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다행히 헤른의 발걸음이 멈췄다. 헤른이 뒤돌아보며 자신을 왜 부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례한 말일 수도 있지만,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헤른의 부드러운 음성에 에스타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곧 헤른의 아버지가 도박꾼들에게 사기를 당해 막대한 빚을 지게 된다.
그걸 말려야 하는데 혼자서는 쉽지 않았다.
“아,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해요!”
그래야 미래에 당신을 도와줄 수 있거든요!
소설이 시작되든 말든 이미 신경 밖의 일이었다. 소설 캐릭터들이 좀 더 행복했으면 좋겠어! 에스타는 그 일념 하나로 모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헤른을 붙잡았다.
“…네?”
헤른의 표정은 미친 사람을 마주친 것처럼 서서히 굳어갔다.
이대로 뒀다가는 ‘도를 믿습니까?’와 별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에스타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제가 미, 미녀를 좋아하거든요!”
…이런.
차라리 하지 않았으면 나았을 말이었다. 마음이 급하니 너무 날것 그대로의 본심이 튀어나왔다.
에스타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헤른은 이미 황당하단 표정을 지은 뒤였다.
“방금 결혼했다고 하셨지 않나요?”
“작업 거는 게 아니라요. 친우로 지내고 싶단 말이었어요. 오해하게 했다면 죄송해요.”
에스타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부인은 정말 독특하시네요.”
욕을 돌려서 하는 건가?
고상한 목소리로 말하니 새삼 욕도 칭찬처럼 들렸다.
“제가 좀 그런 편이죠.”
에스타의 당당한 대꾸에 헤른의 표정이 작게 구겨졌다. 꼭 웃음을 참는 거 같았다.
그래. 이런 귀족은 처음 보겠지.
나름 신선하게 느껴진 건지, 마냥 미친 사람처럼 취급하지는 않았다.
에스타가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부인의 제안은 천천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가 페이시아에 그다지 좋은 감정은 없어서요.”
보통 그걸 면전에 대고 얘기하던가요?
고상하다고 생각했던 찰나, 예상 밖의 속마음을 들으니 꽤 충격이었다.
게다가 페이시아를 좋게 보지 않는다니!
나중에 둘이 연애할 사이 아니었던가? 황후의 정원에서 만나기 전엔 인연이 없었을 텐데?
의아했던 시선이 고스란히 떠올랐는지 헤른이 볼을 긁적였다.
“어쩐지 부인에게는 사실대로 털어놓게 되네요. 실례했습니다.”
“왜 그런지 물어봐도 될까요? 의외여서요.”
“첫 만남이 그다지 좋지 못했거든요.”
“공작님하고요?”
에스타가 순수하게 물었을 때, 헤른의 눈살이 작게 구겨졌다.
“아뇨, 소공작님과요.”
설마 원작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나쁘게 평가하고 있을 줄이야.
얼떨떨한 충격 뒤에 새로운 깨달음이 떠올랐다.
둘은 이미 만났구나.
자신에게 만난 적 없다고 말했었던 카이네스가 떠올랐다.
‘그 뒤에 만난 거겠지. 카이네스가 거짓말할 리가 없잖아.’
이상하게 의심이 들어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런데 그 만남이 별로였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에스타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카데미에 재학 중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어요.”
“네, 맞아요.”
심지어 검술학부라고 했다. 여자가 많지 않은 학부에서 성적도 톱이라 했다.
곧 카이네스에게 빼앗기겠지만, 그녀 역시 재능이 출중했다.
“곧 제 남편도 아카데미에 들어간답니다.”
“아, 예.”
헤른이 아주 깔끔하게 대답했다. 자신과 전혀 관계없다는 얼굴이었다.
“부디 잘 부탁드려요.”
에스타가 눈을 깜빡이며 부탁하자 헤른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부인, 그 말은 들어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헤른은 아주 담백하게 에스타의 제안을 거절했다.
“저 역시 페이시아가 부정 입학을 했다고 생각하거든요.”
…네?
꽤 당혹스러운 말이었다.
설마 헤른의 입에서 튀어나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말이기도 했다.
“제국 아카데미의 입학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매년 받는 학생의 수가 백 명밖에 되지 않아 모든 귀족가의 자제를 받아 주지 않습니다. 검술 실력으로 합격이 결정되죠.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매년 열리는 사냥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입니다.”
헤른은 당연한 사실을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페이시아를 부정하고 있다는 걸, 에스타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페이시아 소공작의 사냥 실력이 우수하다는 것은 알지만, 작년 사냥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지요? 베일리 가의 차남이 우승했지만, 이미 재학 중이라 이 등인 페이시아에게 돌아갔다지만….”
에스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소설의 여주인공까지 카이네스를 차별하다니. 소설 속에서 카이네스가 겪은 차별과 부당함이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느껴졌다.
“아카데미 입학생들 중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황실의 입김이 셌다는 게 정설로 믿어지지요. 이미 입학 시기를 지나 입학하는 것 역시 부당합니다.”
“하지만….”
헤른이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그러니 저는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단호함을 넘어 옅은 악감정까지 느껴졌다.
에스타는 둘 사이에 무슨 사건이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 다른 걸 부탁드릴게요.”
헤른의 눈초리가 애매한 형태로 휘어졌다.
“카이네스가 본인의 실력으로 아카데미 입학에 문제없는 걸 증명한다면 더 이상 차별 섞인 시선을 보내지 말아 주세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전 카이네스가 훌륭한 실력을 갖췄음에도 페이시아라는 이유로 여태 아카데미 입학을 거절당했다는 게 진정한 차별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에스타의 말에 옅은 악감정이 담겼던 헤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감정에 휘둘려 헤른이 놓친 점이 있었다. 페이시아가 아카데미에 입학하지 못한 것 자체가 부당한 일이라는 걸.
카이네스가 제 어깨를 치고 지나갔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당시의 감정에 휘둘려 무조건 그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아, 이런 바보 같은 일을.’
헤른이 어금니를 악 물며 입을 꽉 물었다. 깨달음을 얻은 얼굴이었다.
‘다행히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구나.’
안심한 에스타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럼 영애께서 제 제안에 대답하는 것도 그때쯤으로 하죠.”
“제안이요?”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을 느낀 헤른이 눈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에스타가 그녀의 눈앞에 손을 쑥 내밀었다.
“친하게 지내자는 제안요.”
귀족 여인끼리 하기에 흔치 않은 인사법이었다. 마치 갓 서임을 받은 기사들끼리 할 법한 인사였다.
어쩐지 헤른은 그런 인사를 건넨 에스타가 싫지 않았다.
“한 반년이면 될 거예요.”
“팔이 부러졌는데 어떻게 반년입니까?”
“전 제 남편이 잘해 낼 거라 자신하고 있거든요.”
자부심이 넘치는 에스타를 보며 헤른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과신입니다.”
헤른의 목소리엔 빈정거림이 없었다. 지극히 객관적인 평가를 내린 것이다.
그럼에도 에스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제 남편을 믿고 있음을 보였다.
“보면 알게 될 거예요.”
그제야 헤른은 에스타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높은 손 온도가 꼭 태양 같은 그녀를 닮아 있었다.
“그때 봬요.”
에스타가 맞잡은 손을 놓고 흔들었다.
그녀의 인사에 헤른은 저도 모르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 * *
호텔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에스타는 생각에 잠겼다.
“어제 내가 너무 입을 떠벌렸나?”
울컥해서 그만.
왜 카이네스가 실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거야?
역대 마상 대회에서 최연소 우승자인데, 그걸로도 부족한가?
사냥 대회 우승은 일부러 피해 간 거라고. 절대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란 말이야.
오지랖을 피웠다는 건 누구보다도 제 자신이 잘 알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어릴 때부터 봐 온 카이네스는 그 자체로 훌륭했다.
폐쇄적인 가문에서 태어난 탓에 사람들에게 소외당했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삐뚤어지지 않고 잘 자랐다.
그것만으로 기특하고 훌륭한데, 사람들에게 엉망으로 취급받으니 에스타의 마음이 쓰라렸다.
‘심지어 미래의 짝이라 생각한 헤른도 카이네스를 편견 어린 눈으로 보고 있었지.’
이쯤 되면 그를 아카데미에 보내는 것도 걱정되었다.
괜히 가서 차별받는 건 아닐까, 미움받아서 마음의 상처를 얻는 건 아닐까.
‘이런 걱정만 가득한데 카이네스를 남자로 보는 게 말이 안 되지.’
그러니까 만찬회장에서 카이네스가 돌아섰을 때 느낀 감정은 단순한 착각일 거다.
심장이 무너져 내렸지만, 아마 어릴 때부터 본 남동생이 자신에게 실망한 것 같아서… 그게 미안해서.
“그런 거겠지…?”
호텔에 도착하자 에스타는 마차에서 내려 익숙하게 카이네스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어젯밤에 문을 꼭꼭 잠그고 열어 주지 않은 카이네스를 떠올린 에스타는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알지.”
기세등등하게 카이네스를 찾은 에스타가 문을 두드렸다.
“카이네스, 나야.”
“…….”
역시나 방 안에선 아무 답도 없었다.
“이미 일어난 것도, 듣고 있는 것도 알아.”
하녀를 시켜 방을 지켜보라고 명했다. 아침을 방으로 들여보냈다는 말을 들었으니 일어났단 말이겠지.
“계속 말 안 할 거야?”
문에 대고 혼자 대화하는 게 점점 지겨워진 에스타는 결국 최후의 방법을 쓰기로 했다.
바로 카이네스가 준 마력석이었다.
에스타는 목에 걸린 마력석을 손에 쥐고 최대한 집중했다. 예전에 공작과 대화할 때처럼 손에 쥐고 카이네스를 떠올렸다.
웅웅, 소리를 내며 손안에서 마력석이 진동했다.
그때 한참이나 아무 반응 없던 방안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역시 듣고 있었잖아.’
카이네스는 마력석에 응답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바깥에서 마력을 사용하면 어떡합니까?”
문을 열자마자 카이네스가 잔소리를 쏟아냈다. 어제와 달리 말끔한 얼굴이었다.
에스타는 작게 열린 문틈 새로 재빠르게 손을 뻗었다.
“잡았다. 헤헤.”
해맑게 웃는 에스타를 보며 카이네스는 남몰래 심장을 부여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