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2/83)

71화

당기는 이도 없는 문고리를 생명줄처럼 잡고 있던 카이네스가 손에 힘을 풀었다. 에스타가 떠난 지 한참이 지나서였다.

긴장이 풀리니 온몸에 쥐가 난 것처럼 지끈거렸다.

‘화가 나서 안 찾아올 줄 알았는데.’

지난번에 저택을 얼리고 도망쳤을 때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에스타가 찾아왔었다.

분명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에스타의 방문이 기쁘면서도 동시에 불안했다.

카이네스는 문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쉬는 카이네스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만찬회장에서 에스타가 한 말을 모두 다 믿는 건 아니었다.

미래를 본다는 말. 어쩌면 헛소리일 수도 있다.

거짓말에 일가견이 있는 에스타는 아니었지만, 맘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속여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타는 스스로 죽는다는 말을 차분하게 내뱉었다. 카이네스는 그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남 일인 것인 양 자기 죽음에 대해 말하는 에스타의 모습에서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어릴 적 에스타가 꿈결에 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두지 말라던 그 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자신을 죽게 내버려 둘 사람 정도로 봤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고, 에스타에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면 될 줄 알았다. 꾸준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면 자신을 배신자가 아닌 친구, 혹은 연인으로 여길 거라 믿었다.

그런데 에스타는 여전히 자신을 배신자로 보고 있었다.

에스타가 자기 죽음을 내버려 두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이유는 하나였다.

‘…죽게 내버려 두지 마.’

에스타의 죽음은 어쩌면 본인 탓일지도 몰랐다.

그깟 소유욕을 이기지 못하고 에스타에게 마력 다루는 방법조차 제대로 알려 주지 않았으니까.

“루안 황태자를 만난다고 했으니 곧 알겠네.”

루안은 마력을 보유하진 않았지만, 마력에 대한 엄청난 관심과 지식이 있었다. 마력 다루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을 터였다.

마력을 다룰 때는 손끝이 아닌 심장이라는 걸.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날 어떻게 볼까.’

카이네스는 발끝부터 따끔거리는 감촉을 꾹 눌러 삼켰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다.

“차라리 잘됐어.”

카이네스는 침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마력을 다루는 방법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법도 쓰는 세상에서, 미래를 보는 능력도 있을 수 있다

에스타가 본 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에스타의 곁에 머무를 수 없었다.

이제 정말 떠날 때가 되었다.

밝은 대낮이었지만 커튼 때문에 온통 깜깜한 방 안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카이네스는 창가의 커튼을 쳤다.

이미 에스타는 저택으로 떠났겠지만, 눈길은 미련스럽게도 길목 쪽을 향했다.

‘마차가 있잖아….’

아직 에스타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 심장이 거세게 뜀박질했다.

카이네스는 손으로 심장을 부여잡고 박동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부러진 척했던 왼손에 묶은 붕대는 푼 지 오래였다.

멀쩡한 왼손으로 저도 모르게 커튼을 부여잡자 커튼이 그대로 빳빳하게얼어 버렸다.

카이네스가 커튼을 놓으며 한숨을 내쉬었을 때, 제 눈에 보이면 안 될 것이 들어왔다.

에스타와 함께 있는 헤른 영애였다.

환히 웃으며 마치 기다렸던 사람인 것마냥 볼을 붉히는 에스타를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졌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둘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는데, 왜 저렇게 좋아하는 걸까.

카이네스는 에스타의 붉어진 볼과 기분 좋게 휘어진 눈, 선망하던 상대를 만난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손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의 기분 역시 그만큼 바닥으로 꺼졌다.

“헤른…. 헤른 루에느…….”

카이네스가 험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커튼을 쥐었던 카이네스의 손에 힘이 들어가 결국은 커튼이 산산이 조각났다.

* * *

“내일 보자, 카이네스.”

카이네스에게 인사를 건넨 에스타가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내려가던 길목이었다.

인파가 넘치는 호텔 로비를 지나며 에스타는 고민에 잠겼다.

이렇게 완강하게 만남을 거부할 줄은 몰랐다. 카이네스가 놀라고, 혼란스러워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루이셀한테 물어봐야 하나?’

카이네스의 개인적인 사정을 묻고 다니는 것이 그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만남을 계속해서 거절한다면 루이셀에게 물을 계획이었다.

‘딱 세 번 기회 준다.’

에스타는 흥, 콧바람을 내쉬며 치맛자락을 붙잡고 걸었다.

조금 흥분해서일까. 호텔 정문 앞에서 걸어오던 붉은 장발 머리의 여성과 부딪히고 말았다.

“아!”

부딪히자마자 소리가 터져 나올 만큼 여자의 어깨가 단단했다. 운동하는 사람의 몸이었다. 나름 운동을 했었던 에스타가 튕겨질 만큼 강한 사람이었다.

“괜찮아요?”

붉은 머리의 여자가 넘어진 에스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저는 괜찮아요.”

에스타가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하필이면 붉은 머리의 여자 등 뒤로 햇살이 떨어져 여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눈이 부신 탓에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어디 다치지는 않았어요?”

묻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게다가 듣기 좋은 미성이었다. 문득 에스타는 소설 속 여주인공, 헤른이 이렇게 미성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괜찮아요. 제가 더 조심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뇨, 저도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어요.”

여자가 부드럽게 미소 짓자 주변에 있는 햇살이 부서져 떨어지는 듯한 환상이 보였다.

‘어머머, 뭐야? 이 꽃 미모는?’

보통 잘난 거로는 무감각한 에스타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는 미녀였다.

문득 머리를 강타한 하나의 생각에 에사트의 입이 절로 움직였다.

“호,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질문에 여자의 표정이 살포시 어두워졌다.

“…왜 물으시는 거죠? 제가 무례라도 저질렀을까요?”

귀족들 사이에 서로의 이름을 묻는 것은 무례였다. 아스텔은 신분 사회였다. 귀족이라도 모든 이의 얼굴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었기에 간혹가다 유명한 가문일지라도 얼굴을 알리지 못한 인물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기에 상대가 먼저 가문을 밝히기 전에 묻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었다.

에스타는 급한 마음에 예법까지 잊어버렸고, 헤른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뇨!”

에스타가 황급히 양손을 흔들며 변명했다.

“그냥 너무 예쁘셔서요.”

‘…방금 내가 이상한 말을 뱉은 것 같은데.’

뻘쭘해진 분위기에 굳은 에스타는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당황한 것은 헤른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 작업 거는 거예요?”

“그것도 아니요….”

에스타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헬른은 헛소리가 튀어나올 만큼 미인이었다. 붉은 머리칼을 가지면 호전적인 외모로 보이기 십상인데, 오히려 고귀해 보였다.

우아한 헤른의 외모에 무척 잘 어울렸다.

소설 속 나이를 계산해 보면 루안과 비슷한 또래였고, 에스타보다는 네다섯 살 정도 많을 텐데, 그것보다 훨씬 성숙한 느낌이었다.

“정말 이상해 보이는 거 아는데요, 제가 아는 분이랑 많이 닮으셔서요.”

에스타의 이상한 말투와 행동에도 헤른은 상대에게 예의를 갖춰 행동했다.

“하하, 익숙한 작업 방법이네요. 설마 부딪힌 것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죠?”

헤른이 기분 좋게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키득댔다.

미인이 웃으니 주변이 환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에스타는 황급히 양손을 휘저었다.

“절대 아니에요! 정말 실수였어요!”

“알아요. 농담이었어요. 영애는 재밌으신 분이네요.”

이 꼴을 보고 ‘재밌는’이라는 평가를 한다고? ‘모자란’이 아니라?

헤른은 인심이 상당히 후한 듯했다.

하지만 에스타는 다른 쪽으로 마음에 찔려 작게 웅얼거렸다.

“…저 결혼했어요.”

영애라는 호칭은 이제 틀렸기에 바로잡아 줘야 했다.

혹시나 뒤늦게 결혼했단 소식을 듣고 헤른이 왜 그때 알려 주지 않았느냐며 따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이에는 더 바로잡아 줘야만 했다. 의도해서 속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어머, 정말요? 요즘 조혼은 흔치 않은데.”

헤른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직 어려 보이기만 하는 영애가 벌써 결혼이라니. 그렇다면 조혼이라는 뜻이었고, 최근 조혼으로 사교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세기의 커플이 떠올랐다.

‘페이시아가 약혼녀랑 조혼했다지.’

소문으로는 그의 약혼녀도 보통은 아니랬는데.

헤른은 에스타의 등 뒤로 보이는 페이시아의 호텔이 그녀와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호텔에서 나온 것도 봤기에 이제야 상황이 직시되었다.

“……페이시아 부인?”

헤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에스타가 정중히 드레스를 들어 보이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이름 모를 영애.”

영애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넸는데도 헤른이 미묘하게 불쾌한 시선을 보냈다.

“제가 실례를 범했네요, 부인. 루에느 가문의 헤른입니다.”

정석적인 인사를 받았음에도, 인사를 받기 전보다 더 분위기가 서먹해졌다.

에스타는 영문도 모른 채 헤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이런 형식적인 인사는 됐어요.”

손을 젓자 그제야 헤른이 고개를 들었다. 아까보다 분위기가 불편해진 것은 착각이 아니었는지 헤른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눈을 빗겨 나갔다.

“아시는 분과 제가 많이 닮았나 보죠?”

“네, 무척이나요.”

책에서 봐서 알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한테 미쳤다는 취급받는 건 남주인공인 카이네스만으로도 족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부인께서도 조심히 돌아가세요.”

헤른은 무척 깔끔한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재밌어하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기에 에스타는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저, 저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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