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누님, 누님 거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 이름을 부르는지.
이상하게도 그게 기폭제라도 된 것처럼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제 알아서 씻고 나와!”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도망치려던 찰나였다.
카이네스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아당겼다.
풍덩, 욕조 위로 미끄러져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물에 빠져 드레스가 젖어 가는 순간, 내가 물에 빠졌다는 것보다 내 몸을 감싼 카이네스의 손에 더욱 놀랐다.
“푸우!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욕조 끝자락을 붙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카이네스가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며 웃었다.
“누님, 물 온도는 어떻습니까? 많이 덥습니까?”
물에 젖은 잘생긴 미남이라니.
하마터면 용서해 줄 뻔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갑자기 날 왜 당긴 거야!”
카이네스 못지않게 다 젖어 버린 난 미역처럼 젖어 달라붙기 시작한 머리를 겨우겨우 한쪽으로 넘겼다.
욕조 밖으로 나가려 하자 카이네스가 다시 날 물속으로 잡아당겼다.
“같이 목욕하고 싶어서요. 우리 부부잖아요.”
이… 이런 말에 넘어가면 안 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유혹하는 카이네스라니.
첫 만남을 떠올리면 이건 예상치 못한 발전이었다.
“너 자꾸 부부라고 걸고 넘어지는데 엄밀히 말하면 우리 정식 부부 아니거든?”
“그걸 누가 아는데요? 계약서라도 쓰셨습니까? 우리가 계약 부부라고?”
…응?
카이네스가 날 안은 손에 힘을 줬다. 등에 닿은 카이네스의 넓은 등에서 한기가 전해졌다.
따뜻한 물 속에 들어와 있어도 카이네스는 여전히 차가웠다.
쿵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는 심장도 숨겨지지 않았다.
빨라진 심박 수 만큼이나 흐트러진 호흡으로 귓가에 속삭였다.
“구두 계약은 법적으로 효력이 없습니다. 알고 계신 거 아니었나요.”
불안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뛰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지 카이네스가 입술을 꾹 깨물고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너, 너 나 놀리는 거지!”
뒤늦게 사실을 알아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아서 씻든지 말든지!”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아 카이네스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얼떨결에 딱밤을 맞은 카이네스가 이마를 붙잡고 날 올려다봤다.
눈망울이 잔뜩 커져서는 ‘날 때렸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 *
저택에서는 오랜만의 만찬회를 준비하며 활기가 돌았다. 오랫동안 쓰지 못했던 파티용 접시도 닦았고, 와인 잔을 헹궈 말려 두었다.
늘 비워져 있어 휑했던 홀도 불을 밝혔다. 창고에서 탁자를 꺼내와 먼지를 닦고 그 위를 식탁보와 생화로 장식했다.
그 일을 모두 주관한 것은 에스타였다.
“꽃은 어떤 것으로 준비할까요, 작은 마님?”
“…무슨 종류가 있죠?”
아무것도 모르지만 에스타는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파티 준비는 안주인의 소관이었다.
공작 부인이 비어 있는 지금은 에스타의 일이었다. 에스타의 일이 늘어난 이유엔 카이네스의 몫도 있었다.
“누님의 뜻대로 하세요.”
무슨 말을 물어도 카이네스는 똑같은 말을 했다.
파티 날을 정하는 중요한 대화인데도 카이네스는 같은 말을 뱉었다.
“날이 중요한가요? 누님이 원하는 날로 하면 될 것 같은데요.”
“날이 안 중요하면 뭐가 중요해? 파티 날에 따라사 오는 사람이 달라질 텐데.”
“아닐걸요.”
카이네스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이제는 둘의 다과 시간에 맞춰 설탕과 우유를 듬뿍 넣은 단 커피와 디저트 케이크가 나왔다.
다디달아 보이는 생크림 위에 딸기를 얹은 케이크였다.
카이네스가 한 조각 썰어 에스타의 앞에 놓아 주었다.
“페이시아가 만찬회를 한다는 건 대대적인 일이에요. 흔치 않은 일이라서 모두가 참석하고 싶어 할걸요.”
카이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붕대를 대어 지지하고 있는 제 팔을 들어 보였다.
“최근 재미난 일도 하나 있었고요.”
“설마 네 팔이 부러진 걸 얘기하는 거야?”
“네.”
카이네스는 가볍게 대꾸하고는 생크림 케이크를 포크로 떠 입에 넣었다.
“그게 왜 재밌는 일이야?”
에스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재밌죠. 뭐 하나 궁금해도 알기 어렵던 페이시아 공작가에서 유일한 후계의 팔이 부러졌다는데.”
“…그거 네 얘기거든. 남 일처럼 얘기하지 말아 줄래?”
“네, 그럴게요.”
“말만 잘하지.”
에스타가 입술을 삐죽이며 빈정거렸지만, 카이네스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 누님이 원하시는 대로, 편하신 대로 하셔도 상관없어요. 원하신다면 만찬회 정도는 없던 일로 하셔도 돼요.”
“안 돼. 초대 리스트도 다 정했단 말이야.”
“흐음, 아쉽네요.”
카이네스가 옅게 숨을 내쉬며 탁자에 턱을 괴었다.
“뭐가 아쉬워?”
“누님과 둘만 보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요.”
카이네스의 직설적인 말에 에스타의 볼이 달아올랐다.
“왜 너는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
“누님한테 옮았나 보죠.”
“…….”
“하실 말씀이 없으시죠?”
에스타의 머릿속으로 제가 어렸을 적부터 뱉었던 어록들이 스쳐 지나갔다.
잘생겼다, 예쁘다, 신이 빚었다, 너무 눈부셔 샹들리에가 필요 없다, 확신의 남주상이다. 등등….
에스타는 말도 못 하고 입만 뻥긋이다가 도로 닫았다. 본인이 생각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건 주접이었을 뿐이야.”
“네, 저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세요.”
‘아닌 걸 아는데 어떻게 그래.’
주접은커녕 아닌 말은 입 밖으로 뻥긋거리지도 않는 사람이 카이네스였다.
그걸 잘 아는 에스타는 카이네스가 자꾸만 자신을 예쁘다, 귀엽다 하는데 몸서리치게 어색했다.
“조금만 참으시면 돼요.”
“응? 뭘?”
에스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있으면 전 아카데미에 가잖아요. 그러면 볼 일도 줄어들 테니 그런 말 들을 일도 없을 거예요.”
카이네스가 손을 뻗어 에스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러니 당분간은 못 이기는 척 제 행동 받아주세요. 이것도 금방 지나갈 테니까.”
“…응. 그럴게.”
옅게 웃으며 평소처럼 부드럽게 말하는 카이네스에게 대답하기가 몹시 찝찝했다.
분명 어릴 적부터 봐 온 카이네스였고, 평소와 같은 모습인데도 묘하게 낯설었다.
그 이유가 눈동자 때문인 것 같았다. 마음을 감춘 듯 묘하게 정적인 눈이 연기라도 하듯 휘어졌다.
에스타는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한참이나 다시 생각해 봤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눈빛의 의미를 알아채기에는 에스타의 마음의 깊이가 너무 얕았다.
‘지쳐서 금방이고 떠날 것 같은 눈빛이었어.’
하지만 페이시아의 주인이 어디를 간단 말인가?
고민의 답은 나오지 않았고, 만찬회의 날이 밝았다.
* * *
만찬회를 열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이미 화려하게 꾸며 놓은 홀을 확인하기 위해 카이네스를 옆구리에 끼고서 에스타는 홀을 누볐다.
홀 장식 OK.
현악 사중주단 OK.
음식 OK.
커튼도 새것으로 교체했고, 침수됐던 부분은 더욱 신경 써 모든 공사를 끝마쳤다. 마지막으로 샹들리에의 촛대를 갈고 불을 켰다.
샹들리에가 빛을 밝히자 오랫동안 닫혀 있던 페이시아의 홀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완벽해!’
에스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에스타가 등을 돌리자 카이네스가 에스타를 향해 박수를 쳤다.
“수고 많으셨어요, 누님. 어렸을 적부터 수많은 파티 홀을 봤지만, 이렇게 완벽한 홀은 처음입니다.”
카이네스가 칭찬을 하자 에스타가 배시시 부끄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물론이죠. 누님께서 공들인 티가 납니다.”
카이네스의 시선이 파티 홀을 누볐다.
“고풍스러운 내부를 살려 엔틱한 가구를 배치한 것도 좋은 선택인 것 같아요. 장식용 생화 전부 하나같이 구하기 힘든 것들 아닙니까.”
자신의 노고를 알아봐 준 것에 놀라 에스타가 눈을 깜빡였다.
카이네스가 언급한 것들은 하나같이 티 나지 않는 작은 것들이었다. 그만큼 에스타가 세세하게 파티를 준비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수고하셨어요, 누님.”
카이네스가 그 노력을 알아 주자 에스타는 마음이 뿌듯해져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들 하는 건데, 뭐.”
에스타가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하는 말이 전부 가식적인 칭찬이라 생각하는 건지, 에스타는 자신의 행동을 부정했다.
카이네스가 주변에 상주하는 사용인들을 눈으로 훑었다.
눈치 빠른 사용인들이 카이네스의 눈빛의 뜻을 알아차리고 참았던 속마음을 빠르게 뱉었다.
“아녀요, 작은 마님! 정말 이렇게 완벽한 파티는 또 없을 거예요!”
“주방까지 오셔서 손님 식사 하나하나 챙기시는 걸 보고 얼마나 감명받았는데요.”
“맞아요, 그뿐만이에요? 홀도 작은 마님의 세심함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멋지게 변하지 못했을 거예요.”
다들 하나같이 나서사 칭찬해 주니 에스타의 얼굴이 더는 감당 못 할 정도로 붉어졌다. 어느새 홀의 온기가 후끈 달아올라 버렸다.
“어라? 홀이 좀 더운 것 같네요. 아직도 여름인가 봐요.”
한 시종이 영문도 모른 채 옷을 펄럭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에스타는 황급히 마력을 갈무리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평정심, 평정심….’
파티 준비는 끝났다. 이대로라면 완벽한 만찬회로 끝날 것이다.
딱 하나, 자신과 카이네스의 마력만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잘 관리해야지. 평정심을 잘 유지해야 해. 아니면 카이네스 옆에서 벗어나지 말든가.’
에스타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다짐했다. 카이네스의 곁에서 떨어지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