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5/83)

64화

사교계의 동태를 완벽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페이시아에 관해 무슨 말이 떠돌고 있을지 몰랐다. 그랬기에 에스타는 더욱 공을 들여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억지로 한 결혼에 더는 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제 우리 준비만 다 하면 돼.”

에스타가 뒤돌아보자 집에서만 입는 실내복 차림의 카이네스가 보였다.

소맷단에 가볍게 셔링이 들어간 흰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지만, 홀에 있는 그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아마 저 차림 그대로 황성에 나간다 해도 그 누구보다 아름다울 터였다.

“이야…. 넌 이대로 나가도 되겠다. 애초에 얼굴이 완성형이야.”

에스타가 황망한 눈으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누님. 정말 그러실 겁니까?”

카이네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에스타를 나무랐다.

“아, 미안. 너 칭찬하는 게 버릇이라.”

“그렇습니까?”

더 나무랄 줄 알았던 카이네스가 돌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누님도 못지않습니다. 누님은 자다 일어난 모습도 제 마음에 쏙 듭니다.”

“…….”

설마 되받아치는 건가?

카이네스는 들으란 듯이 과장되게 말하며 방긋방긋하게 웃었다. 누가 봐도 놀리는 모습에 에스타가 바짝 굳어 버렸다.

“그것뿐인 줄 아십니까? 만찬회 때 쓸 촛불은 아껴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홀에 누님이 등장하면 촛불 따위 필요할 리가 없으니까요.”

카이네스의 말도 안 되는 칭찬은 멈추지 않았다. 에스타는 양손으로 드레스를 움켜쥔 채 당장이고 도망칠 듯 뒷걸음질 치다 카이네스에게 붙잡혔다.

“또 도망가시려고요? 티 납니다. 그 모습까지도 귀엽거든요.”

“그, 그만!! 제발 그만해!”

에스타가 소리 지르자 샹들리에에 켜진 촛불이 크기를 키우며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카이네스가 얇아진 눈으로 불빛을 보다 에스타를 놓아주었다.

“조심하셔야죠. 누님은 조금이라도 평정을 잃으면 큰일이겠어요.”

누가 할 소리를…!

저택을 꽁꽁 얼려 버릴 만큼 평정심을 잃었던 사람이 하는 말이라 더 뻔뻔하게 느껴졌다.

“또 그러실 거예요?”

카이네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말 알았으니까 그만해. 정말 내가 미안해! 더 조심하면 되잖아, 조심하면!”

에스타는 괜히 주름진 치맛자락에 분풀이하며 사과했다.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볼이 화끈거릴 정도로 얼얼했다. 말실수 좀 했다고 얼마나 더 놀려먹을 심산인지, 카이네스는 주접의 끝판왕이라도 된 것처럼 쏘아붙였다.

곁에 있던 하녀들까지 볼을 붉히며 수군거리며 꺅꺅 즐거워하고 있었다.

에스타는 이마를 짚고는 검지를 카이네스에게 내밀었다.

“준비하고 나중에 봐!”

꼭 도전장이라도 던지는 모양새라 카이네스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준비를 핑계로 엘리를 데리고 사라진 에스타는 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홧홧해진 볼을 식히느라 고생했다.

* * *

한껏 화려하게 치장한 머리며 며칠을 공들여 주문 제작한 드레스며 곱게 한 화장까지.

에스타는 만찬회의 주최자답게 한껏 화려해진 채 거울 앞에 섰다.

늘 카이네스의 옷차림이 귀족치고 가볍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에스타도 마찬가지였다. 속옷이나 다름없는 네글리제 차림도 에스타의 눈에는 일반적인 원피스였으니까.

그 원피스 위에 가벼운 드레스를 한 겹 더 입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파티장에 입고 가는 격식 있는 드레스는 혼자 입을 수 없는 수준으로 겹겹이 걸쳐야 했고, 그 속에는 몸을 조이는 코르셋을 입었다.

아래쪽으로 갈수록 풍성해지는 주름 사이로 레이스를 덧대 움직이면 꼭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페이시아를 상징하는 푸른 드레스에 갖은 진주 장식을 더하자 꼭 바닷속 인어가 된 것 같았다.

게다가 처음으로 머리를 올려 묶은 날이었다.

아스텔 제국에서 기혼의 여성은 파티장에서 머리를 올려 결혼했음을 알려야 했다. 에스타는 결혼하고 처음 참석하는 파티였기에 더욱 머리가 낯설었다.

“이 장식이 좋을까요? 아니면 푸른 보석이 달린 거로 할까요?”

엘리가 보석함을 들고 와 이것저것을 대 보며 물었다.

“푸른 보석이 달린 거로.”

며칠 전 카이네스가 선물한 머리 장식이었다. 다소 심플해서 평소에 착용하기 좋았지만, 드레스가 워낙 화려해서 머리 장식까지 과한 걸 착용하면 촌스러워 보일 것 같았다.

엘리가 고심하며 머리 장식을 꽂았다.

에스타는 나름 만족스러운 모습에 거울을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파인 드레스 때문에 목이 허전했다.

“목걸이를 고를까요?”

엘리가 눈치껏 알아차리고 목걸이가 든 보석함을 들고 돌아왔다.

“아.”

하필이면 그 보석함 안에 루안이 준 루비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선물 받고 한 번도 착용하지 않으셨네요.”

황가의 선물을 받으면 꼭 한 번 이상은 착용해야 했다. 그것이 황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오늘 착용하시겠어요?”

엘리가 손에 루비 목걸이를 들어 목에 대어주었다.

전체적으로 푸른 의상에 붉은 목걸이가 유난히 도드라지게 보였다.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다른 파티 때 끼는 게 나을 것 같아. 오늘은 결혼 후 처음 여는 파티니까 더욱 페이시아다웠으면 해.”

“네, 작은 마님의 뜻대로 하셔요.”

엘리가 다른 보석함을 들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저 루비 목걸이를 언제 착용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왠지 루안을 만나면 또 목걸이를 하지 않았다며 한 소리 들을 것 같았다.

책을 읽은 뒤 다시 만나면 할 말이 있다고 했는데.

그 책은 아직 메이어가 번역 중이었기에 에스타는 보지도 못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파티 초대장을 루안에게도 보냈지만, 루안이 영지 사찰 일정 때문에 불참할 것이라 답한 것이다.

‘사실 알고 보낸 거지만.’

이번 파티에 숨겨진 목적이 하나 있었다.

루안의 동생이자 제국의 제2 후계자, 로시나 그란 아스텔을 카이네스의 편으로 만드는 것.

원작이 언제 시작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첫 장면은 헤른의 부모님이 파산하며 루안이 헤른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나이대를 보아 곧 시작한다는 것만 어림짐작할 뿐이지만.

루안과 헤른이 합법적인 부부라는 것, 루안이 제국의 황제라는 것 때문에 헤른을 구하는 것에 카이네스의 능력 밖의 일들이 많았다.

그때 로시나의 힘이 필요하다.

원작에서 로시나는 그다지 비중이 크지 않았지만 똑똑하고 성심이 고운 사람이었다.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고 꼭 도와줘야만 했다.

훗날 루안에게 붙잡힌 헤른을 도주시키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도 로시나였다.

다만 로시나도 카이네스를 그다지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오늘 최대한 호감도를 쌓아야 했다.

현재 루안보다 귀족들 사이에 입지가 큰 사람이 로시나였다. 로시나는 현 황후의 핏줄이었기에 귀족파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입지에서도 로시나가 카이네스의 편에 서면 여러모로 좋지.”

페이시아는 훌륭한 귀족 가문이지만, 귀족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입지가 작았고, 다들 기피했다.

인간을 벗어난 힘. 그것에 원초적인 두려움이 있었다.

특히나 최근 아카데미 건을 걸고넘어지는 귀족들이 많았다.

부정 입학이라는 귀족들의 반발을 막은 게 황가였다는 점이 오히려 반발을 키웠다.

‘귀족들의 자녀가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아카데미 입학이라면 카이네스가 못 갈 이유도 없는데 말이야.’

페이시아는 인맥을 아예 제하고도 재산, 명예에서 아스텔 제일가는 가문이었다.

그런데 아카데미 입학으로 인맥까지 다진다면, 귀족들은 전부 제 밥그릇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었다.

“흥, 치사한 것들.”

에스타는 일부러 쾅 소리 내어 보석함 뚜껑을 닫았다.

이번 생의 카이네스는 절대 ‘홀로’ 두지 않아야지.

사랑도, 친구도, 가족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카이네스가 피폐 남주가 아닌,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게 목표이니까.

“누님.”

타이밍 좋게 카이네스가 문을 두드렸다.

“준비 끝나셨습니까?”

문을 열자 카이네스는 에스타만큼이나 화려하게 차려입고 서 있었다.

남색에 은색으로 포인트를 준 제복을 입고 손목에는 에스타가 선물한 붉은 커프스를 착용했다.

앞머리를 단정하게 넘겨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 더욱 인상이 깔끔해 보였다. 높은 콧대는 어떻고, 붉은 입술엔 또 어찌나 시선이 가는지.

“더 꾸밀 걸 그랬어. 네가 너무 예뻐서 네 옆에 서면 내가 오징어가 될 거 같아…. 헙.”

에스타는 문들 말을 하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실 하고 싶은 주접이 산처럼 쌓였지만, 더 말했다가는 또 카이네스가 복수할 것 같았다.

‘하지 말랬는데! 이 바보, 멍청이!’

머리를 콱 쥐어박고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카이네스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이네스, 화났어?”

고개를 빼꼼 들자, 카이네스가 어벙한 소리를 뱉었다.

“아.”

그러고는 속수무책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에스타의 눈을 가렸다.

“뭐 하는 거야?”

시야가 가려 답답해진 에스타가 손을 떼어 내려 했지만 카이네스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치사해. 힘으로 하면 난 당연히 못 이기잖아.”

“그게 아니라….”

힘이라는 말에 카이네스가 손을 떼어 냈다. 그제야 잔뜩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카이네스는 에스타를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곁눈질로 힐끗거렸다. 몇 년을 함께했는데 이제 와 낯 간지럽게 구는 카이네스 때문에 덩달아 에스타도 난처해졌다.

“이, 일단 들어와.”

에스타는 황급히 카이네스의 손을 잡아당겼다. 여태 복도에서 난리를 쳤다는 걸 깨닫자 또 사용인들이 보고 난리를 피울 것만 같았다.

문을 닫고 방 안에 둘만 남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카이네스의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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