소리를 내며 자리를 피했다.
에스타와 카이네스만 남은 건 아니었다. 식사를 돕는 하녀들이 여전히 있었기에 카이네스에게 물을 수가 없었다.
‘팔 낫지 않았어? 사람들을 물리면 이런 연극 안 해도 되잖아!’
차라리 카이네스가 방으로 식사를 차린다고 했을 때 놔둘 걸 그랬다며 에스타는 뒤늦게 후회했다.
그러면 밥을 먹여 줘야 하는 민망한 상황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은 거였다. 에스타는 긴장된 손길로 수프를 한 숟갈 떠 그에게 내밀었다.
꽤나 거리가 있었고, 긴장돼 손이 떨렸다. 숟가락에 담은 수프가 남아날 리가 없었다.
“아.”
숟가락에 수프 향만 남은 것 같은데 카이네스는 빈 수저를 물고도 환히 웃었다.
“맛있네요.”
으어, 미남의 웃음이다!
카이네스가 웃자 에스타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해라도 뜬 것처럼 이상하게 눈이 부셨다.
또 혼자 주접을 떠는 모습에 카이네스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모습만 봐서는 어제 고백한 사람이 나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고백한 사람이 뭐 저렇게 멀쩡하냐….
민망함은 자신의 몫이라 에스타는 수저로 수프를 분탕질하듯 흔들어 버렸다.
“누님, 저 배고픈데요.”
“아, 미안. 수프 줄게.”
어색하게 다시 수저를 들었을 때였다.
카이네스가 멀쩡한 왼팔로 그녀가 앉은 의자를 확 당겨 버렸다.
“으아!”
에스타는 순간적으로 놀라 소리를 지른 입을 양손으로 막아 버렸다.
“뭐, 뭐 하는 거야.”
혹시나 하녀들이 봤을까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낮게 나무랐다.
젊은 부부가 낮부터 붙어 있는 것도 귀족에게는 흠이지만, 식사 예절을 지키지 않는 것도 흠이었다.
카이네스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낸 것이다.
“거리가 먼 것 같아서요. 누님이 자꾸 수프를 흘리시기에 제가 도움을 드렸습니다.”
잘했죠? 라고 말하는 듯 뻔뻔하게 웃는 카이네스를 보며 에스타는 황당한 숨을 뱉었다.
얘가 하루아침에 능구렁이를 잡아먹고 왔나, 아니면 능구렁이에게 잡아먹혀 카이네스의 탈을 쓴 능구렁인가?
별생각이 다 들었다.
카이네스는 그저 예쁘게 웃으며 입을 ‘아’하고 벌렸다.
에스타는 다시금 따뜻한 버섯 수프를 떠 한입 먹여 주었다.
‘이 정도 힘이면 그냥 왼손으로 먹을 수 있는 거 아냐?’
눈을 내리깔고 입만 벌린 카이네스가 너무 예뻐서 얄미움은 금세 날아갔다. 정말이지 무서운 외모였다.
“맛있네요.”
“그래, 많이 먹어라.”
“누님이 줘서 더 맛있는 거 같아요.”
에스타의 볼이 확 달아올랐다. 얘는 뭐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담?
그녀는 카이네스가 질릴 만큼 쉽게 애정 어린 말을 뱉었지만, 여전히 카이네스가 하는 주접에는 면역력이 없었다.
예쁘다는 말을 가족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들은 적이 없었으니까.
‘어색해.’
괜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딘가 살살 간지러운 기분이 식사 시간 내내 계속됐다.
이 식사 시간만 끝나면 해방인 줄 알았는데, 방으로 돌아가려는 에스타의 팔을 카이네스가 붙잡았다.
“누님, 시간 있으십니까?”
시간? 저택에서 지내며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하지만 식당에서 요망하게 구는 카이네스를 보니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왜…?”
“밤새 땀을 흘려서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찝찝해서요.”
카이네스가 왼팔로 셔츠 자락을 펄럭이자 주변 하녀들에게서 ‘어머, 어머.’하는 탄성이 터졌다.
“오해를 살 만한 말이잖아. 조심 좀 해.”
“오해요? 누님 때문에 땀이 난 게 맞는데요.”
“야, 쫌!”
당황한 에스타가 카이네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손을 뻗으면 카이네스의 입술 끝이 간신히 닿았다. 발끝에 힘을 줘야만 닿을 수 있었는데, 카이네스가 스스로 허리를 굽혀 주었다.
제 입 틀어막으려고 뻗은 손인데 스스로 도와준 것이다.
‘진짜 요망해.’
에스타는 얇게 뜬 눈으로 카이네스를 노려봤다.
“일부러 그랬지? 사람들 들으라고. 나 창피하라고.”
카이네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스타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으니까.
주변을 기웃거리자 아까 재미나게 구경을 하던 하녀들은 이미 자리를 뜨고 없었다.
저택에서 귀족 부부의 사생활을 지켜 주는 것 역시 사용인들의 규율 중 하나였다.
사라졌다는 걸 알고 손을 떼어 주려던 찰나였다.
카이네스가 제 손으로 내 손을 직접 잡고 떼어 냈다. 어딘가 차분한 얼굴에 화가 났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사실 맞습니다. 놀릴 때 누님의 얼굴이 재밌거든요.”
카이네스는 잡힌 손바닥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읏, 카이네스!”
놀란 에스타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카이네스가 손을 놓아주었다.
카이네스는 어제 고백 이후로 스킨십이 부쩍 늘었다. 쉽게 다가오고 쉽게 입을 맞춘다.
카이네스가 그럴 때마다 심장 어딘가가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분명 잘생겨서 그런 걸 거야! 페뷰어 오라버니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런 놀라움일 뿐일 거야.
스스로 애써 마음을 침착하게 유지했다.
어린 시절부터 봐 온 꼬맹이 카이네스를 좋아한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놀라운 외모니. 그러려니 싶었다.
“누님, 도와주실 거죠?”
“응?”
“옷 갈아입는 거요.”
에스타는 카이네스에게 홀려 문득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는지도 잊고 있었다.
“사실 팔이 다 낫지 않았어요.”
“왜?”
“마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요. 당분간 의원에게 진찰을 받아야 할 텐데 하루아침에 나아 버리면 이상하잖아요. 페이시아의 힘은 금기인걸요.”
세상에, 그럼 아직도 팔이 부러진 상태란 말인가?
놀란 에스타가 곧장 카이네스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고 부축했다.
“말을 하지! 그럼 식사를 한다고 굳이 일 층까지 내려오지도 않았어! 난 네가 어젯밤에 나를 침대에 눕힌 것 같고, 멀쩡해 보여서…. 하……. 변명할 여지도 없어. 내가 미안해.”
에스타가 호들갑을 떨며 카이네스를 부축했다. 어제 팔이 부러진 애가 식사하자고 일 층까지 내려왔다는 게 믿을 수 없었다.
무감각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면 통각이 마비된 거 아닌가?
“도와주신다니 마음이 한결 편하네요.”
카이네스는 옅은 미소를 흘렸다. 얼굴을 보니 꽤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팔 부러진 게 뭐가 좋다고.
애초에 팔 부러진 거도 에스타의 탓이었다. 그녀가 당황해서 말 고삐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말이 놀랐으니까.
물론 카이네스가 갑자기 키스할 것처럼 굴지만 않았다면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스타의 살짝 볼이 달아올랐다.
카이네스와 있으면 유난히 볼이 잘 달아오른다.
“에구머니! 또 불이 났어!”
주방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하녀들이 일제히 주방으로 뛰어가 익숙한 듯 물을 퍼 날랐다.
베일리 가문이고 페이시아 가문이고 불난리며 물난리며 이제 익숙한 듯 굴었다.
‘내 탓이잖아.’
난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왜 감정에 변화가 생기셨어요? 아침을 먹었을 뿐인데.”
카이네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입가에 환한 미소를 달고 있었다.
“아냐. 그런 거.”
애써 카이네스의 질문을 모른 척하며 일 층 복도를 지나 중앙 홀을 통해 이 층으로 올라갈 때였다.
중앙 홀에 새로 단 샹들리에는 화려한 불빛을 뿜어 댔다.
계단에 한 걸음 올라섰을 때였다.
“혹시 저 때문인가요?”
부축하는 탓에 카이네스와의 거리가 가까웠다. 계단에 먼저 올라 그와 시선도 비슷했다.
카이네스가 물음에 답이라도 원하는 듯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마를 부딪치고 떨어진 카이네스가 왼손을 들어서 내 앞머리를 정돈했다.
눈을 가렸던 앞머리가 정돈되며 카이네스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사랑스러움을 가득 담은 카이네스의 눈빛이 곧 가을을 맞이하는 것도 잊고 봄날처럼 따스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환했던 샹들리에 불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중앙 홀에 새로 걸린 거대한 미술품도, 그 옆을 장식한 고딕한 장식품도.
그냥 카이네스가 눈에 들어왔다.
두근두근 낮게 뛰는 심장이 불편해 고개를 떨구자 다시 앞머리가 눈을 가렸다.
차라리 다행이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면 카이네스가 무슨 말을 할지 몰랐으니까
‘내, 내가 왜 이러지?’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카이네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아쉬운데요.”
카이네스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며 거리를 좁혔다. 대낮부터 훤히 불빛이 켜진 저택에서 달라붙어 있으니 카이네스의 표정 하나하나가 숨김없이 눈에 들어왔다.
수줍은 눈빛, 간절한 표정, 달뜬 숨결, 어정쩡하게 배회하는 왼손도.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당황한 에스타가 카이네스의 어깨를 팍 밀쳐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