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2/83)

61화

“아카데미 입학이라….”

“이제는 취소도 못 합니다. 무려 황명이라고요.”

“취소할 생각도 없어.”

앞으로의 페이시아를 생각한다면 황실과의 긴밀한 관계는 유지해야 했다.

더 이상 폐쇄적으로 변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특히 ‘페이시아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는 비밀스러운 힘’을 들킨다면, 역대 페이시아 공작이 쌓아 온 재산이며 명예가 위험해진다.

아직 아스텔에는 마법이 불미스러운 취급을 받으니 마녀사냥을 당할 수도 있다.

“왜요? 요즘 작은 마님과 다시 사이가 좋아지신 거 아닙니까?”

화해를 했다는 말도 정확하지 않았다. 싸움이라기엔 카이네스가 일방적인 분노를 쏟아낸 것이니까.

계약이라 운운하고 이행하지 않은 것 역시 카이네스였다.

“에스타는 착하니까.”

순수한 마음으로 불쌍한 나를 받아주고 있는 것뿐.

“작은 마님께서 착하신 거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최근 며칠은 제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었다. 더없이 따듯하고 평생 이어지기를 바랄 만큼.

하지만 자신은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곧 귀족이 되어 가문을 이끌어야 하는데 혼자만 좋자고 속 편하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이네스는 속으로 아쉬운 마음을 삼켰다.

“누님은 늘 그랬어. 날 보고 볼을 붉히고, 가끔 음흉한 눈으로 쳐다보고. 예전과 비교하면 그 횟수가 늘어난 것뿐이지 달라진 건 없지.”

말로 뱉고 나니 카이네스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여전히 우리 사이에 달라진 건 없다는 생각에 입 안이 썼다.

“그건 좀 이상한데요. 전 필히 작은 마님께서 도련님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했거든요.”

루이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증거를 찾는 일은 아직 하고 있었던 거야?”

“물론입니다.”

“이상한 데 힘 빼지 마. 의미 없으니까.”

카이네스는 루이셀이 건넨 서류에 아버지의 인장을 찍은 뒤 봉투에 넣었다.

“빠른 시일 내에 황실으로 찾아가야겠어.”

“준비하겠습니다.”

루이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 *

“날 좋아한다고? 카이네스가?”

상상만으로 에스타의 볼이 홧홧해졌다. 원작을 늘 유념하고 다녀서인지 카이네스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 생각지 않았다.

그냥 좀 다정한 사람인 줄 알았지.

에스타 역시 카이네스를 남자로 본 적 없었다. 너무 어릴 때 만났고, 너무 당연하게도 다른 여자의 남자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카이네스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다.

‘진짜 좋아하는 거 같았어.’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굳이 거짓말을 왜 하겠어?

양 볼을 부여잡고 소파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저를 꼬시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구는 카이네스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카이네스를 보면 심장이 뛰었지만 이게 카이네스를 좋아해서인지, 아니면 미남을 봐서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왜 그러고 계세요?”

때마침 방으로 들어온 엘리가 의아한 얼굴로 에스타에게 물었다.

“아니, 고민이 있어서.”

“무슨 고민이신데요?”

엘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털어놓아도 될까? 카이네스가 날 좋아하게 됐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이 믿어나 줄까.

에스타가 미친 듯이 쫓아다녔었는데, 이제 상황이 반대라니!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에스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카이네스가 나를 좋아한대.”

“…그거를 이제 아셨어요?”

엘리가 황당한 웃음을 터트렸다.

“저택에서도 난리예요. 작은 주인님이 사랑에 빠져 봄바람이 분다고요.”

엘리가 재미난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입술을 가린 채 키득거렸다.

“팔 부러진 것도 잊고 히죽거리며 웃으셨다던데요?”

“……으으….”

창피함에 에스타의 볼이 달아올랐다. 그럼 정말 나만 몰랐단 말이야?

“마님께서는 눈치가 없으시네요.”

“그만 놀려.”

“좋은 일 아닌가요? 부부인데 마음까지 통하시다니! 이건 바로 운명이에요!”

“무슨 운명까지야….”

에스타가 입술을 삐죽였다. 카이네스의 운명은 따로 있었으니까.

하지만 엘리의 운명 타령은 계속되었다.

“옆집에서 지내는 귀족이 흔한 것도 아니잖아요. 담장 하나만 두고 자라셨고, 태중 약혼으로 엮이시더니 서로가 첫사랑이자 남편, 아내가 되었죠! 어느 것 하나 흔하지 않다니까요!”

“그렇게 들으니 꼭 세기의 사랑이라도 된 것 같네.”

“제 말이 맞으니 믿으세요!”

본인이 더 들뜬 엘리는 손으로 심장을 짚으며 당당히 외쳤다.

이제 보니 엘리는 사랑 얘기를 굉장히 좋아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즐거워하는 게 큐피드라도 된 것 같았다.

“제가 그동안 작은 마님의 연애 편지를 배달했던 시간이 얼마입니까! 사랑을 그만두셨다고 했을 때 사실 남몰래 실망도 많이 했는데 이렇게 이뤄지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사실 내가 카이네스를 사랑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심각하게 걱정하자 엘리가 아차 놀라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결혼하셨잖아요. 마음이 아예 없는데 청혼하신 거였어요?”

그거야 카이네스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서….

“작은 마님, 사실 귀족 부부 사이에 사랑이 꼭 필요한 건 아니에요.”

“알아. 귀족 간의 결혼에는 사랑보다 가문 간의 화합으로 얻는 이득이 우선시 된다는 건.”

엘리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에스타의 곁에 앉았다.

엘리는 그녀와 비슷한 또래로 어릴 때부터 근무한 하녀치고 나이가 어렸다.

히지만 어릴 때부터 봐서인지, 아니면 에스타의 유모 역할까지 해서인지 엘리의 옆이면 그녀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엘리, 난 잘 모르겠어.”

아직 카이네스가 헤른을 만나기 전이라 나를 향해 품은 감정이 사랑이라 착각한 거라면?

다른 영애들과 별다른 교류가 없는 카이네스이니 충분히 착각할 만하다고 여겼다.

원작의 카이네스와 헤른의 사랑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걱정이 앞섰다.

“작은 마님, 상대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 사랑을 꼭 받아 줄 의무가 있는 건 아니에요. 잘 아시잖아요.”

에스타는 엘리가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단 알 알아챘다. 에스타가 쫓아다닐 때, 카이네스는 받아 주지 않았었으니까.

“이참에 그때 받은 수모 그냥 확 다 풀어 버려요!”

“하하, 정말?”

에스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이죠! 이제 생각해 보니 열받잖아요!”

엘리는 에스타를 대신해 열을 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작은 마님께서 작은 주인님의 마음을 받아 주실 생각이 안 드시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세요.”

“그래도 될까?”

“아니면 작은 마님께서도 또다시 사랑에 빠지실지도 모르고요.”

고작해야 몇 살 더 많은 엘리였지만 에스타를 위할 때면 어른스러워졌다.

“무슨 선택을 하시든 전 작은 마님의 편인 거 알죠?”

“엘리, 고마워.”

에스타는 어린애처럼 엘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카이네스를 향한 고민이 조금 풀어졌다.

‘그래. 조금만 답변을 미루자. 카이네스가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헤른을 만나게 될 거야.’

둘이 인연이라면 아카데미 안에서 사랑을 꽃피우겠지.

그러면 난 예정대로 그가 20살 성인이 되는 해에 이혼하면 된다.

정리가 끝난 에스타의 머리가 개운해졌다.

* * *

시종이 찾아와 카이네스가 나를 찾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듣고 곧장 카이네스를 만나러 왔는데.

“모, 목욕을 해야겠다고?”

“아무래도 옷만 갈아입는 건 찝찝해서요.”

카이네스는 아까보다 더 풀어진 차림으로 날 맞이했다.

카이네스의 차림은 벗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람!’

카이네스 꼴을 보자마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나는 다시 한번 소설 키워드를 실감했다.

부러진 팔에 감은 붕대 덕분에 겨우 자제했지만, 사실 당장이고 카이네스의 등짝을 내리치고 싶었다.

“내가 널 몇 살 때부터 봤는데….”

이제는 다 컸다지만, 난 전생에 현생까지 더해져 카이네스를 건드리기에는 죄책감이 너무 커진 상태였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이마를 짚었다.

‘차라리 갈아입지 않는 게 나았던 거 같은데.’

설마 종일 저 차림으로 지낸 건 아니겠지? 카이네스는 부끄러움 따윈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내게 걸어왔다.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목욕이라니. 이 상태로 계속 있다간 코피를 흘릴 게 분명했다.

내가 조금만 인내심이 적았더라도 당장 달려들었을지도.

그만큼 카이네스의 모습은 위험했다.

“그, 조, 조금 참는 건 어때? 아니면 시종의 수발을 받든가.”

“싫습니다. 차라리 팔을 다시 부수고 말지.”

“팔을 부수는 게 쉬운 일인 것처럼 말하지 마.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카이네스가 작은 미소를 흘렸다.

“익숙한걸요. 아시잖아요.”

“이제는 아니야. 내가 그 꼴 보기 싫어서 너랑 결혼했다는 걸 잊은 건 아니지?”

“그럼요. 잘 알죠.”

위태로웠던 모습은 어디 가고 책상 끝에 걸터앉아서 날 쳐다봤다.

늘 운동하고 단련하는 탓에 그의 벌어진 어깨며 커진 덩치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어린 모습을 떠올리면 아예 다른 사람 같았다.

“누님, 정말 저를 좋아하지 않나요?”

“……아마도.”

확신이 생기진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에 심장이 떨리긴 했지만, 잘생긴 사람에게 고백받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으니까.

카이네스의 희미하게 웃던 입꼬리가 굳었다. 무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카이네스가 화가 났다는 걸.

“그렇다면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어느 사람이 안쓰러운 마음에 결혼까지 결정하나요?”

확실히 화가 났다. 지금 카이네스는 내게 화를 내고 있어!

주춤거리며 물러나다가 등 뒤에 느껴지는 소파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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