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헤른이 대답해 주기를 기다리는 동안 괜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눈 때문에요. 아카데미에서 가끔 마주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시선이 얼마나 차가우신지 몰라요. 그런데 부인 얘기를 할 때면 정말 사람이 흐물흐물해진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겠더라고요.”
조금 미친 것 같긴 하지만.
헤른은 차마 무례한 말을 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차갑기만 한 남자가 인적 드문 나무 뒤에서 제 이름이 적힌 손수건을 꼭 품고 있는 모습을 봤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선물 받았다는 게 너무 뻔했고, 선물한 상대방이 부인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추리할 수 있었다.
이 얘기를 해 줘야 할까 고민하던 헤른은 입을 다물었다.
괜히 둘 사이에 끼여 피곤해지고 싶지 않았다.
오늘 이곳에 온 것도 에스타의 관계보단 장차 졸업 후에 페이시아와 연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흐물흐물이요?”
에스타가 양 볼을 발그레 붉히자 헤른의 얼굴에 언뜻 안쓰러움이 스쳤다.
“제게 소공작님의 안부를 묻는 연유는 모르겠지만, 부인께서 직접 찾아가시면 무척 좋아하실 것 같던데요.”
답지 않게 참견하고서는 곧장 후회했다. 헤른은 입을 다물고 사무적인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아닐 거예요.”
“네, 그런가요.”
에스타의 대답을 간략하게 마무리 지은 그녀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며 다른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사실 오늘 부른 이유가 따로 있어요, 영애.”
에스타가 짧게 심호흡하며 입을 열었다.
“소공작님에 대한 건가요?”
“아뇨.”
에스타가 고개를 저었다. 아까보다 차분해진 분위기에 헤른은 살짝 긴장을 삼켰다.
“영애의 부친을 보면 안 될 장소에서 보고 말았어요. 도박장에서요.”
“…잘못 보셨겠죠.”
헤른은 떨떠름한 반응을 숨기지 못했다. 도박장이란 장소가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니었으니까.
뜬금없이 그런 얘기를 꺼낸 에스타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스타는 물러서지 않고 다시금 얘기를 꺼냈다.
“아뇨, 확실해요.”
“제 남편감을 찾으러 간 거겠죠. 사교장으로 쓰이기도 하니까요.”
헤른은 창피함으로 물든 목을 애써 숨기며 태연히 대꾸했다.
헤른은 자신의 아버지가 도박장에 드나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다지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딱 하나 대단하다고 느끼는 점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과 금세 친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친우를 따라 도박장을 드나든 것이겠지.
‘하지만 이걸 소공작 부인 입에서 듣게 만들다니. 아버지께 말씀드려야겠어.’
헤른이 제 말을 믿지 못하자 에스타는 준비해 둔 증거를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도박장 출입 명단과 담보를 잡았다는 증서였다.
출입 명단에는 한 번이 아닌 매일 드나들 정도로 숱하게 이름이 적혀있었고, 담보 서류에는 분명 백작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걸 어떻게….”
“어떻게 구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에스타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 가는 횟수가 늘고 있고, 잃는 금액도 큰 것 같은데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서요.”
원작이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가문이 넘어갈 만큼 백작은 큰 빚을 지게 되고 만다.
두고 볼 수만은 없어 이렇게 귀띔을 주곤 있었지만 헤른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를 일이었다.
“제 가문의 일이 아니라 참견하는 것이 무례라는 것을 알지만, 영애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모른 척할 수 없더라고요.”
증거물을 보는 헤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의심하듯 가늘어진 눈이 에스타를 향했다.
“왜 이런 것까지 준비해 두셨습니까? 달리 사용할 곳이라도 있으셨던 겁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평소 백작님의 행실을 생각하면 도박할 것이라고 절대 생각지 못할 것 같아 영애에게 보여드리기 위해 준비한 것뿐이니까요.”
사람 좋아하는 백작이 가족들 몰래 가문 재산을 걸어 가며 도박하고 있다는 걸 헤른이 완벽하게 믿어야 했으니까.
그들의 가족 사이가 어떤지 소설엔 나오지 않았다. 다만 헤른이 가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알고 있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돕고 싶었다.
에스타의 변명에도 헤른의 의심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드릴게요. 달리 사용할 곳 없고, 이 증거들로 영애와 루에느 백작가를 모욕할 생각은 없었어요. 신께 맹세해요.”
에스타가 한 손을 들어 맹세한다는 표시를 보였다. 헤른의 의심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맹세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공작 부인이 루에느 가문의 약점을 잡아 이득을 취할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작은 마님, 황실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엘리가 황실 연락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손님이 왔음에도 찾아왔다.
에스타는 엘리가 건넨 상자와 편지를 받아들었다.
에스타가 익숙한 듯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붉은 루비를 박은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목걸이네요.”
“하하….”
에스타가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루안이 선물 공세를 시작한 지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마탑에서 근무해 달라는 제안은 일찍이 거절했지만 루안은 도무지 포기하지 않았다.
목걸이를 본 헤른이 물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주셨습니까?”
“어떻게 아셨죠?”
황실에서 연락 왔다는 말만 듣고 황태자 전하가 주었다는 걸 알다니. 여주인공의 직감인 걸까?
“부인도 아시겠지만, 귀한 물건이니까요.”
귀한 물건?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한 헤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만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부인.”
헤른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아마 곧장 저택으로 향할 터였다. 어쩌면 원작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잘됐네요. 저도 일이 생겨서요.”
에스타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헤른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헤른은 가볍게 웃으며 에스타의 손을 마주 잡았다.
* * *
에스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황성으로 향했다. 마차 뒤편에는 지금까지 루안이 보내 온 선물을 전부 싣고 가는 길이었다.
‘담판을 지어야겠어.’
이제 얼추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되었고, 루안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마력의 폭주로 목숨을 잃을 위협은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꼭 거절하고 와야지.’
마차의 열린 창문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다. 반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오자 사람들의 옷이 두꺼워져 있었다.
‘저 옷은….’
멍하니 바깥을 응시하고 있던 에스타의 눈에 반짝 빛이 돌았다. 황실 아카데미 교복을 입은 한 학생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외출한 것인지 교복 위에 코트만 걸친 채였다.
베이지색의 단정한 교복의 남색 코트를 걸친 남학생을 보자 괜히 마음이 흔들렸다.
‘보고 싶다.’
카이네스를 못 본 지도 벌써 반년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얼굴도 잊을 것 같았다.
루안이 보낸 선물을 카이네스가 보낸 건 아닐까 늘 기대하며 열어 봤었다. 결과는 늘 루안이었지만.
카이네스는 자신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좋아한다고 고백할 때는 언제고 말도 없이 멀어지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에스타는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이후론 카이네스를 찾아가지 못했다.
‘날 싫어하게 되면 어떡해.’
단호하게 오지 말라던 카이네스의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았다.
미움받기 싫은 마음에 그를 만나러 가는 걸음을 떼기가 두려웠다.
진짜 이대로 헤어질 생각인 걸까?
아니면 헤른이랑 만난 건가? 헤른은 별다른 기색 없던데. 헤른도 나도 아닌 다른 여자를 찾은 걸까?
고작 교복 한 번 본 걸로 그녀의 머릿속이 쑥대밭이 되었다. 이 상태로 카이네스를 마주친다면 더 엉망이 되겠지.
“후….”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왔다.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 곧 멈춰 섰다.
“작은 마님, 도착했습니다.”
에스타는 풋맨이 문을 열어 주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문 사이로 예상치 못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짜잔.”
“…전하?”
정확히 인지하는 게 늦을 만큼 에스타는 당황하고 말았다.
“로시나 전하께서 왜 여기 계십니까?”
“마차가 보여서.”
“…지금 그걸 물은 것 같습니까?”
“그럼?”
로시나가 이상한 말대꾸를 하며 짓궂게 웃었다.
카이네스가 떠나 있는 사이, 황실을 오가며 조금 얘기를 나눈 것뿐인데 그는 부쩍 에스타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눈이 마주치는 시종들이 전부 휙휙 고개를 돌렸다.
“일단 문부터 놓아 주세요.”
황자 전하가 열어 주는 문이라니. 황송함에 기어서 내려야 할 판이었다.
“형님을 만나러 온 길이야?”
에스타가 ‘어떻게 아셨습니까?’라는 눈으로 올려다보자 로시나가 눈썹 하나를 치켜들었다.
“네가 황성에 올 이유가 또 있을까.”
“아.”
이상한 소리를 뱉자 로시나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비웃는 거였다.
“형님의 말대로 정말 눈치가 없구나.”
로시나는 혼자 낄낄거리며 웃고는 에스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님이 계신 곳까지 안내해 줄게.”
“아뇨, 바쁘실 텐데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안 바쁘다는 거 알잖아. 공사다망하지는 않지.”
로시나는 예전에 파티장에서 했던 말을 곧잘 이용하고는 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로시나는 그때부터 에스타가 일부러 아첨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못 알아차릴 줄 알았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었던 에스타는 로시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로시나가 팔짱을 끼게 하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네가 무척 떨떠름해하니 꼭 해 주고 싶어. 망할 페이시아 같으니.”
“…방금 하신 말씀은 그냥 욕이 아닙니까?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농담으로 듣다니. 역시 눈치가 없어.”
로시나가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며 눈을 둥글게 휘었다. 꽤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