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서둘러 에스타가 정갈히 고개를 숙였다. 시종도 마찬가지로 고개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루안의 눈이 숙인 에스타의 정수리에 닿았다.
“오늘은 놀라지 않는군.”
바닥을 내려다봤던 에스타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루안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을 게 상상이 갔다.
“목걸이는 또 하지 않았고.”
루안이 고개를 들란 허락을 해 주지 않았기에 에스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개 듦을 허락하지.”
루안의 허락에 에스타가 고개를 들었지만, 여전히 눈은 맞추지 못했다.
루안이 목걸이를 언급한 순간부터 벌을 받을까 두려워졌다.
“이쯤 되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확실한 것 같은데.”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면? 부인은 끼고 싶었지만, 페이시아 소공작은 부인의 장신구까지 통제한단 말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는 치사하게 카이네스까지 들먹였다. 에스타는 안절부절못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다음 파티 때는 꼭 황태자 전하께서 선물해 주신 목걸이를 착용하겠습니다.”
루안은 눈살을 찌푸리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마 화라도 난 건가? 고작 목걸이 때문에?’
에스타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제가 결혼한 이후에 참석하는 파티가 없어서 착용하지 못했습니다. 무려 전하께 하사받은 선물이라 중요한 날에 착용하려고 아껴 뒀기에 여태 착용하지 못했던 것이고요.”
변명했음에도 루안의 눈은 풀리지 않았다.
“치사해서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한 번쯤은 착용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루안의 빈정거림에 에스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다음엔 꼭 끼겠습니다.”
목걸이로 지적받은 탓에 에스타의 눈이 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 탓에 루안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는 걸 에스타는 보지 못했다.
“온실로 가지.”
루안이 기분 좋은 눈웃음을 흘리며 앞서 걸었다. 오늘 아침부터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루안을 시종들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는 둘만 가지. 자네는 차를 준비해 줘.”
“전하, 외람되오나….”
황실 안에서만큼은 남녀가 유별했다. 특히나 미혼의 황태자는 더더욱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어릴 적부터 황실 예법을 몸에 익힌 루안은 알고 있는 부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단호했다.
“차를 준비해 오도록.”
루안의 단호한 어투에 시종이 고개 숙이며 사라졌다. 다른 시종들 역시 자리를 지키고 더는 따라붙지 않았다.
“가지.”
앞서 걷는 루안을 따라 걸으며 에스타는 못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듣는다 해도 당황하지 않기로 마음의 준비를 끝마쳤다 생각했지만, 비밀 얘기라도 하듯 단둘만 온실로 향하는 길 내내 에스타의 마음은 불안으로 뛰었다.
제가 본 루안이 다정했다지만, 애초에 루안의 성정은 그다지 곱지 못했기에 여전히 의심의 싹은 남아있었다.
‘진짜 한입으로 두말하지는 않겠지? 금서를 읽었다고 날 잔인하게 죽여 버리지는 않을 거야.’
책을 읽었음에도 여전히 마력을 다루는 일은 어려웠다. 읽자마자 단번에 마법을 사용한 메이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에스타는 루안이 온실에서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며 조용히 뒤따랐다.
거대한 온실에 도착해 루안이 유리문을 열었다.
투명한 통창으로 이루어져 돔 형식으로 지어진 온실을 보니, 에스타의 입에서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화려한 꽃들의 향연에 황태자와 대화하러 왔다는 것도 잊고 에스타가 탄성을 내뱉었다.
“우와….”
몇 분이나 꽃들을 구경했을까. 정신을 차린 에스타가 뒤돌아보자 루안과 눈이 마주쳤다.
어쩐 일인지 루안이 당황한 듯 눈을 내리떴다.
“왜 온실로 부르셨는지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도서관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에스타의 긴장이 풀려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루안은 어쩐지 그 미소에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온실이 도서관보다는 대화하기에 더 적합하잖나.”
가만히 에스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루안이 말을 돌렸다.
“온실은 마음에 드나?”
“네. 무척이나 예쁘네요.”
가지각색의 꽃을 쫓던 에스타의 눈이 천장으로 향했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다.
“새소리가 들려요.”
에스타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나뭇가지에서 새가 날아왔다. 루안과 에스타를 반기기라도 하듯 눈앞에서 날개를 퍼덕였다.
루안이 손을 내밀자 자연스럽게 그의 손 위에 앉았다. 손 위에 앉을 만큼 아주 작은 새였다.
짹짹 소리를 내며 울어대는 목소리가 귀여워 에스타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더욱 커졌다.
“카타리나. 여기서 사는 새지. 그대가 마음에 드나 봐.”
“귀엽네요.”
“그러게.”
루안이 에스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중요한 날이니만큼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실수해서는 안 됐다.
그녀에게 카이네스의 아카데미 입학과 관련된 내용을 감정적으로 물었었던 날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날처럼 오늘도 의외의 답을 내놓을까.
루안의 눈이 새를 바라보는 에스타를 훑었다.
“평소 사람을 잘 따르지 않는데, 의외군. 만져 보겠나?”
루안이 손을 내밀었지만 에스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새가 싫어할 거 같아요.”
노란 깃털을 가진 카타리나가 스트레스를 받을까 싶어 노심초사하던 에스타는 얼른 날려 보내라며 루안을 쳐다보았다.
루안이 손을 올리며 흔들자 카타리나가 시원스럽게 날아갔다.
때마침 차 준비를 마친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둘은 마련된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책은 다 읽었나?”
“……네.”
에스타는 힘겹게 대답했다. 금서를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처벌받는 나라에 살고 있는 것과, 처벌하는 사람이 눈앞의 황족이란 점 때문이었다.
“드디어 그대도 금서를 읽었군.”
루안이 흡족하게 웃었다.
“이제 그대도 한통속이야.”
“…네?”
에스타가 눈을 깜박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 책을 읽고 오면 그대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던 말 기억하겠지?”
“벌을 주지 않으시기로 약속하셨죠?”
“생각보다 순진한 소리를 하는군.”
루안의 말에 에스타가 숨을 들이켰다.
에스타의 눈에 루안의 미소가 서서히 악독하게 변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낌새를 눈치챘지만, 루안은 한없이 느긋하게 굴었다. 에스타를 놀려 먹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루안은 시종이 가져다준 차까지 마셔 가며 대답을 미뤘다. 시시각각 파랗게, 또는 빨갛게 변하는 에스타의 얼굴을 보는 게 즐거웠다.
“그걸 여태 걱정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단 소리야. 평소 눈치 없단 소리를 꽤나 듣겠군.”
자신을 놀리는 중이었다는 걸 깨달은 에스타가 한 소리 하려던 찰나였다.
“자네, 마력을 가지고 있더군.”
“!”
에스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루안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황당하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내가 알아차렸다는 걸 이제 눈치챈 건 아니겠지?”
시선을 피하는 에스타를 보며 루안이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설마 그렇게나 눈치가 없을 줄은.”
“어느 정도 감은 잡았지만 확신이 없었을 뿐입니다. 아스텔에서는 금기시되는 일이니까요.”
에스타는 황실에 오는 동안 자신이 했던 생각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이제야 생각해 내는 게 황당하다는 루안의 표정을 보니 루안은 처음부터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첫 만남부터 수상쩍더라니. 의도했었던 거였구나.’
루안의 말대로 에스타는 눈치가 없었고, 이제야 루안이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굴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어렸을 적부터 마력은 금기시되는 일이었지. 내가 다섯 살 적에 처음으로 마법사가 어떻게 죽임을 당하는지 알게 됐어. 선대 황제 폐하께서는 지독하게 마법사를 싫어하셨거든.”
루안은 티스푼으로 차를 저으며 말했다.
그는 에스타가 제 앞에서 얼마나 긴장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더욱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노력했다. 자신은 그럴 일 없다는 걸 온몸으로 알려 주려고.
이 겁많은 여자가 도망갈 일 없게 하도록 루안은 티 나지 않게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 책에 적힌 대로 사지가 찢겨 온전치 못하게 삶을 끝맺지. 고문은 당연했고, 죽은 후에도 마법사의 삶은 비참해. 가족들까지 힘들게 만들고 말지. 할아버님은 마법사에게 원한이라도 있는 사람 같았어.”
루안이 에스타를 힐끔 바라보았다. 에스타는 겁먹은 토끼 눈동자로 문을 바라봤다.
문제라도 생기면 당장 문밖으로 뛰쳐나갈 듯한 그녀의 모습에 루안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물론 난 그게 잘못됐다고 봐. 옆 나라 브란트에나 제국만 해도 마법사를 인정하고 추대하니 마력을 기반으로 빠른 발전을 하고 있지. 이대로라면 브란트에나 제국에게 추월당할지도 몰라.”
루안이 걱정 어린 표정을 짓자 에스타는 의문이 들었다.
“대체 그런 얘기를 왜 제게 하시는 거예요?”
에스타가 조심스럽게 묻자 루안은 기회를 낚아챈 것처럼 재빠르게 답했다.
“언젠가 황위에 오르면 마법사를 인정하고 그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구를 만들고 싶어. 그대가 그걸 도왔으면 해.”
“네??”
에스타는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 큰 소리를 내질렀다.
루안의 시선이 에스타의 움직임을 따라서 위로 올라갔다. 뒤늦게 제가 황실에서 소리를 지른 걸 알아차린 에스타가 화들짝 놀라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오늘은 못 보나 했는데.”
루안이 농담을 던지며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