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4/83)

73화

카이네스는 그녀에게 마력석을 준 걸 처음으로 후회했다.

마력을 억누르는 동시에 에스타의 마력을 숨기기 위해 준 것인데, 에스타가 그걸 이용해 자신을 불러낼 줄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머리를 조금 더 굴렸다면 깨달았겠지만,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대범하게 마력을 사용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결국 방으로 들어온 에스타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카이네스는 멀찍이 서서 불안하게 에스타를 보고 있었다.

“네가 대화하기 싫으면 대화하지 말자.”

“그럼 왜 오셨습니까?”

“얼굴 보려고. 괜찮은가 걱정돼서.”

에스타의 눈동자가 카이네스를 훑었다. 어제보다 외관은 나아졌지만 상태는 엉망이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며, 안절부절못하는 손까지.

아직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제가 밉지도 않습니까?”

이런 소리나 해 대니 신경이 안 쓰이고 배기나.

에스타는 푹 한숨을 내쉬고는 옆자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카이네스는 앉을 생각이 없는 것처럼 못 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에스타는 이내 포기하고 말을 이었다.

“어제만 해도 미웠는데 지금은 아니야.”

어제까지 미웠다니. 하긴, 밀치고 도망쳤으니 미울 만도 했다.

카이네스의 입술이 꼼지락거렸지만, 끝내 사과를 하진 않았다.

‘차리리 미움받는 게 나아.’

이대로 서서히 멀어지는 게 더 나았다. 밤새 그러기로 마음을 다잡았으니 단호하게 굴어야 했다.

카이네스는 소파에 앉은 에스타의 뒤편에 서 있었다. 숨을 고른 채 표정을 가다듬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호텔이 불편하지는 않아? 차라리 네가 저택에 있고, 내가 호텔에서 지내는 게 낫지 않아? 거기가 네 저택이잖아.”

태연하게 물었지만, 자꾸 카이네스에게 시선이 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누님의 저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결혼했으니까요.’라는 말이 돌아오겠지. 부부라는 말을 버릇처럼 했었던 카이네스가 떠올랐다.

에스타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맞다, 우리 결혼…….”

“…누님 편한 대로 하세요.”

“어?”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에스타는 이상하게 구는 카이네스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카이네스는 탁자에 놓인 식어 버린 커피잔을 빤히 보며 기계처럼 대답했다.

“누님이 호텔에서 지내고 싶으시다면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아, 아냐. 그럴 필요는 없어.”

떨떠름한 기분이었다. 카이네스가 이렇게 깔끔하게 군 적이 있었던가?

부부 사이에 연연하던 사람이 카이네스였다.

에스타는 하루 아침에 달라진 카이네스의 태도에 잠깐 정신이 나가고 말았다.

“대화해요. 얼른 다 하고 그만 돌아가 주세요.”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카이네스가 어제와 다르게 휘몰아치려 하자 에스타는 잠시 숨을 골랐다.

“누님이 궁금한 게 뭡니까?”

“네 얼굴 보러 온 거야. 네가 그러고 도망치니까 내 마음이 불편해서.”

카이네스는 치아를 으득하고 물었다. 저런 말을 쉽사리 뱉는 에스타가 원망스러웠다.

제가 마음을 접겠다고 확신한 순간에도 에스타는 존재만으로 자신을 유혹했다.

카이네스는 재빨리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평온하지 못한 얼굴을 이미 에스타는 보고 말았다.

“그럼 말 나온 김에 물을게. 넌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사실 난 꽤 많았거든.”

에스타의 물음에 카이네스의 고개가 들렸다.

“미래를 안다는 말을 아낀 건, 말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야. 너도 믿어 주지 않는데 누가 날 믿어 주겠어?”

“그거야….”

“너도 내가 이상하게 군다고 생각하잖아.”

카이네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다시 물을게. 정말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있습니다. 저도.”

에스타가 턱을 치켜세웠다. 서로 비밀이 가득하니 자꾸 엇갈리지.

“말해 봐. 우리 다 털어 버리자.”

미래를 안다는 걸 카이네스에게 말하지 못했을 때 많은 것이 답답했다.

카이네스는 자꾸만 의심하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변명밖에 없었으니까.

카이네스도 그랬겠지. 동질감을 느끼며 에스타의 눈이 안쓰러움을 담았다.

카이네스는 에스타의 눈동자를 바라보지 못하고 속눈썹을 파르르 떨다 겨우 입을 열었다.

“누님을 속였습니다. 마력을 제어하지 못한 날이면 괴물처럼 변했어요. 인간 모습을 하게 된 것도 최근의 일입니다. 더 어릴 때는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어요.”

에스타는 자신이 그의 모르는 과거를 들을 때면 늘 난감했다. 상처 받은 카이네스를 다독여 주고 싶다가도 그게 자신의 몫이 아닌 것 같았다.

에스타는 주먹을 꼭 쥐고 카이네스의 말을 들었다.

“그걸 숨기고 누님과 결혼했어요. 어떻게든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그 망할 놈의 공작같으니.

공작이 모든일의 발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카이네스를 낳으며 부인이 죽었다는 이유로 카이네스를 미워하고 증오했다. 하지만 카이네스는 태어난 죄밖에 없었다. 그를 만든 것 역시 공작이었으면서.

“아버지가 싫었어요. 아버지가 날 끔찍하게 여기는 만큼 나 역시도 아버지가 끔찍했죠. 누님이 절 도왔지만 전 누님을 속였어요.”

“어쩔 수 없었잖아.”

에스타가 카이네스에게 다가갔다. 껴안고 보듬어 주려 손을 뻗은 순간 카이네스가 강하게 에스타의 손을 내쳤다.

“아뇨, 전 끔찍해요. 아버지의 말대로 주변인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말 거예요.”

“……공작이 그런 말도 했어?”

온갖 쌍욕이 에스타의 입 안에 굴러다녔다. 그녀의 눈동자가 한껏 흉흉해지자 카이네스는 심장이 뻐근해졌다.

‘누님은 정말이지….’

카이네스는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더는 에스타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누님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스스로를 과신해 누님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니 누님이 미래에 죽은 건 저 때문일지도 몰라요.”

“카이네스…. 그게 왜 네 탓이야? 마력을 다루지 못한 내 탓인데.”

심지어 그건 에스타가 널 지독하게 쫓아다녔고, 죄도 저질러서 죽게 된 건데.

과거가 달라져서 미래도 같지 않을 거라 말해 주려 했지만, 그는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카이네스의 눈엔 절망이 가득했다.

“아직 황태자 전하를 만나 뵙지 못했나 보군요. 먼저 만나 봬요. 그랬다면 제 말뜻을 알 테니까요.”

“황태자 전하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거야?”

“가 보세요.”

카이네스는 손으로 미간을 꾹 누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가 맞물리지 않고 엇나가기만 하는 것 같았다.

“그만 돌아가세요. 누님, 더는 찾아오지 마세요.”

카이네스가 에스타를 문밖으로 안내했다. 늘 일상처럼 잡았던 손이 오늘처럼 차가웠던 적은 없었다.

“카이네스….”

문밖에 선 에스타가 카이네스를 불렀지만 냉정하게 문이 닫혔다.

“그만 돌아가세요.”

코앞에서 닫힌 문을 보고 있으려니 에스타의 마음이 이상하게도 착잡해졌다. 단순히 남동생의 사춘기를 목격한, 그런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다.

마음이 무너져 내려 당장이고 바닥에 주저앉을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에스타는 문 앞에 바짝 붙어 그가 듣길 마음으로 속삭였다.

“카이네스,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괴물도 아니고…. 넌 그냥 카이네스인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가 왜 이러지?’

에스타는 품 안에 늘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을 꺼낼 정신도 없었다.

훌쩍이는 와중에 문도 열어 주지 않는 카이네스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왜 갑자기 선을 그어? 왜 다정하게 대해 주지 않는데.’

카이네스가 떠나도 평온할 것만 같았던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릴게. 잘 지내고 있어.”

에스타는 손으로 문을 똑똑 두드리고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양 볼을 타고 흐른 눈물에 손수건이 흠뻑 젖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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