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죄, 죄송합니다. 무례를 저질렀어요.”
에스타가 연신 고개 숙여 인사하자 루안이 제지했다.
“괜찮아. 충분히 놀랄 만한 일이었으니까.”
다시 앉으라는 손길에 에스타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자네의 능력은 실로 뛰어나지. 내가 느껴 본 마력량 중 제일 뛰어나.”
루안에겐 처음으로 보는 마력의 흐름이었다. 정제되어 알아차리기도 힘들었던 카이네스, 대놓고 위협하듯 휘몰아치던 공작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마, 마력을 느끼다뇨?”
“어릴 때부터 자연히 느껴지더군. 여태 숨기고 살았지만, 이렇게 손을 잡으면 마력을 느낄 수 있어.”
놀란 에스타가 턱을 떡 벌렸다. 처음부터 이미 다 들켰다는 소리보다 소설에 등장하지도 않았던 루안의 능력 때문에 더 당황하고 말았다.
‘마력을 읽을 수 있다니!’
순간 루안과 눈이 에스타의 눈이 마주쳤다. 금색의 눈동자를 품은 눈이 기분 좋게 휘어졌다.
“날것 그 자체로 위력이 상당하군. 전혀 정제되지 않은 힘이야.”
날것 그 자체니까요!
에스타는 이 말을 뱉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고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다 루안이 에스타의 눈앞에 손을 내밀었다.
“확인.”
눈을 감는 루안의 모습에서 카이네스가 겹쳐 보였다. 능력이 다르지만 행동은 꽤 비슷했다.
에스타가 엉거주춤 손을 내밀며 겨우 손끝만 잡자 루안이 손을 당겨 붙잡았다.
에스타의 붉고 뜨거운 마력이 손을 통해서 느껴졌다.
“불의 힘이라 뜨겁군.”
두 사람의 손은 금방 떨어졌다.
에스타는 여전히 당황한 표정이었다.
“왜, 왜 하필 저인가요….”
“그대가 눈에 띄었으니까.”
“하지만 분명 다른 사람도 있을 텐데요.”
“그대의 남편을 말하는 건가?”
“!”
아까보다 더 당황한 에스타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붙잡은 손까지 떠는 탓에 루안이 침음을 삼켰다.
‘이런, 생각보다 더 당황한 것 같은데.’
루안은 에스타에게 무해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소공작과 손 한번 잡은 적이 없었을 것 같나?”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물었지만 겁먹은 에스타의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나 때문에 카이네스에게 피해가 가는 건 아니겠지? 황실은 페이시아를 싫어하는데!’
그건 루안도 마찬가지일 터. 마법사를 더는 박해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페이시아를 견제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루안은 에스타의 걱정을 빠르게 읽어 냈다.
“소공작은 물론, 공작도, 선대 공작 역시 마력을 가지고 있었지. 황실에서 이유도 없이 페이시아를 견제한 것은 아니야.”
“…그러면요? 이유가 있단 소리인가요?”
“아버지 대에는 공작이, 현시대에는 카이네스 페이시아의 마력량이 제일 많더군. 대를 거듭할수록 그 그 힘이 커지고 있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힘을 견제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
이해받지 못할 힘은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 기사단과 겨룰 만한 힘을 가진 사람을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정신을 잃기라도 한다면? 주체 못 할 힘의 방향이 고국을 향한다면?
“황실은 통제를 벗어난 힘을 두려워하거든.”
황실이 페이시아를 죽이지 못한 것 역시 그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 힘이 아니었다면 진작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겠지.
루안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그가 생략한 말이 무엇인지 에스타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황실이 얼마나 페이시아를 견제하고 있는지, 페이시아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폐쇄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역시.
루안을 보는 에스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양손을 꼭 쥔 채 루안을 마주 보았다. 그 변화가 루안의 마음을 긁었다.
“마법사를 국가에서 인정하고 기구를 만들려면 그대의 도움이 필요해. 난 마력을 읽을 수는 있지만, 마법사는 아니거든.”
“저도 안 돼요.”
“왜? 자신감의 문제라면 더 넓게 생각해 보는 편이 좋아. 시간은 많으니까.”
루안의 배려에 에스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아직 마력을 다루지 못해요.”
에스타의 고백에 루안은 순간 눈살을 찌푸렸다.
“…뭐?”
루안의 얼굴이 조금 무서웠으나 에스타는 꿋꿋이 말했다.
“마력을 전혀 다루지 못한다고요. 마음에 따라 마력이 제멋대로 요동칠뿐더러 가끔 폭주하기도 해요.”
루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분명 사냥제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믿으실지 모르지만 그건 실수였어요.”
“실수?”
루안이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실웃음을 흘렸다.
“전 전하를 도울 만한 인재가 아니에요. 좋게 봐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에스타가 고개를 숙였다.
루안은 여전히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문득 에스타가 소원으로 황실 도서관 출입할 권한을 원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금서에 관심 많은 것이 열정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애초에 마력을 다루지 못해서 그 방법을 찾고 싶었던 거였다.
뒤늦게 정답을 알아차린 루안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런 거였군.”
루안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만한 마력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카이네스와 비등해질 수 있다.
장차 마탑을 세울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이런 인재를 놓칠 순 없었다.
“그렇다면 더욱 상관없어. 마력을 다루는 일은 내가 도와줄 수 있으니.”
루안의 제안에 에스타의 눈이 흔들렸다.
‘내가 마력을 다룬다면….’
더는 카이네스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고, 이 더위 지옥에서도 벗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카이네스의 숙적인 루안의 도움을 받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마력을 읽을 수 있는 내 능력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루안이 간교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꼭 사람을 꾀는 뱀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어때, 해 보겠나?”
* * *
“마탑을 세우는 데 도움을 달라니.”
마력을 가졌단 사실을 들켰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돌연 마탑 근무를 제안해 올 줄은 몰랐다.
‘직원 정도겠지? 마탑 일원, 혹은 일개 마법사 정도.’
에스타는 고민스러운 얼굴로 마차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루안을 돕는 게 찝찝하지만, 마법을 배울 수 있다니.”
책을 읽었지만 천재는 아닌지 아직까지 마력을 운용하는 건 어려웠다. 열 번 시도해서 겨우 한 번 되는 정도였다.
다룬다는 말을 하지도 못할 수준이다.
한 번에 해낸 메이어가 천재인 셈이었다.
“대체 오라버니는 어떻게 한 거람.”
에스타는 한숨을 푹 내쉬며 오른손을 펼쳐 힘을 모았다. 손 위에 붉은 불 회오리가 만들어지나 싶더니 곧 공중으로 흩어졌다.
“이런….”
아쉬움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헤집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한번 시도하고 나면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력을 사용해서인지 몸이 뜨겁지 않다는 것.
“원작에 나온 마탑주는 누구였을까.”
원작에서 마탑이 세워지며 마탑주가 나왔던 것 같은데, 에스타의 도주로 뒷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 부분이 읽은 소설의 끝이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완결까지 봐야 했는데.’
하필이면 에스타의 죽음이 끝이라니.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 * *
입학 당일, 카이네스는 멀쩡히 양손으로 교복을 입은 뒤 타이를 맸다.
더는 손이 아픈 척하지 않았다. 에스타가 없으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정말 가지 않으실 겁니까? 서운한 일을 풀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어려워질 겁니다.”
“상관없어.”
“이유라도 좀 알려 주십시오! 제가 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루이셀이 답답한 듯 카이네스를 타일렀다.
타이를 만지던 카이네스가 뒤돌아서 단호하게 루이셀을 내려다봤다.
“루이셀, 앞으로 나와 부인 사이의 일에 끼이지 말도록. 자네가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해. 그게 페이시아가 자네를 고용한 이유이니.”
루이셀은 다정한 도련님이 아닌 꼭 공작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는 채근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더니 카이네스가 짐을 챙겨 호텔 밖으로 나갔다.
“도련님….”
카이네스가 사라지자 방 안이 횅해졌다. 그다지 짐도 없었지만 아무도 없으니 꼭 비어 버린 듯했다.
카이네스는 방에서 나와 마차에 올랐다. 손에는 에스타가 만들어 준 엉성한 손수건이 들려 있었다.
「건강하게 잘 다녀와.」
짤막한 편지와 함께 전달된 손수건을 카이네스는 품 안 주머니에 넣었다.
아카데미로 가는 내내 카이네스의 표정이 어두웠다.
아카데미 정문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릴 때, 하필이면 맞은편 마차에서 내린 헤른과 마주쳤다.
카이네스의 눈썹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어?”
헤른은 저도 모르게 아는 척했지만, 곧장 불편한 듯 얼굴을 살포시 찌푸렸다.
카이네스가 관심이 없다는 듯 그녀를 지나쳤다.
“저기.”
뒤에서 헤른이 부르는 걸 뻔히 들었지만, 카이네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자 뒤에서 뛰어오는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전에 부딪혔던 건 제 잘못도 있는 것 같아요. 사과할게요.”
카이네스의 눈이 헤른에게 닿았다 금방 떨어졌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