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화 (69/83)

68화

정원을 걷던 로시나는 벌써부터 피곤한 제 몸뚱이가 원망스러웠다.

‘조금만 더 건강하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어릴 적부터 앓던 지병은 나을 기미가 전혀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피곤해졌고, 과로하면 피를 토하곤 했다.

다리도 팔도 성한 곳이 없었다. 눈은 자주 충혈됐고, 창백한 피부에 생기가 돈 걸 본 적이 없었다.

꼭 죽을 날을 미리 받아 둔 것처럼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몸이었다.

페이시아의 파티에 온 것도 사실은 어머니에게 보인 반항이나 마찬가지였다.

자꾸만 황제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어머니의 말에 더는 따르고 싶지 않았다.

‘이 몸으로 무슨 황제야. 황제는.’

황제위에 오른다면 일 년도 채우지 못하고 과로사하고 말 것이다. 지독한 황제의 일정을 제가 무슨 수로 해낼 거라 생각하는지.

제 몸은 생각도 않고 황제위만 생각하는 어머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욕심이 나면 본인이 하시든지.’

로시나는 페이시아 정원에 놓인 분수대에 제 얼굴을 비춰 보았다. 예상대로 눈 밑 그늘이 오전보다 크기를 키우고 말았다.

피곤하지만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형님의 즉위식이 다가오고 있어서 어머니의 횡포가 갈수록 포악해졌다. 도무지 욕심을 포기할 수 없는지 갖은 짓을 해대기에 걱정이 앞섰다.

되돌릴 수 없는 짓은 저지르지 말아야 할 텐데.

“쯧.”

로시나가 혀를 차며 앞에 놓인 작은 돌을 퍽 찼다.

“페이시아의 파티에 와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전하. 전하가 있어 이 자리가 더욱 빛날 것입니다.”

“로시나 전하께서 오신다는 말이 사교계에 퍼졌는지, 전하를 뵙기 위해 찾아오신 손님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문득 소공작 부인이 너무 티 나도록 하던 칭찬이 떠올랐다.

그 칭찬에 웃었던 것은 애써 노력해서 겨우 뱉은 칭찬이라는 것과, 제 부인이 날 보며 칭찬할 때의 카이네스의 얼굴이 웃겨서였다.

“표정 없던 작자가 고작 제 아내에게 휘둘려서야.”

그래서는 제 약점이 아내라며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는 격 아닌가.

로시나는 꽤 재밌는 걸 목격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때였다. 이미 손님들이 다 도착해 열릴 일이 없던 정문이 활짝 열리면서 황실 마차가 도착했다.

의아한 낯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로시나의 얼굴에 당황이 퍼져 갔다.

“형님이 왜 여기에….”

게다가 바쁜 일정 탓에 오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로시나?”

루안 역시 놀란 얼굴로 제 동생을 쳐다봤다.

“형님, 여기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일정은요?”

“일정이야 끝냈다. 너는 여기에 무슨 일이야? 오지 못할 거라 들었는데.”

“아…. 갑자기 오고 싶어져서요.”

“황후 폐하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텐데, 네가 페이시아의 만찬회에 오다니?”

루안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픽 웃었다. 그는 로시나의 대답을 굳이 듣지 않겠다는 듯 옷을 가다듬고 돌아섰다.

“형님, 저는 거짓말한 게 아닙니다.”

“묻지 않은 말이다. 더는 할 말 없으니 너는 얌전히 돌아가거라.”

루안의 눈초리가 창백한 안색의 로시나에게 닿았다.

그 시선이 왜 여기에 왔냐고 타박하는 것 같아 로시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하나뿐인 형님이라 따르던 것도 어릴 적 얘기였다.

로시나의 어머니, 황후가 루안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한 이후, 루안은 로시나를 밀어냈다.

보이지 않는 오해가 가로막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 때마다 로시나는 형님을 찾아갔다.

“그만 돌아가.”

차가운 눈빛, 대화를 막는 단호한 말투. 루안이 이럴 때면 로시나는 보이지 않는 오해 따위는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형님은 날 미워해. 내가 자리를 빼앗으려고 해서인가?’

침울해진 표정으로 돌아서려던 중, 나무 뒤에서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태자… 전하? 여기를 어떻게…. 아, 아니. 오셔서 무척이나 영광입니다.”

소공작 부인인 에스타 베일리 페이시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황한 목소리조차 밝아서 어두웠던 분위기가 금세 풀어졌다. 부인 옆으로 그녀의 오라비인 페뷰어 소백작이 보였다.

에스타를 본 로시나는 그만 돌아가겠다는 인사를 건네려 했다.

“부인,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난생처음 보는 제 형의 표정만 아니었어도.

“형…님…?”

“부인, 아쉽게도 동생은 몸이 아파 그만 돌아가야겠다고 합니다.”

“어머, 그러셨어요?”

놀란 에스타가 로시나를 바라보았다.

“힘드시다면 돌아가실 마차를 불러드리겠습니다.”

“아뇨, 더 있다 가겠습니다.”

로시나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몸이 아프신 거 아니에요? 피곤하시면 다음 파티에서 만나요.”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방금 형님과 대화를 나누니 피곤이 싹 날아가더라고요.”

로시나의 말에 루안이 그를 째려보았다.

로시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대답했다.

“…두 분이 사이가 좋으시나 봐요.”

에스타가 조금은 느릿한 말투로 대답했다. 예상치 못했다는 듯 난감해 보였다.

“이러지 말고 홀로 돌아가죠. 다들 전하의 방문을 기대할 겁니다.”

그 상황을 페뷰어가 정리했다. 페뷰어 역시 제 상관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찾아왔는지 궁금했다.

* * *

홀은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장차 황제가 되어 나라를 이끌 루안 황태자와 잘생기기로 소문난 베일리가의 장남이 함께 파티장에 등장한 것이다.

“파우더 룸이요.”

카이네스가 황당함을 금치 못하며 다가왔다. 에스타는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 그게….”

“아아, 저희 집 파우더 룸에는 페뷰어 형님과 황태자 전하께서 사시는군요.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카이네스는 비꼬는 것까지 잘하는구나.

변명의 여지 없이 수상쩍은 행동이라 에스타는 입을 꾹 닫았다.

“그게 아니라아….”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난감함에 눈동자만 도르륵 굴렸다.

“일 층으로 내려갔는데 페뷰어 오라버니와 딱 마주쳤지 뭐야? 그래서 인사했더니 로시나 전하께서 얼굴이 안 좋으셨다고 뵙는 게 어떠냐고 해서 갔지. 그랬는데 루안 황태자 전하께서 딱 오신 거야!”

에스타는 양손을 짝 부딪치며 웃어 보였다. 어떻게 잘 넘어가 줬으면 좋겠는데….

루안 황태자가 이곳에 온 것은 전혀 계산에 없는 일이었고, 정작 에스타가 찾아다닌 로시나 황자는 아까부터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타이밍이 좋았다. 이 말씀이시군요.”

“그렇지!”

에스타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자 카이네스는 미간을 꾹 누르며 두 눈을 감았다.

“누님, 제가 누님에게 무르긴 하지만 바보는 아닙니다.”

“응?”

“로시나 전하의 얼굴이 안 좋은데 페뷰어 형님이 누님을 왜 찾습니까. 의원을 부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도와 달라고 했겠죠.”

“…….”

“누님께서 숨기려 하니 더욱 의심스러운데요.”

카이네스가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더는 에스타에게 남은 변명거리가 없었고, 사실을 말할 생각은 더 없었다.

‘왜 난 항상 카이네스에게 다 걸리는 걸까!’

카이네스를 피해 주춤거리던 에스타의 등 뒤로 누군가의 온기가 닿았다.

“페이시아 소공작은 의처증 꿈나무이군. 그렇지?”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일품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로시나였다.

로시나가 태연하게 웃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손이 닿자마자 카이네스가 그 손을 내쳤다.

강하지 않았지만 단호한 태도였다.

“부인에 대한 의심은 그쯤 하는 게 좋아. 아니면 부당한 의심을 했단 사유로 이혼당할 수도 있으니.”

로시나가 맞은 손을 흔들어 보이면서도 끝까지 빈정거렸다.

“이혼이요?”

여태 대꾸 하나 없던 카이네스가 이혼이라는 말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로시나는 카이네스의 반응에 더욱 들떴다.

“그래, 이혼. 그래서 말인데 이번 기회에 확 차 버리는 게 어떤가? 다른 좋은 남자도 많은데.”

반들거리는 미소를 달고 쳐다보는 로시나 때문에 에스타는 이마를 짚었다.

카이네스와 잘 지내 볼 생각은커녕 놀려먹는 데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 보니 소설에서도 둘은 좋은 사이는 전혀 아니었고, 헤른을 도운 것도 사람 취급 못 받는 헤른이 불쌍해서였다.

‘치사하고 유치하긴 하지만 마음은 약한 사람인데….’

둘을 계속 붙여 두었다가는 큰 싸움이 나서 사이가 더 틀어질 것만 같았다.

“두 분 다 그만 하세요.”

에스타가 둘 사이에 서서 막아서려 했지만, 큰 키의 소유자인 카이네스와 로시나 사이에 끼인 것처럼 되고 말았다.

“전하께서는 몸도 편찮으신 것 같은데 그만 돌아가심이 어떻습니까?”

“파티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내 어디를 간단 말인가. 소공작의 배려는 고맙지만 내 몸이 오늘따라 괜찮네.”

로시나가 슬쩍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카이네스가 또 황자의 손을 내칠까 두려워 이번에는 에스타가 먼저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러자 카이네스가 불손한 눈으로 로시나를 쳐다봤다.

“제 아내의 어깨에 자꾸 손을 올리시다니 무척 불쾌합니다.”

“그렇지. 내 무례했네.”

순순히 사과하는 로시나의 표정이 오묘했다.

마치 재미난 일을 목격한 사람처럼 에스타를 보는 눈이 반짝거렸다.

둘 사이에 끼인 에스타만 난감해졌다.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 같아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두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어쩐지 저 유치한 놈이 내년 마상 대회 전에 내 밥에 독을 타는 게 아닌지 몰라.’

에스타는 이상한 생각을 하며 로시나를 힐끗거렸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소공작 부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눈빛이 아주 불손해.”

님이 내 밥에 독 타는 생각요.

에스타는 바들거리며 떨리는 눈꼬리는 겨우 감춘 채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 웃었다.

“로시나 황자 전하께서 페이시아가 주최한 파티에 만족해하시는 것 같아 무척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다. 오늘 아주 재미난 일을 많이 겪었거든.”

로시나는 제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았다.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 땀방울이 그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로시나는 빠르게 제 몸을 갈무리한 후 에스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인,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도록 하지. 내 다음에는 황실에 정식으로 초대하겠다.”

정말 파티가 만족스러웠던 걸까?

주춤거리며 손을 맞잡으려던 찰나, 로시나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한 명의 남자가 에스타의 시선에 들어왔다.

원인 모를 짜증이 서린 루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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