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무슨 사정이요?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써 아내를 독수공방하게 만들다니, 백작님께서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시는지 아세요?”
“아버지가?”
에스타가 얼굴을 치켜들자 엘리가 팔짱을 낀 채 투덜거렸다.
“어제도 저를 몰래 불러 물으시더라고요.”
가족들이 다 알고 있었구나.
에스타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고집을 부려서 결혼까지 한 마당에 잘 못 살고 있는단 말까지 듣게 하다니.
마음이 불편해졌지만, 망할 주둥이가 끝까지 카이네스 편을 들었다.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작은 마님, 정말 이러실 거예요!”
결국 답답함을 못 이긴 엘리가 소리쳤다.
에스타는 신경도 쓰지 않고 미리 준비해 둔 손수건을 엘리에게 넘겨주었다.
“이거 호텔로 가서 카이네스에게 전해 줘.”
며칠 전부터 준비해 두었던 선물이었다. 아카데미 입학 선물로 또 커프스단추를 주고 싶지 않았다.
기억에 남는 좋은 선물을 해 주고 싶었는데 카이네스가 가지지 못한 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만들어 봤다.
에스타가 손수건을 내밀자마자 엘리의 눈이 세모로 변했다.
“이건…. 작은 마님께서 밤새 뜨신 손수건이잖아요. 계속 뭘 만드시나 했더니….”
“그래도 페이시아의 역사적인 일인데 기념해야지.”
“흥, 작은 마님은 속도 좋으시지!”
그래도 엘리가 대신 화내 준 덕분에 에스타의 속이 어느 정도는 풀렸다.
정말 카이네스를 좋아하는 건가? 마음이 오락가락하자 더는 카이네스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만 화내고 얼른 다녀와.”
손을 흔들자 엘리가 흥, 콧바람을 내뱉고는 순순히 방을 나갔다.
창가로 다가가 엘리가 외출하는 걸 확인한 뒤에야 에스타는 얇은 외출용 코트를 걸치고 방을 나섰다.
목적지는 베일리 가문이었다. 주변을 확인하고 철문을 비밀스럽게 걸어 들어가자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책을 읽고 있던 메이어와 딱 마주쳤다.
“메이어 오라버니.”
에스타가 작게 부르자 메이어가 책을 덮고 다가왔다. 한동안 저러고 서 있었는지 담벼락에 기댄 옷이 구겨져 있었다.
“에스타, 왔구나. 몰래 오느라 고생했다.”
“제 부탁 때문인데요. 오라버니께서 고생 많으셨죠.”
에스타가 미안해서 눈을 도르륵 굴리자 메이어가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며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최근 페이시아 가문에서 큰 만찬회를 연 것도 힘들었을 텐데 카이네스 놈이 마음고생까지 시키는 중이란 말을 들었다.
메이어의 표정이 보기 드물게 굳어 있었다.
“안색이 안 좋아. 몸은 괜찮은 거지? 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은 꾸준히 먹고 있는 거야?”
예전처럼 온갖 약재를 달여 먹진 않았지만, 건강 증진을 위해서 꾸준히 먹고 있었다.
역시나 맛은 없었지만.
“물론이죠. 요 며칠 잠을 설쳐서 그래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카이네스 때문이지?”
메이어의 일침에 에스타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메이어는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 녀석이 네 속을 꾸준히도 썩히는구나.”
“사정이 있어요.”
“그놈의 사정.”
“하하….”
이 정도면 메이어 인생에서 제일 크게 화를 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카데미에서 마주치면 한마디 해 주마.”
“그러지 마세요.”
에스타가 애써 말렸지만 메이어는 동생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책은요?”
가만히 뒀다가는 조만간 아카데미에서 만나 잔소리를 퍼부을 것 같았기에, 에스타는 서둘러 화두를 돌렸다.
“여기. 이건 번역본이고.”
메이어는 미리 챙겨 온 책을 내밀었다. 에스타는 간결한 메이어의 필체가 적힌 책을 주르륵 훑어 넘겼다.
넘긴 책도 두꺼웠는데 각주까지 모두 번역한 탓에 메이어가 만든 번역본이 더욱 두꺼웠다.
“이걸 다 번역하셨다니…. 오래 걸릴 만했네요. 적는 데만 한참 걸렸겠어요.”
에스타가 감동한 눈으로 메이어를 올려다봤다.
“그래도 흥미로웠어. 금서인 이유가 있더구나. 그 책에 의하면 마력은 작은 양이라도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하더구나.”
“그렇다면 오라버니한테도요?”
에스타의 물음에 메이어는 대답 대신 손 위에 작은 아지랑이를 피워 보였다.
“…어!”
놀란 에스타가 책을 우수수 떨어뜨렸다. 곧 메이어는 인상을 찡그리며 손을 거뒀다. 아직 오랜 시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불의 마력을 타고났나 봐. 아직은 기껏해야 작은 아지랑이를 만드는 정도지만.”
“저도 그래요.”
이게 정말 베일리 가문의 내력이었구나!
큰 깨달음을 얻은 에스타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나도 다룰 수 있어!’
에스타가 희망에 차 두 눈을 반짝이며 메이어의 품에 뛰어들었다.
“오라버니! 정말 감사해요!”
메이어가 휘청이며 에스타를 안아주었다. 제뉴어보다 작고 가녀렸지만, 의외로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베일리 가문 내력일까?”
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법이 금지된 제국에서 마력을 타고났다는 건 그다지 좋은 소식 같지 않았다.
가주인 아버지와 상의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문득 과거 저택 내에서 불이 났었던 일이 떠올랐다.
“설마 저택에 자주 불이 났었던 이유가 네 마력 탓이었니?”
“…네.”
에스타의 긍정적인 대답에 메이어는 입을 떡 하니 벌렸다.
‘이렇게나 부주의했다니. 전부 사용인들의 실수인 줄 알았는데.’
메이어는 이마를 짚고는 에스타를 떼어 냈다.
“이제부터 조심하면 돼. 조심히 읽으렴.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돼.”
“네, 명심할게요.”
“말만 잘하지.”
에스타가 소리 내어 헤헤 웃었다. 헤실거리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여 메이어는 더 이상 트집 잡지 않았다. 그래도 어렸을 적 아픈 모습이 사라져서 보기 좋았다.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한 메이어는 에스타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오라버니도 내일 아카데미에 가시죠?”
에스타가 손으로 머리를 쓱쓱 정리하며 물었다.
“기억하는구나. 카이네스에게 정신이 팔려 세 오라비는 다 잊은 줄 알았단다.”
메이어는 생각보다 꽁한 구석이 있었다.
에스타가 ‘헤헤, 전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눈치 없이 웃자 결국 메이어도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잘 다녀오세요, 이제 곧 졸업이시죠? 제뉴어 오라버니에게도 안부 전해 주세요.”
“형님이 좋아하겠네.”
에스타는 품 안에 책 두 권을 꼭 껴안고 메이어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라버니 정말 감사해요!”
“오냐.”
뒤돌아 뛰어가는 에스타가 사라질 때까지 메이어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에스타는 밤새 책을 읽었다. 책에는 주로 마력을 다루는 방법, 마법을 사용하는 법, 그리고 포프슬의 일대기가 적혀 있었다.
“손끝이 아니었어. 오히려 손끝에 집중하면 마력이 분산돼 사용하기 어렵다고….”
이게 카이네스가 말한 거짓말이었구나.
“누님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스스로를 과신해 누님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니 누님이 미래에 죽은 건 어쩌면 저 때문일지도 몰라요.”
순간 예전에 카이네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게 죄책감 때문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에스타는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던 카이네스가 걱정되었다. 내일이면 아카데미 입학인데 오늘 밤도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카이네스와 멀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의 등을 보며 느꼈던 무거운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루안이 내게 이 책을 추천해 준 이유가 뭐지? 설마 내가 마력 보유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건가?’
카이네스가 루안을 만나고 오랬는데, 그럼 루안이 내게 마력이 있단 사실도 알고 있었던 걸까? 카이네스도 그 모든 걸 눈치채고 있었고?
책을 보고 만나자고 했으니, 에스타는 일단 루안을 만나 본 후, 그다음에 카이네스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루안이 내게 이 책을 내민 이유가 뭘까.”
[당신이 알지 못하는 힘의 원리]
에스타는 한참 동안 책을 쳐다보았지만 끝내 답을 내지 못했다.
이 책이 날 낚을 미끼라면 대체 무엇을 위한 거지?
* * *
아카데미 개학 당일, 카이네스는 끝내 저택에 들리지 않았다. 엘리는 길길이 날뛰었고, 저택 사람들까지 에스타를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봤다.
에스타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마차에 올랐다.
“황궁으로 가 줘.”
에스타의 품 안에 루안에게 빌린 책이 비단에 쌓여 있었다.
에스타는 책을 소중하게 꼭 안고는 마차에 타서도 내려놓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작은 마님.”
마부의 말이 들리자 곧 황실 풋맨이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짤막한 인사를 뱉은 에스타가 황실 제2 서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황태자 궁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황태자 궁이요?”
에스타가 저도 모르게 품 안의 책을 꼭 끌어안았다.
갑자기 황태자 궁이라니. 여태 도서관에서 만난 것을 우연이라고 핑계 댔었는데, 갑자기 만남을 드러낸다는 게 의아했다.
“가시죠.”
황태자 궁의 시종이 에스타를 안내했다. 잘 다듬어진 황실의 길을 따라 걸으며 에스타는 풍경을 감상했다.
날이 무척 좋았다. 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하늘이 쾌청하다.
바람에 쓸려 머리가 흔들렸다. 에스타가 한 손으로 머리를 귀 뒤에 꽂았다.
‘아카데미에 잘 갔으려나.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서고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황태자 궁이 있었다. 바닥은 대리석으로, 벽은 금으로 장식할 만큼 화려한 궁이었다.
처음 본 황태자 궁 앞에서 에스타가 입을 벌리자 시종은 익숙하다는 듯 잠시 기다려 주었다.
“이…제 가시죠.”
이렇게 빤히 보고 있었다니.
에스타가 살짝 볼을 붉히며 말했다.
“흔히들 그러니 너무 당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종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황태자가 기다리는 장소로 그녀를 안내했다.
흔히들 그런다니.
시종의 말에서 황태자 궁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났다.
도서관이나 집무실, 응접실로 갈 줄 알았던 시종은 일 층 복도를 지나 반대편 정원으로 나왔다.
“여기는 정원 아닌가요?”
“정확히는 온실 입구입니다.”
“입구요…?”
어딜 봐서 입구라는 거지?
에스타가 좌우로 휙휙 고개를 돌려봤지만, 문이라고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만 더 걸으시면 입구가 보이실 겁니다.”
“아, 그렇군요.”
대체 얼마나 큰 거람? 에스타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였다.
“여기 있었군.”
등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등줄기에 쭈뼛 소름이 돋았다.
루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