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호, 혼자 올라갈 수 있지?”
에스타는 황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얼굴을 계속 마주하고 있다간 이상한 비명이 입을 비집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윽.”
그런데 등 뒤에서 카이네스의 나직한 신음이 들렸다.
파, 팔!!
잊고 있던 카이네스의 팔이 떠오르자 에스타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돌아갔다.
카이네스가 오른팔을 움켜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 많이 아파?!”
도로 카이네스에게 뛰어가 어깨를 붙잡았다.
그 순간 카이네스가 확 에스타를 잡아당겼다.
“잡았다.”
카이네스 몸 위로 떨어졌다는 걸 인지하기도 전이었다. 품 안에 에스타를 안고 예쁘다는 듯 웃는 카이네스는 정말이지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났다.
반짝반짝, 밤하늘에 뜬 별처럼 영롱했다.
‘내가 가진 보물 중 가장 빛나는 걸 보여달라면 카이네스를 가져가야지.’
이 순간에도 주접 섞인 멘트가 튀어나오려 해서 에스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가 누님은 도망갈 거라 그랬잖아요.”
카이네스는 왼팔로 다리를 받쳐 안고는 입꼬리를 올려 유려하게 웃었다.
‘영약해서는.’
자신을 붙잡자고 아픈 척까지 한 걸 알아차린 에스타의 얼굴이 뒤늦게 달아올랐다.
손으로 가려도 역부족이었다. 자신을 보며 키득거리는 카이네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에스타는 반쯤 포기한 채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카이네스가 살짝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그게 오히려 자극적으로는 느껴졌다.
‘변태가 되어 가는 기분이야.’
에스타는 반사적으로 카이네스이 옷깃을 꽉 붙잡았다. 카이네스가 에스타를 안은 채 이 층으로 올랐다.
마주치는 하녀마다 ‘헉’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카이네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쳤다. 이번에도 창피함은 에스타의 몫이었다.
카이네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더 파묻었다.
“옷 갈아입는 거 도와 달라니까요.”
카이네스는 에스타의 등 뒤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등이 적당히 파인 드레스를 입은 탓에 카이네스의 손길을 적나라하게 느끼고 말았다.
“왜 느, 능구렁이가 된 거야!”
에스타가 버럭 소리치자 카이네스는 걸음을 멈췄다.
“기대세요. 또 넘어지려고요?”
“네가 내려 주면 되잖아.”
“그건 싫어요. 안기세요. 제 남은 한쪽 팔도 부러뜨릴 게 아니라면.”
카이네스가 가늘어진 눈으로 은근히 채근했다. 농담이라는 걸 알지만 슬쩍 불안해진 에스타는 가만히 품에 안겼다.
“착하다.”
“……나 따라 하는 거지.”
“알아차렸습니까? 누님이 늘 이러셨잖아요. 머리도 쓰다듬어 주셨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제가 팔이 성하질 않아서 그건 다음에 해드리겠습니다.”
카이네스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왜 그렇게 기분 좋게 웃는 거야…. 진짜 민망해 죽겠네.’
방으로 들어가면 이 민망한 상황도 끝인 줄 알았는데, 카이네스가 믿지 못할 소리를 했다.
“하녀들의 수발을 받지 않는다고?”
“손길이 불편해서요. 제 몸에 다른 사람의 손이 닿는다는 게 몸서리치게 싫은걸요.”
에스타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그렇게나 닿는 걸 싫어한다니 전혀 알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소설 속에서도 카이네스는 하녀들과 시종의 수발을 받지 않았고, 혼자 모든 걸 해결했다.
어릴 때만 해도 시종이 따라다니는 걸 본 적 없었지.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나?’
에스타가 눈을 깜빡이며 카이네스를 올려다보자, 카이네스는 황당한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겁박이라도 했습니까? 갑자기 손은 왜 드세요?”
카이네스가 에스타의 이마를 톡 두드렸다.
“그리고 누가 봐도 누님은 예외일 거 같지 않습니까? 언제나 느끼지만 누님은 정말 눈치가 없어요.”
그가 특유의 하찮은 눈으로 에스타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봤지만, 그 눈빛의 의미를 알기에 에스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그 눈이네. 하찮은 걸 봤다는 듯한 그 눈. 오랜만이다.”
“하찮은 걸 본 눈이요?”
카이네스가 픽 웃으며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이건 귀여운 걸 본 눈인데요.”
“…응?”
“귀엽잖아요. 온통 노란 게 병아리 같아요.”
“병아리라니….”
에스타의 볼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정말이지 창피함을 하나도 모르는 듯했다.
카이네스는 며칠 사이 사람이라도 바뀐 듯 애정 공세에 힘을 쏟았다.
에스타를 유혹이라도 할 작정인 사람처럼.
“이제 저보다 몸도 작아져서 정말 병아리 같은걸요.”
카이네스가 손가락으로 에스타의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이대로 가다간 카이네스에게 놀아날 것 같아 에스타는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내가 미모에 약한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연약할 줄이야.’
카이네스 미소 한꺼번에 마음이 우수수 나가 떨어진다.
“어릴 때는 분명 하찮다는 의미 맞았잖아?”
“그때부터 누님을 좋아했나 봐요. 그런 눈이 자연히 지어진 걸 보면.”
카이네스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에스타와 눈을 맞췄다. 그가 손에 들린 에스타의 머리카락에 자연스레 입을 맞춘 뒤 숨을 들이켰다.
“누님의 향이 나요.”
“너… 너…!”
카이네스는 에스타의 말문을 막는 데 재주가 탁월한 듯했다.
당황한 에스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버버거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 옷이나 입어!”
“벗는 게 먼저 아닐까요?”
“그…것도 도와줘야 하니?”
에스타가 삐걱거리는 고개를 겨우 돌리며 물었다.
나, 남주의 몸이라니! 당황스러운 게 당연했다.
벗은 건 본 적이 없는데…?
“네.”
당황한 에스타에게 종지부라도 찍듯 카이네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몸을 맡긴다는 듯 침대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이, 이게 맞아?’
장소가 장소인지라, 꼭 결혼 첫날밤을 보내는 신혼부부처럼 보였다.
에스타는 자신이 착각하는 것이라 되뇌었지만, 어딘가 요염하게 구는 카이네스, 게다가 침대 위 내 손길에 의해 점점 상의가 사라지는 카이네스 때문에 더 제정신이 아니었다.
부들부들.
손이 떨려 단추가 잘 잡히지 않았다. 이미 반쯤 열렸지만, 아래로 갈수록 난감해졌다.
열린 셔츠 사이로 단단한 카이네스의 가슴팍이 드러났다.
헐벗은 것보다 중요 부위만 가린 게 너무 야해 보였다.
“그렇게 손을 떠시면 어떡해요.”
카이네스가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여전히 감고 있으면서도 다 아는 듯 태연했다.
정작 태연하지 못한 것은 에스타였다. 옷을 벗기는 것은 자신인데 꼭 기분은 스스로가 헐벗은 것처럼 창피했다.
“가, 가만히 있어. 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네, 누님.”
누나 노릇을 하고 싶었는데 손이 따라주지를 않았다.
병에 걸린 노인처럼 파르르 떨리는 손 때문에 결국에는 반쯤 옷을 뜯어내 버렸다.
“다, 다 했다!”
환희에 찬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때 쪽, 카이네스가 동그란 에스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너… 너…!”
“귀여워서요. 누님도 하셔도 돼요.”
“하기는 뭘 해!”
에스타가 카이네스의 어깨를 밀쳤다. 더 이상 있었다가는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나보고 뽀뽀를 하라고? 누, 누구 좋으라고!’
여전히 기분 좋게 웃고 있는 카이네스 때문에 에스타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갑자기 왜 브레이크가 고장 난 거냐고. 고백을 승낙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연인들이 할 법할 것들을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카이네스와 엮이면 자신이 세운 계획들이 전부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
“알아서 갈아입어! 난 몰라!”
에스타는 홧홧해진 볼을 감싸고 방을 도망쳤다. 우리가 만난 첫해에 마력을 치료해 준 카이네스가 도망친 것처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람!
* * *
루이셀이 아카데미 입학 서류을 작성했다. 공작의 인장을 받아 황실에 제출하면 모든 절차는 끝이었다. 이제 곧 아카데미가 개학을 맞이했다.
뒤늦게 들어가는 만큼 카이네스는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다. 밀린 아카데미 일정만큼 스스로 독학해야 했으니까.
입학 시기보다 늦게 들어가는 것도 처음이었고, 페이시아가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것도 현 황제 시절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별 취급이 확실했기에 카이네스가 입학하고 나서 당분간은 홍역을 치르게 될 터였다.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무시를 받을 것이다.
루이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카이네스를 찾아왔다. 그런데 아카데미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기도 전, 눈에 먼저 띈 것이 있었다.
“옷은 왜 입다 마셨습니까?”
가슴팍을 훤히 드러낸 카이네스가 태연히 의자에 앉아서는 루이셀이 미리 전달한 아카데미 1학년 교과 과정을 읽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에스타가 도와주다가 도망쳐 버렸다. 그걸 시위라도 하듯 옷을 입지 않았다. 불쌍해 보이면 다시 채워 주겠지 싶어서.
카이네스는 곧 찾아올 에스타를 차분하게 기다렸다.
“도와드려요?”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에스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이 닿는 것도 싫지만, 다른 남자의 손이 닿는 건 더욱 싫었다.
카이네스는 루이셀이 곁으로 다가오자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아카데미 입학에 필요한 행정 절차는 끝났습니다. 황실에 제출하면 끝입니다. 제가 할까요?”
“아니, 내가 하지.”
아직 루안과 제대로 된 단판을 벌이지 못했다. 사람까지 고용해 날 떼어놓고 에스타를 만나려 했다.
‘마력을 알아차린 건가?’
그렇다면 골치 아팠다. 루안은 어릴 때부터 마법에 관심이 많았지만, 이유는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다.
페이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황실에서 페이시아를 견제하는 건 일상이었지만, 루안은 조금 더 계획적으로 움직여 왔다.
전 황제는 페이시아를 아카데미 입학을 금지하고, 귀족 사회에서 격리하려 했으며, 현 황제는 폐쇄적인 페이시아 가문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그 탓에 페이시아는 ‘폐쇄적인’ 혹은 ‘위험한’이라는 취급받으며 귀족 사회의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그 와중에 페이시아가 아카데미에 입학했단 소식은 황실과 귀족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