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다음에 보지.”
로시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더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돼서야 로시나는 궁으로 돌아갔다.
‘정말 몸이 안 좋은가 봐.’
원작에서 성녀인 헤른을 만나야 나을 수 있는데, 그쯤의 로시나는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그때까지 두고 보려고 했지만, 어쩐지 로시나의 얼굴이 마음에 걸렸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로시나가 돌아가고 나니 이제는 루안이 등장했다.
“경도 오랜만이야. 황실로 인사 한번 오기가 힘든가 보군.”
“찾아가도 뵙기 힘든 분이 전하 아니십니까. 못 뵌 것을 제 탓으로만 생각하시니 서운합니다.”
‘카이네스, 생각보다 말을 잘하잖아?’
생각보다 멀쩡하게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보니, 카이네스가 장차 가문을 이끌 사람이라는 게 다시금 실감이 났다.
“그러고 보니 부인과 따로 나눌 말이 있는데.”
“따로 나눌 말씀이라뇨?”
루안의 말에 카이네스의 표정이 굳었다. 변명이라도 하라는 듯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에 에스타는 진땀을 뻘뻘 흘렀다.
‘아니, 금서 얘기를 여기서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에스타가 당황한 표정으로 루안을 바라보았다.
루안은 재미난 장난을 친 사람처럼 키득대며 웃었다.
“농담이었네. 도서관을 찾았을 때 빌려준 책이 있었는데, 그것을 언제 돌려줄 생각인지 궁금할 뿐이야.”
루안의 시선이 계속 에스타에게 향했다. 에스타는 자꾸만 숙이는 고개를 똑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러니 그렇게 무서운 눈 뜨지 않아도 되네. 아내의 부정을 의심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카이네스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쩐지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더는 자신을 쳐다보지 않자 에스타는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해져 카이네스의 소맷단을 살짝 붙잡았다.
그러자 루안의 시선이 카이네스의 팔로 내려갔다.
“팔은 괜찮은 건가? 곧 아카데미 입학인데 팔을 다쳤으니, 이래서는 검도 제대로 쥘 수 없겠군.”
“학과 수업은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흐음.”
정석적인 대답에 루안이 이상한 소리를 흘렸다. 특유의 짓궂은 눈이 에스타와 마주쳤다.
“이래서는 자네의 입학을 기대하던 소공작 부인의 마음이 무척이나 아프겠어.”
에스타는 저도 모르게 숨을 헉, 하고 들이켰다.
아카데미 입학 건을 얘기했을 때, 격렬했던 카이네스의 반응이 떠오른 탓이었다.
게다가 돌연 아카데미 입학을 선언했던 거 보면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닐 텐데.
에스타의 걱정 어린 눈이 카이네스를 바라보았다.
“자네의 입학 건에 대해 먼저 얘기를 꺼냈더니 아주 기뻐하더군. 아마도 자네의 아카데미 입학이 가문을 위한 일이라 그런 거겠지.”
루안은 걱정스러운 눈을 한 에스타의 얼굴을 살폈다.
남편을 사랑한다고 소문난 것대로 제 남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알고 있던 것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고까워져 말에 가시가 돋았다.
루안이 푸른 목걸이를 차고 있는 에스타의 목에 닿았다 떨어졌다
루안의 시선을 느낀 에스타가 당황한 듯 목을 매만졌다. 루안은 이상하게도 당황한 에스타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만 가 보겠네. 파티 주최자라 바쁠 텐데 내가 시간을 너무 오래 빼앗고 있었군.”
루안은 답답해진 마음을 애써 숨긴 채 돌아섰다.
루안이 에스타의 옆을 지나치며 귓가에 속삭였다.
“얼른 찾아오도록 해. 아니면 또 불시에 내가 들이닥칠 거니까.”
에스타가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자 루안이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댄 채 ‘쉿’ 소리를 내었다.
“누님, 따로 얘기 좀 하죠.”
카이네스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에스타의 손을 붙잡았다. 어딘가 위협적인 행동에 에스타는 덜컥 겁을 먹었다.
또 화를 내면 어쩌지? 감정을 조절 못 해서 또 저택을 얼려 버리면?
사람들에게 마력 보유자인 걸 들키게 되면!
안 좋은 생각이 에스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에스타는 카이네스의 손길에 이끌려 빈 테라스로 들어섰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건 날씨 때문이 아니었다.
카이네스 때문이었다.
“미안해!”
에스타가 황급히 소리치자,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기 위해 커튼을 치던 카이네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뒤돌아봤다.
“뭐가 미안합니까?”
“아무것도 말 못 해 줘서.”
“말씀해 주시면 되잖아요.”
고개를 까딱거리며 대답을 종용했지만, 에스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카이네스는 그 앞에 서서 몇 분의 시간을 주었다. 에스타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카이네스의 마음은 수십 번도 더 휘몰아쳤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친구조차 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제가 못 미덥습니까? 아니면 제가 누님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까?”
카이네스의 주먹에 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힘이 들어갔다.
그녀와 대화를 할 때면 한 걸음 다가오던 카이네스가 오늘만큼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헤른 영애는 정말 건강이 걱정되어 찾은 게 맞습니까? 길드는 어떻게 알게 된 겁니까? 황태자 전하와는 그동안 무슨 얘기를 했습니까? 왜 찾아가신 거고요.”
점점 격해지는 카이네스의 목소리에 오히려 에스타가 천천히 다가갔다.
“카이네스….”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며 그의 손을 붙잡자 카이네스가 그 손을 내쳤다.
당황한 에스타의 눈동자가 방황하기 시작했다.
“누님은 꼭 제가 모르던 분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평생을 함께했는데, 남과 다를 바가 없네요.”
차가운 목소리에 에스타는 더는 카이네스를 붙잡을 수 없었다. 이만큼 화가 난 카이네스는 처음 봤으니까.
참고 참은 것이 터진 카이네스는 당황한 에스타를 바라보다 손으로 머리를 털었다.
에스타에게 제 감정을 받아 달라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에스타가 자신의 곁에서 행복할 리 없으니까.
하지만 어릴 적부터 함께였으니, 의지할 수 있는 친구 사이로라도 남고 싶었다.
‘내 욕심이었을까.’
오늘의 에스타는 그것마저 거절한 것이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카이네스는 조용히 뒤돌아섰다.
뒤돌아선 카이네스의 등을 바라보자 에스타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진 것처럼 쿵 울렸다. 온몸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정확한 이유는 몰랐지만, 당장 카이네스를 붙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테라스의 문을 열려던 찰나 뒤에서 작은 손이 조심스럽게 그를 붙잡았다.
“헤른 영애를 찾은 건 건강 때문이 아니야.”
에스타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얘기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이성보다 본능이 에스타를 이끌었다.
“그럼요?”
“…믿지 못할 거야.”
“그건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평소 밝고 쾌활하고 장난기 넘치는 에스타의 것이라기엔 우울했다.
카이네스는 화를 내던 것도 잊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우울한 목소리만큼이나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헤른 영애가 곧 위험해질 거야. 그래서 미리 도와주고 싶었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미친 것처럼 보인다는 거 알아. 그래서 여태 얘기하지 못한 거고.”
에스타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초점 잃은 시선 역시 바닥으로 푹 꺼졌다.
행동으로 보아 거짓은 아니겠지만 카이네스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여태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일삼았던 게 미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에스타를 믿기 힘든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누님은 헤른 영애을 모를 텐데 왜 그녀를 돕고 싶었던 겁니까?”
“그건…….”
에스타의 목소리가 떨렸다. 끝맺지 못한 말이 마치 변명처럼 들렸다.
차분히 듣고 있던 카이네스가 마침내 헛숨을 뱉어냈다.
“그동안 얘기하지 않은 걸 해명해 달라고 했더니 변명하시는 겁니까? 변명도 정성을 들여야지요. 미래라도 아는 것마냥 굴면 제가…….”
에스타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 카이네스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충격받은 에스타의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에스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네가 못 믿을 거라 생각해서 여태 얘기 안 했다고 했잖아.”
에스타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카이네스를 이해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이네스에게 상처를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모든 걸 얘기한 것도 아니잖아.’
책 얘기를 쏙 빼놓았기에 카이네스가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네가 소설 속 주인공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 꺼내지 못할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럼 길드는요?”
“네가 길드를 찾아갔으니까.”
“언제를 말씀하시는 거죠? 전 최근에 간 적이 없는데요.”
에스타는 벙끗이던 입을 꾹 닫아 버렸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카이네스에게 미래에 네가 간 곳을 봤다고 말하면 정신병 있는 사람 취급받을 것 같았다.
“설마 제 미래를 봐서 알고 있었다는 말이신가요?”
카이네스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그래.”
에스타가 체념한 듯 대답했고, 카이네스가 황당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카이네스의 낮은 웃음소리가 테라스에 퍼졌다. 기묘한 분위기였다.
“그럼 황태자 전하는요?”
“마력을 다루고 싶어서.”
“왜요.”
“미래에 난 여전히 마력을 다루지 못해. 그래서…….”
에스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카이네스가 돌연 에스타의 어깨를 거세게 쥐었다.
고통을 느낀 에스타가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죽었다는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