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8/83)

67화

제국의 춤곡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파트너끼리 춤을 추며 가벼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좀 찰싹 달라붙는 감이 있지만.’

에스타는 자신의 허리에 닿은 카이네스의 손이 신경 쓰였다. 정작 그 손의 주인은 아까 에스타가 잘라먹은 대화에 신경이 팔린 듯했지만.

“이제 말도 돌리시네요.”

“하하….”

에스타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나중에 대화해요. 지금은 누님 말대로 춤춰야죠.”

만찬회의 첫 춤은 주최자와 주최자의 파트너가 추며 파티의 진정한 시작을 알리는 게 흔한 과정이었다.

에스타가 어색하게 카이네스의 손을 맞잡았다.

“춤은 처음인데.”

“어렸을 때 자주 췄었잖아요.”

‘그거야 내가 아니었으니까.’

차마 뱉지 못한 말이 에스타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오랜만이라 어색해서.”

춤을 미리 연습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춰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실수로 발이라도 밟으면 어쩌지?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으, 떨려.”

노래가 시작되기 전, 두 사람은 자세를 잡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스타가 가볍게 어깨를 떨자 카이네스의 시선이 어깨에 닿았다.

“저도 떨려요.”

카이네스가 사람들 앞에 섰던 걸 무서워했던가?

그런 설정은 본 적이 없었기에 에스타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누님이 너무 예뻐서요. 심장이 아프네요.”

“…너!”

카이네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느끼한 소리를 했다.

“그만해. 한 번 더 하면 진짜 정강이 찰 거야.”

정강이 맞는 건 무서웠는지 카이네스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능글맞아져서는.”

에스타가 흥, 콧바람을 내쉬었다. 춤곡을 알리는 사중주단의 연주에 자세를 바르게 했다.

카이네스는 천천히 에스타를 리드해 주며 움직였다. 에스타보다 한참이나 큰 카이네스였지만, 움직임은 딱 맞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에스타는 딱 배운 만큼만 하는 사람이었다. 잘 추지는 못하지만 틀린 부분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 긴장이 풀렸지?’

카이네스의 헛소리만 신경을 쓰느라 에스타는 본인이 긴장한 걸 잊고 있었다.

‘일부러 그랬구나.’

카이네스의 배려였다는 걸 깨닫자 에스타의 마음이 간질거렸다.

자신의 허리를 단단히 받친 손, 맞잡은 손의 크기 차이, 부드럽게 리드하며 무리하지 않게 하는 배려. 잘난 얼굴과 배경까지.

카이네스가 좋은 남자라는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잘나긴 정말 잘났는데.’

피폐한 과거가 아니라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면 친구들도 많았을 거고 다른 사람들도 카이네스를 좋아했겠지.

“뭘 그렇게 보십니까?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카이네스는 계속 춤에 집중하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보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하여튼 눈치 하나는 엄청 빠르다니까.’

“너 춤 엄청 잘 춘다. 따로 연습하지도 않았잖아.”

“어렸을 적에 배웠으니까요.”

보통 다른 사람들은 배워도 잊는다고.

카이네스도 에스타만큼이나 파티에 가지 않았는데 여전히 몸에 밴 듯 움직이는 게 신기했다.

대화하다 보니 에스타가 버벅이며 동작을 틀렸다.

“말하면 안 되겠다. 집중해야겠어.”

에스타가 당황한 듯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춤곡이 이어지는 동안 에스타는 춤에 집중하느라 카이네스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까지도.

두 귀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린 채 대화를 이었다.

“아무래도 이혼하지는 않으시겠죠?”

“표정을 보니 할 이유가 없는 것 같네요.”

먼저 말을 꺼낸 갈색 머리의 귀부인이 아쉽다는 듯 부채로 손바닥을 쳤다.

내심 카이네스 페이시아를 놓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태중 약혼을 깨지 않고 결혼까지 하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본인이 마음에 들어 결혼까지 했는데 이제 어쩌겠어요.”

“아까워서 그러죠. 베일리도 결코 모자란 가문은 아니지만 페이시아에 비하면….”

뒷말하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어떤 의미인지 전부 알아들었다.

페이시아는 유일무이한 가문이었다. 폐쇄적이면서 어느 곳 하나 밀리는 것 없이 완벽했다. 명예면 명예, 재산이면 재산.

황실만큼이나 긴 역사를 자랑하는 것 또한 페이시아의 자랑이었다.

“왜 공작은 자식을 딱 하나만 뒀을까요.”

부인이 아쉬운 눈길로 카이네스를 바라보았다. 마침 카이네스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차가운 붉은 눈에 압도당한 부인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둘러 부채를 펴 입을 가렸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공작가의 피 때문이 아닐까요.”

상대해 주던 다른 부인이 말했다.

“…공작가의 피라뇨?”

“그 소문 모르세요?”

갈색 머리의 귀부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페이시아 공작과 결혼한 사람들은 전부 명이 짧은데, 그 이유가 페이시아의 피 때문이라는 소문이요.”

비밀 얘기라도 하듯 주변을 살핀 귀부인이 제 쪽으로 가까이 오라며 손을 까딱였다. 바짝 붙어 서자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귀에 속삭였다.

“역대 공작 부인들이 전부 단명했잖아요. 폐쇄적인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워낙 말을 아끼니 알 수가 없지만 그들만의 속사정이 있겠죠.”

공작들이 전부 뱀파이어라도 된단 말인가? 부인의 피를 빨아먹고 장수하게?

허무맹랑한 소문이라 생각했지만, 사람같이 않은 외모, 인간을 뛰어넘은 신체 능력, 게다가 사람을 홀리는 듯한 저 눈까지.

왠지 모르게 설득당해 고개를 끄덕였다.

“전대 부인은 건강한 사람이었는데도 아들을 낳자마자 죽었어요. 별달리 아픈 곳도 없던 사람이었는데…. 이번 소공작 부인은 어릴 때부터 몸이 자주 아팠다지요? 어떻게 될지….”

“어머, 어머! 이러지 말고 파우더 룸으로 가서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그러죠.”

첫째 딸을 페이시아에 시집보내지 못해 아쉬움을 보였던 귀부인이 호기심에 이기지 못하고 재촉했다.

귀부인 둘이 자리를 떠난 뒤, 테라스 쪽에 바짝 붙어 서 있던 에런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에스타….”

에런은 들으면 안 될 것을 들은 기분이었다.

쓸모없는 헛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에스타도 알고 있는 건가?’

에런은 제 눈앞에서 카이네스와 춤추고 있는 에스타를 보았다.

그 순간 카이네스와 에스타가 몸을 돌렸고, 카이네스의 등에 가려 에스타가 보이지 않았다.

에런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상하게 마음이 답답해졌다.

* * *

“어디 가세요?”

카이네스가 자리를 떠나려는 에스타를 덥석 붙잡았다.

“나 파우더 룸에 다녀올게.”

에스타는 로시나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카이네스가 도통 떨어지지 않았다.

“저도 같이 가요.”

카이네스가 대화하던 다른 사람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건넸다.

대화하고 있던 상대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냐, 혼자 다녀올 수 있는걸! 게다가 얘기할 게 더 남은 거 아냐?”

에스타가 상대에게 눈짓하자 기회다 싶었던 그가 손뼉을 짝 쳤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계약한 건은 잘 진행되고 계신 겁니까? 다름이 아니라 저희 집안에서도 영지에서 사업 하나를 준비하고 있는데….”

대화를 이어 가기 시작한 상대 때문에 카이네스의 눈썹이 짜증스레 구겨졌다.

“잠깐이면 돼.”

에스타는 카이네스에게 속삭이고 손을 떼어냈다.

“금방 오셔야 합니다.”

카이네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상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금이 기회다!’

에스타는 재빠르게 주변을 눈여겨보며 로시나를 찾기 시작했다.

“어디로 간 거야?”

홀에는 보이지 않았다. 테라스를 여러 번 돌아다녔지만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에스타는 하는 수 없이 지나가는 시종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로시나 황자 전하께서는 어디 계셔?”

“아까 정원 쪽으로 나가는 걸 봤습니다.”

“고마워.”

에스타는 가벼운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정원이라면 거리가 꽤 있었다.

금방 돌아가지 않으면 카이네스가 자신을 찾아다닐지도 몰랐다. 마음이 조급해지자 에스타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계단을 급하게 뛰어 일 층으로 내려가던 찰나, 에스타는 하마터면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

“에스타!”

반가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페뷰어였다.

“오라버니! 늦게 오신다더니!”

“늦었잖니. 시작하자마자 왔어야 하는 건데.”

“누가 그 시간에 와요.”

페뷰어가 꾸벅 고개 숙여 예를 갖춰 인사했다.

“소공작 부인을 뵙습니다.”

“하하, 오라버니도 참!”

에스타는 급한 것도 잊고 페뷰어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베일리 소백작도 오랜만이네요. 여전히 얼굴이 좋아요. 잘 지내셨나요?”

“물론이죠. 신경 써 주시니 몹시 영광입니다.”

둘만의 장난을 치며 시시콜콜한 농담을 던졌다.

페뷰어의 금발을 보자 에스타는 잠시 잊고 있던 로시나가 떠올랐다.

“으앗, 그러고 보니 로시나 황자 전하 못 보셨어요?”

페뷰어가 오는 길은 정원을 지나는 길이었다. 로시나가 정원에 있다면 마주쳤을 가능성도 있다.

“아, 정원에 계시던 그분이 로시나 황자 전하셨구나.”

찾았다!

에스타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 황자 전하는 왜? 아직 인사를 드리지 않았니?”

“아뇨, 그건 아닌데요. 더 대화를 나눠 보고 싶어서요.”

페뷰어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소공작 부인인 에스타가 로시나와 대화를 나눌 만한 일은 마땅히 없기 때문이었다.

“그… 그분이 병약하시다는 말에 제가 마음이 쓰여서요. 그동안 제가 알아낸 지식을 나누면 어떨까 싶어서….”

‘나 생각보다 거짓말에 재능이 있구나.’

에스타는 스스로 한 거짓말에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스타. 네가 그렇게 신경 쓰는지도 모르고….”

페뷰어는 아련한 시선으로 에스타를 보았다. 페뷰어는 에스타가 늘 안쓰러웠다.

에스타의 뽀얀 피부 위에 생기가 돌았지만, 어릴 적에 유난히 자주 아파했던 제 여동생을 잊은 건 아니었다.

“가자꾸나. 내가 에스코트하게 허락해 주겠니?”

“황송합니다.”

에스타가 과한 제스처로 페뷰어의 손을 붙잡았다. 카이네스에게는 아직 없는 성숙함이었다.

‘이거지. 이거거든!’

에스타는 흐뭇한 미소를 가득 피운 채 페뷰어의 미모를 두 눈에 담았다.

제 오라버니의 외모는 오감이 만족스러운 미남이라고 자부하면서 정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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