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말도 안 돼.
절대 그래서는 안 된다. 카이네스 볼 면목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으니까.
하지만 루안은 빙그레 웃으며 태연히 대꾸했다.
“너무 소문에 연연하지 말아.”
…누가 들으면 남 일인 줄 알겠네.
“내가 그대에게 매달리는 건 사실이잖나.”
루안은 농담하며 싱긋 웃었다.
“마탑 근무는 거절한 걸로 압니다만.”
“근무가 아니라니까.”
“뭐든 상관없습니다. 제 마력이 크다 한들 전 마법을 잘 사용하지 못해요. 그다지 도움 되지 않을 겁니다.”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루안의 눈이 엄한 곳을 향했다. 진지한 구석 하나 없이 내 얼굴을 살폈다.
“흐음. 그보다 며칠 사이에 살이 빠진 것 같은데. 페이시아 공작가의 주방장 실력이 별로인 건가?”
“말 돌리지 마시고요.”
“아니면 식욕이 사라진 건가?”
“…둘 다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자요.”
“그런데 왜 얼굴이 핼쑥해.”
왜 내 얼굴에 신경을 쓰시는데요.
핼쑥하건 말건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데.
에스타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루안은 신경도 쓰지 않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카이네스 또래도 아니고, 무려 페뷰어 또래가 이러니 에스타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애 취급할 수도 없는 나이 아닌가.
“신경 쓰지 마세요. 전 건강합니다.”
뒤로 물러나며 말하자 루안이 다시 앞서 걷기 시작했다.
“다음에는 보석이 아니라 보약을 보내야겠어.”
“제 말을 듣고는 계신 겁니까? 꼭 벽 보고 얘기하는 거 같습니다.”
“선물 보내지 말라고 했던가?”
“네.”
“못 지킬 것 같은데.”
앞서 걷던 루안이 슬쩍 뒤돌아보며 말을 흘렸다.
“그래야 그대가 선물을 돌려주러 날 보러 올 거 아닌가.”
반짝이는 금발이 찰랑거렸다. 아름다운 외모는 사람을 홀릴 만했지만 어쩐지 예쁘다는 생각 말고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해를 살 만한 발언입니다.”
에스타가 단호하게 끊어내자 루안이 의미심장한 소리를 뱉었다.
“흐음, 그럴 수도 있지. 아닐 수도 있고.”
그의 애매한 태도에 에스타만 진땀을 뺐다. 남주도 모자라 서브남주까지 엮인 건 아니겠지?
“선물을 돌려드렸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루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몇 번 더 질척일 줄 알았던 루안은 어쩐 일인지 쉽게 허락해 주었다.
* * *
푸른 제복을 입은 남자가 아카데미 교정을 지나 기숙사 뒤편으로 향했다.
제복을 입은 남자는 나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이네스를 보자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소공작님.”
얼굴에 작은 흉터가 있는 남자는 페이시아 저택에서 기사로 근무하는 자였다. 게다가 에스타가 외출할 땐 비밀리에 함께하는 호위 기사이기도 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눈 뒤 곧장 본론을 꺼냈다.
“에스타는?”
“잘 지내시는 것 같지만, 소공작님이 많이 그리우신 것 같습니다. 가끔 혼잣말하시는 게 다 들릴 정도입니다.”
“…황실에는 자주 가나?”
에스타와 루안이 만나는 게 못내 찝찝했다. 에런 백작만큼 대놓고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루안 역시 에스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아뇨. 그러지는 않으십니다. 다만 황태자 전하께서 저택으로 선물을 자주 보내십니다.”
“무슨 선물?”
처음 듣는 소식에 카이네스의 고개가 돌아갔다.
“주로 귀금속류입니다. 최근에는 목걸이를 보내셨더라고요. 물론 작은 마님께서는 모두 거절하셨습니다.”
기사는 제가 더 뿌듯하단 표정으로 어깨를 폈다.
카이네스는 티 내지 않았지만, 내심 안심했다.
“조기 졸업은?”
“정말 하실 생각입니까?”
카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성적으로는 문제없으시답니다. 방금 교내에 확인하고 온 길이니 틀림없습니다.”
기사가 찝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군 복무 신청만큼이라도 재고해 주시면 안 됩니까? 공작님도 영지에 계신데 저택은 어쩌시려고요.”
“루이셀이 있으니 괜찮겠지.”
기사는 제가 더 답답해져서는 입을 꼼지락거렸다.
“귀족이 군 복무를 하는 게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건 알지만, 소공작님께서는 굳이 안 하셔도 되는 일 아닙니까.”
기사단원들은 이따금 서로 얘기를 나누곤 했다. 소공작님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공작위를 이어받아 가문을 이끌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군 복무 때문에 장기적으로 가문을 비우게 된다면 생기는 부가적인 문제는 한둘이 아닐 것이다.
페이시아 가문은 손이 귀한 탓이다.
아들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일을 나눌 수 있었겠지만, 유일한 후계자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안 가는 게 나을 겁니다. 황실에서 페이시아를 얼마나 경계하는데요. 군에서 공을 세울 기회를 줄 것 같습니까? 오히려 공을 빼앗으려 할 겁니다.”
“상관없어.”
“그게 왜 상관없습니까! 괜한 고생만 하실 텐데요.”
계속되는 기사의 걱정에 그제야 카이네스의 굳은 얼굴이 살짝 풀렸다.
“아예 악담을 퍼붓지 그래.”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는 카이네스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 온 기사였다. 이 기사의 이름은 볼튼으로 투박한 외모를 가졌지만, 잔정이 깊었다.
공작의 명을 거역하면서 카이네스를 챙긴 사람이기도 했다.
“부인의 안위나 잘 보살펴. 문제 있으면 보고하고.”
“소공작님은 잘 지내시는 겁니까? 얼굴이 말이 아닙니다. 의사가 정말 건강에 이상이 없답니까?”
볼튼의 눈매가 축 처졌다.
“정말 작은 마님 뵈러 안 가실 겁니까? 많이 기다리시는데요.”
“서류나 처리해.”
카이네스는 못 들은 척하며 말을 무시했다.
에스타에 관한 보고를 몰래 듣는 주제였지만 에스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잊은 줄 알았는데 트라우마가 여전히 심했다.
‘어렸을 적 일이라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카이네스는 기억만으로 손에 땀이 맺혔다. 주먹을 꽉 쥔 채 숨을 골랐다.
“괜찮으십니까?”
카이네스는 흐릿해진 눈으로 볼튼을 바라보았다.
“시킨 일을 부탁하지.”
그 말을 남긴 카이네스는 빨리 자리를 떠났다. 또 마력이 제어되지 않아 공중에 얼음 결정이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카이네스는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쳤다.
마력이 통제되지 않는 날이면 더는 몸이 커지지 않았다. 다만 제가 있는 곳이 얼기 시작했다.
카이네스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시간이 지나길 바랐다.
“에스타….”
이럴 때 할 수 있는 거라곤 에스타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금세 진정됐을 마음이 더욱 불쾌하게 뛰었다.
‘도, 도련님…!’
큰 짐승의 이빨 자국이 난 채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작은 아이.
악몽 같은 과거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 * *
루안은 제 앞으로 보고된 서류를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쳐다봤다.
“이게 사실인가? 정말 카이네스가 직접 쓴 게 확실해?”
“사실입니다. 저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루안과 보좌관이 어리벙벙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저도 영문은 모르겠습니다.”
보좌관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갑자기 충성심이 솟구치기라도 한 건지. 타지에서 일어난 전쟁에 굳이 참여하겠다고 군 복무 신청을 해? 최전방이라는 걸 모르는 건가?”
“목숨은 건질 수 있다는 자신감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공을 세워 황실을 견제하겠다는 심산일지도 모르지.”
그건 너무 앞선 생각인가.
루안은 카이네스의 군 복무 신청서를 보며 한 손으로는 책상을 반복적으로 두드렸다.
“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말이야.”
“뭐가 말입니까? 사실 저희 입장으로서는 좋은 일 아닙니까? 그 페이시아를 몇 년 동안 수도에서 떨어뜨려 놓을 수 있으니까요.”
페이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마탑까지 세울 계획을 세운 루안으로서는 무척 달가운 연락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그 페이시아가 왜 좋은 먹잇감을 던져주냐는 말이야. 누구 좋으라고.”
“전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게 페이시아의 미끼라는 말입니까?”
“물론 너무 과한 생각이라 여기지만…. 모든 걸 생각해 놔야지.”
루안의 말을 들은 보좌관은 골치 아픈 듯 머리를 저었다.
“군 복무로 얻는 이점도 있으니까요. 쉬운 결정이 아닌 만큼, 황실의 지원도 귀족들의 인정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페이시아로서는 가장 빠른 길이겠죠.”
“그걸 위해 하나뿐인 후계가 작위를 잇는 것도 미루고 군 복무를 한다라.”
흔치 않은 일이긴 하다. 수도는 전쟁 얘기를 잊고 살만큼 평화로웠고, 남 일인 듯 살 수 있는데.
사람들의 인정을 위해 생사가 위험한 곳으로 간다라.
루안은 잠시 고민 끝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뭐, 어찌 됐든 우리에게는 아주 좋은 일이네.”
“그럼요. 페이시아를 견제할 좋은 방법이 또 하나 생겼네요.”
“흐음, 그런가.”
두루뭉술한 루안의 대꾸에 보좌관의 고개가 갸웃 돌아갔다.
“난 다른 걸 생각했거든.”
루안이 의미심장하게 씩 양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에스타를 마탑에 묶어 둘 약점으로 말이지.’
루안은 어쩐지 일이 제게 유리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에스타가 카이네스만큼이나 강력한 마력을 가진 것도, 끈끈했었던 둘 사이가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엉망이 된 것도, 에스타가 사랑하는 카이네스가 스스로 먼 곳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 역시.
“다 잘된 일이지. 페이시아의 충성심을 이번 일로 새로 보게 됐군. 이렇게 충성심 높은 페이시아에게 보답해야겠지.”
“…네?”
갑작스러운 루안의 제안을 따라가지 못한 보좌관이 떨떠름한 반응을 내보였지만 루안은 끄떡도 하지 않고 웃었다.
“페이시아 저택으로 편지를 보내. 아주 화려하게 칙서를 보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