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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80/83)

79화

“전하, 귀찮으실 텐데 굳이 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시종들도 멀어졌으니 가 보셔도 괜찮습니다.”

“배려는 감사하나 좋아서 하는 일이다.”

“…뭐가 좋습니까? 산책이요?”

에스타는 나름 머리를 굴려서 대답했지만, 정답은 아니었는지 로시나가 곧 웃음을 터트릴 것처럼 입술을 씰룩였다.

“역시 너는 재밌어.”

결국 로시나는 참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놀려먹는 게 분명한데 왜 웃는지조차 모르니, 에스타는 황당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웃으실 거면 이유를 알려 주십시오. 혼자 웃으시니 제가 너무 어색합니다. 제가 광대도 아닌데요!”

나직하고 빠르게 속삭이자 로시나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검지로 눈가를 쓸었다.

이게 눈물이 날 정도로 재밌는 건가.

“제 천직이 광대였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무슨 말만 하면 웃으시니.”

“인상 풀도록 해.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웃은 거니까.”

“일단 그 굽힌 허리부터 펴시고 말씀하시죠? 조금만 더 얘기하면 바닥을 구르시겠습니다.”

“하하.”

“대체 첫 만남에 까칠했던 전하는 어디로 가신 겁니까?”

로시나가 병약하고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 농담 따먹기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에스타는 책을 통해 봤었지만 정작 맞는 건 하나도 없다. 괜히 마음이 억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건이라도 책대로 흘러가니 다행이라 여기고 싶었다.

“그대가 사람을 잘 길들이나 보지. 나도 형님도 예민한 건 마찬가지니. 아, 한 명 더 있지. 페이시아 소공작 말이야.”

카이네스의 이름에 눈에 띄게 어깨를 흠칫하고 말았다.

로시나의 눈이 짓궂게 빛났다.

“마지막 사람은 아니었던가? 천년의 사랑처럼 굴더니 일 년도 채 가지 않고 식었다지?”

“…아닙니다.”

“정말 아닌 척하고 싶으면 그 꽉 다문 어금니부터 푸는 게 어때?”

로시나가 에스타의 볼을 손가락을 콕 찔렀다.

에스타가 미간을 찌푸리자 로시나가 머쓱하게 웃었다.

“미안해. 그냥 들은 소문을 얘기했을 뿐이야. 난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퍽이나요.”

토라진 에스타가 한 걸음 앞서 걷자 로시나가 잘못한 강아지처럼 그녀의 옆에 바짝 붙어 걸었다.

“진심이야. 난 그대의 불행을 원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페이시아의 불행이지.”

페이시아에 관한 얘기를 할 때면 로시나의 표정이 불쾌하단 듯이 변했다.

“제가 어느 가문과 결혼했는지 잊으셨습니까?”

“여인이 결혼한다고 태어난 가문을 잊는 건 구시대적이야. 자주적으로 살아.”

“…그냥 핑계 아닙니까.”

로시나는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화는 풀렸어? 내가 예민해서 말실수를 했어. 미안해.”

황자 전하로 태어났으면서 뭐 이렇게 사과가 빨라?

좀 기도 세고, 말빨도 있고, 사람 부려먹는 게 익숙하고 해야지.

로시나는 볼수록 낯설었다. 정말 예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데, 왜 수도 전반에 예민하다는 소문이 났는지 의문이었다.

역시나 소문은 믿을 게 안된다.

에스타가 답답한 마음에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 말했다.

“페이시아가 불행해진다고 전하께서 더 행복하신 건 아닐 겁니다. 장담해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전하께서는 생각보다 마음이 여리시거든요.”

“내가?”

로시나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까지 흘렸다.

“네, 전하께서는 다정하고 부드러우시죠. 병 때문에 예민하단 소리 들으시지만 사실 그 소리 들을 만큼 예민하게 군 적도 없으시잖아요.”

갑자기 칭찬하려고 하니 부끄러움이 뒤따랐지만, 계속 페이시아에게 악감정을 구는 것도, 본인 스스로를 예민하다고 보는 것도 싫었다.

“아픈 사람 골려 먹는 것도 아니고, 아프면 부르는 게 당연한데도 의사들에게 예민하단 소리나 듣고.”

로시나는 두 눈만 깜박이며 갑작스러운 에스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이럴 때는 말 잘 듣는 강아지 같았다.

“화내셔도 됩니다. 그건 예민한 게 아니거든요.”

마지막 말까지 다 뱉은 에스타가 짧게 코로 숨을 내쉬었을 때였다.

“그 사람들 다 죽었어.”

“알아요.”

“놀라지 않네?”

“전하께서 그런 게 아니시니까요.”

로시나의 친모인 황후가 깡그리 잡아다 죽여 버렸다. 황자를 모욕한 죄를 엄히 다스린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황후를 욕하지 않았다. 병으로 약해진 로시나를 탓했다.

무능한 황자 때문에 인재들을 잃었다며 슬퍼했다.

“그래. 하지만 황후 폐하가 그런 건 사실이지. 그래서 내가 악독하고 나쁜 사람이 됐고.”

로시나는 그 모든 일이 제 탓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의 슬픔의 깊이를 잴 수 없었었던 에스타는 선뜻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에스타와 눈이 마주치자 로시나가 기쁜 듯이 미소 지었다.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어… 네?”

순간 에스타는 그에게서 루안의 모습을 본 듯했다.

도서관에서 책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던 때와 비슷했다.

놀란 듯 떨리는 속눈썹과 감추지 못하는 기쁨.

묘하게 닮은 얼굴 탓에 더 루안이 떠올랐다.

설마 플래그를 꽂은 건 아니겠지?

소설 속 흔한 클리셰처럼 ‘다 가졌지만 딱 하나, 마음이 빈 남자를 달래 준 여자.’ 이런 건 아니었겠지?

“뭘 그렇게 당황하고 그래? 그냥 고맙다는 말인데.”

태연하게 구는 로시나를 보니 에스타는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공주병이라도 걸린 건가?

‘아냐, 소설을 너무 많이 봐서 그래.’

에스타가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떨쳐냈다.

“형님이 한 말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아. 정말 신기하네.”

“뭐가요?”

“마치 네가 모든 걸 알고 있는 거 같아. 다른 사람들은 내가 죽인 거로 알고 있거든.”

에스타는 속으로 흠칫 놀랬으나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웃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다른 사람들이 눈치가 빠른 건가? 아니면 정말 내가 눈치가 없는 걸까.’

에스타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카이네스에게 진실을 말한 것도 숱하게 의심을 샀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시는 그런 불상사가 없길 바랐다.

하지만 로시나는 자꾸 궁금함을 담은 시선으로 에스타를 쳐다보았다.

“소문 역시 그렇게 났고. 넌 대체 어떻게 안 거야?”

“그… 그거야….”

“마법사들은 원래 그렇게 다들 똑똑한 건가? 눈치는 전혀 없는데 말이지.”

“마… 마…법사라뇨!”

마법사에 대해 어떻게 안 거지? 루안이 말해 준 건가?

에스타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르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시종들이 아주 멀리 서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채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로시나는 에스타가 소리 질렀다는 것에 더 놀랐는지 눈을 평소보다 더 크게 떴다.

“이, 일단 진정하세요. 많이 놀라시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괜찮아.”

로시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볼을 닦았다.

“놀라면 안 되는데 놀라서. 미안.”

“제가 사과해야 하죠. 죄송합니다.”

“아냐, 내가 미안해. 놀랐을 만하지.”

“전하….”

첫 만남에 싹수없다고 욕한 게 미안할 만큼 에스타의 속이 찔렸다.

그녀가 한 걸음에 한 번씩 로시나의 안색을 살피자 로시나가 결국 아세트랄 밀어냈다.

“괜찮다니까. 걱정 그만해. 곧 죽을 사람인 줄 알아?”

“그건 아니지만….”

“내 앞에서 그렇게 소리 지른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이제 보니 네가 처음인 게 많구나.”

순간 찝찝함을 느낀 에스타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참자. 지금은 내가 잘못했고 사과하고 중이다.’

어색하게 미소를 짓자 로시나가 자신의 턱을 움켜쥐곤 흠 소리를 뱉었다.

“정말 광대가 되어 보는 건 어때? 봉급은 많이 쳐 주지.”

“거절하지.”

에스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낮은 목소리가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와 화들짝 놀란 에스타는 따르게 뒤를 돌았다. 고개를 삐딱한 게 한 채 서 있는 루안이 보였다.

“전하.”

“형님.”

서둘러 고개 숙여 인사하자 루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고작 광대가 되다니. 안 될 말이지.”

루안이 한 걸음 두 걸음 보폭을 좁히며 천천히 걸어왔다.

“왜 이렇게 늦나 했더니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었군.”

“죄송합니다.”

“화를 낸 게 아니니 사과할 필요 없다.”

에스타는 어째 형제가 나란히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남색 베스트에 황실 흰 제복을 입은 루안이 머리까지 만져 넘겼다. 잘난 얼굴이 돋보여서 무척 근사했다.

루안은 제가 잘났다는 걸 아는 듯 예쁘게 눈을 접어 웃었다.

“꾸민 보람이 있군.”

뭐라는 거야.

에스타는 속으로 구시렁댔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소공작 부인을 에스코트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제가 더 영광이죠.”

예의상 로시나에게 인사를 하자 그가 떠났다.

“로시나와 너무 친하군. 미혼의 남자와 붙어 있는 모습은 좋지 않아.”

옆에 서 있던 루안이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선 말했다.

“충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에스타가 한 걸음 슬쩍 멀어지자 루안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나는 장차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사람인데 제국민들과 담소를 나눈다고 문제 될 거야 없지.”

그렇게 말한 루안이 에스타 쪽으로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에스타는 루안과의 거리감이 이상하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는데 루안은 끝까지 모르 척하며 에스타에게 다가갔다.

마탑 때문이겠지. 괜한 오해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 예.”

“대답이 불손하군.”

“아닙니다.”

루안은 자연스럽게 앞서 걸었다. 만나기로 약속했던 그의 궁 응접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굳이 그곳까지 갈 필요가 없을 듯해 에스타는 본론을 꺼냈다.

“선물은 그만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거야말로 미혼의 남성과 좋지 않은 모습이거든요.”

조만간 사교계에서 불륜 스캔들이 터질 판이었다. 천년의 사랑이 식은 페이시아 소공작 부인과 여자 보는 눈이 발에 달린 황태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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