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카이네스는 또다시 그녀를 지나쳐 교내로 향했다.
제국 아카데미 내부에서는 신분제가 통하지 않는다. 모두가 공평한 학생 신분으로 대우받기에 카이네스는 그녀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아도, 말을 걸어도 무례로 여기지 않았다.
다만 헤른의 얼굴을 마주할 때면, 그녀를 대할 때의 에스타 표정이 자꾸만 떠올라 기분이 더러워졌다.
“하…!”
멀어지는 카이네스의 등을 보던 헤른은 어이가 없었다.
누구는 말끔한 마음으로 사과할 생각인 줄 아나?
그의 아내인 소공작 부인의 말을 듣고 며칠 내내 끙끙 앓았다. 제가 편견 섞인 시선으로 페이시아 소공작을 대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죄책감이 점점 커지자 그날의 기억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마치 선량한 카이네스 페이시아를 제가 치고도 짜증 섞인 태도로 대한 것 같단 착각을 했고, 마주치자마자 사과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저 태도를 보아하니, 오해는커녕 제가 사람을 똑바로 본 것 같았다.
“이봐요!”
헤른은 며칠 끙끙 앓았던 제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런 무시는 처음이었다.
다시 그의 앞을 가로막자, 카이네스가 대놓고 경멸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헤른은 졸지에 억울해져서 그를 째려보았다.
“귀찮게 굴지 말고 비켜.”
“그쪽 부인이 부탁까지 한 거 알아요? 어지간히 걱정되나 본데 이유를 알 것도 같네요.”
헤른을 말을 뱉고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너무 비꼰 것이다.
정략혼이라 해도 기분 나쁠 말일 텐데 페이시아 소공작 부부는 금실 좋기로 유명했다.
이 일을 기억했다가 졸업하고 나서 가문에 화풀이하는 건 아니겠지?
헤른은 무능력한 제 오라비를 대신해서 가주가 되고 싶었다.
방금 제 행동을 자책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뭐?”
서릿발 같은 목소리와 함께 주변의 온도가 뚝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부인이 뭘 해?”
헤른이 죄송하다, 사과하려던 찰나 카이네스와 눈이 마주쳤다.
화를 내는 목소리와 달리 눈이 기뻐 보였다.
‘좀 미친 거 같은데…. 착각일까?’
헤른이 대답하지 않자 카이네스의 눈이 금세 식었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 거치적거리니까.”
카이네스는 짜증스러운 몸짓으로 헤른을 지나쳐 교내로 향했다.
에스타를 피하기 위해 아카데미 행을 결정한 게 벌써 피곤해지고 있었다.
헤른 루에느는 에스타가 자신에게만 자상하다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만든 첫 번째 사람이었다.
게다가 부탁이라니.
제 걱정을 했다는 건 기뻤지만, 그 부탁의 상대가 헤른 루에느라니.
카이네스가 까득 소리가 날 만큼 어금니를 짓이겼다.
‘왜 헤른 루에느에게 날 부탁하지?’
그 여자가 뭐라고.
헤른은 에스타를 좋아하는 에런 소백작보다 더 거슬리는 존재였다. 오히려 에스타가 헤른을 좋아하는 느낌이지.
행방을 찾고, 연락하려 하고, 심지어 남편인 자신을 부탁까지 하려 하니까.
그 생각들이 카이네스를 자꾸 거슬리게 했다.
‘누님이 미래를 안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에스타가 본 미래가 궁금해졌지만 굳이 묻고 싶진 않았다.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이제 끝인데.’
아카데미 졸업 후 성인이 되어 가문을 물려받게 되면, 에스타와의 관계도 깨끗하게 청산할 생각이었다.
이혼해야겠지.
미래에 죽는다는 에스타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제 곁에 있으면 죽을 거라는 사실을 당장의 행복에 겨워 잊은 척하고 있었을 뿐.
“제 어미도 잡아먹은 놈.”
경멸 섞인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결코 잊지 못할 말이었다.
* * *
카이네스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지 일 년 반 뒤, 에스타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헤른 루에느였다.
카이네스가 아카데미에 입학한 것을 기점으로 두 사람은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카이네스 얘기를 꺼낼 때면 헤른이 대화를 기피했기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알았지만, 헤른은 먼저 얘기해 주지 않았다.
“영애께서 또 연락 오셨네요? 이번에는 뭐라셔요?”
“저택으로 놀러 오라는 말에 승낙했어. 다음 주에 온대. 그때 준비해 줘.”
“네, 작은 마님.”
엘리는 인사한 뒤 빨랫감을 챙겨 방을 나갔다.
카이네스가 떠난 지 일 년 반, 이제 곧 방학이었다.
일 년 반 동안 카이네스는 단 한 번도 저택에 돌아오지 않았다. 제국 아카데미가 멀리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너무해.”
에스타는 저도 모르게 볼멘소리를 내뱉다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니야. 이제 곧 방학인데 그때는 돌아오겠지. 카이네스도 생각할 게 많았을 거야.”
갑자기 사라진 카이네스 때문에 고민이 깊어졌지만 에스타는 애써 밝게 웃었다.
벌써부터 헤른을 만나는 게 기대되었다.
헤른은 카이네스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싫어했지만, 에스타가 넌지시 물을 때면 카이네스에 대해 얘기를 해 주곤 했다.
들은 것 치고 꽤나 상세했지만 헤른의 말에 의하면 둘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원래 주인공들이 사이가 나빴던가. 첫눈에 반했던 사이였는데.’
에스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헤른이 적어 준 편지를 보는 걸 좋아했다.
“얼른 다음 주가 되면 좋겠네.”
* * *
“헤른 영애!”
마차에서 내리는 헤른을 보며 에스타가 손을 흔들었다.
소공작 부인이 보이기엔 경망스러운 행동이었으나 페이시아 저택에서 그녀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헤른은 치맛자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에스타보다 귀족다운 태도였다.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거절당할 줄 알았거든요.”
“저야말로 초대해 주실 줄 몰랐어요. 부인은 늘 의외이시네요.”
초대가 의외라는 말에 에스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영애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관심 있다는 티를 팍팍 낸 것 같은데요.”
에스타의 말에 헤른이 민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제가 소공작에게 무례를 저지른 것 같아서요.”
“그 뒤로 사과하셨잖아요. 그럼 괜찮죠. 누구나 오해는 할 수 있잖아요.”
“그런가요?”
에스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전 당사자도 아닌걸요.”
보통은 가주나 가문의 일을 본인의 일처럼 여기기 마련인데 그녀는 상당히 객관적인 모습을 보였다.
‘역시 의외야.’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영애를 모시기 위해 오늘 주방장이 힘을 좀 썼답니다.”
에스타가 환히 웃으며 헤른을 이끌었다.
결혼한 부인이라기에는 너무 어린 모습에 헤른은 인지 부조화가 올 것 같았다.
에스타는 저보다 어리고, 행동도 철이 없었지만 묘하게 어른스러울 때가 있었다.
주로 남편에 관련된 일에서만.
에스타가 안내한 장소는 저택 내의 응접실이었다. 에스타의 취향대로 꾸며진 응접실은 신기한 물건들이 많아 볼거리가 한가득했다.
주변을 둘러보던 헤른은 남모를 부러움을 느꼈다.
“응접실이 정말 멋지네요. 다시 한번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칭찬 감사해요. 자주 오도록 해요. 저도 영애와 얘기하는 게 좋거든요.”
에스타가 마련된 의자에 앉으며 헤른에게 맞은편에 앉길 권했다.
곧 시종들이 다가와 다과를 준비해 주었고, 홍차와 딸기가 얹어진 생크림 케이크가 준비되었다.
티타임치고 무거운 디저트였지만 에스타는 눈을 떼지 못했다.
‘카이네스가 제일 좋아하던 건데.’
에스타가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시선을 올렸다.
“영애와 편지만 주고받아서 늘 아쉬웠어요.”
“저도요. 사실 조금 고민했었는데, 와서 저택과 부인을 직접 보니 오기를 잘한 것 같아요.”
헤른이 사무적인 인사를 건넸다.
“영애께서는 이번 연도만 더 다니시면 졸업이시죠?”
“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요.”
헤른은 따뜻하게 우려진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티스푼으로 저었다.
얼굴만큼이나 고아한 그녀의 행동에 에스타는 혼이 빠진 듯 헤른을 쳐다보고 말았다.
‘진짜 예쁘기는 너무 예쁜데.’
그녀는 이미 아카데미 내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 얼굴도 예쁘고 검술 학부생들 중에서도 결코 남자들에게 밀리지 않는다고.
그리고 다음으로 유명한 것은 아주 좋은 신붓감이란 소리였다.
“졸업하면 결혼하실 건가요? 요즘 루에느 백작님께서 결혼 상대를 찾으신다고 하시던걸요.”
“아마도 그러겠죠.”
순간 헤른의 표정이 굳었다.
“사실 저는 그다지 결혼이 달갑지 않아요.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헤른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가주가 되고 싶은 것과 별개로, 누군가의 부인이 된다는 일이 꼭 팔려 가는 것만 같았다.
헤른이 문득 에스타에게 물었다.
“부인께 하나 여쭈어도 될까요?”
“물론이죠.”
“부인은 왜 페이시아 소공작님과 결혼을 결심하셨나요? 무척 어린 나이셨잖아요. 가문에서 결혼을 원했나요?”
“그건 아니에요.”
에스타가 실웃음을 흘렸다. 가문이 원했다니 말도 되지 않았다.
제가 고집을 부려 일부러 한 결혼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기에, 사교계에 퍼진 소문대로 말했다.
“좋아해서요.”
헤른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 갔다.
“소공작님께서요?”
“아뇨, 제가요.”
그 말을 들을 헤른의 표정이 더욱 의아하게 변했다.
처음 보는 당황한 표정이라 에스타는 헤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신기하네요. 전 소공작님께서 부인을 더 좋아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물어도 될까요?”
카이네스가 여전히 자신을 좋아하고 있을까?
에스타는 최근 카이네스를 보지 못했기에 궁금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