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에스타는 아침부터 들은 충격적인 소식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카이네스가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하고 입대를 한다고? 왜? 이거 거짓말이지?”
손에는 황태자 전하에게서부터 온 칙서가 들려 있었지만 믿기 어려웠다.
조기 졸업이고 입대고,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엘리를 붙잡고 물어 봤자 대답 나올 리 없다는 걸 깨달은 에스타가 방을 박차고 나왔다.
“루이셀이 어디 있지? 집무실인가?”
“아마도요. 일단 진정 좀 하시고, 마님! 작은 마님!”
엘리의 만류에도 에스타는 성난 황소처럼 루이셀의 집무실로 향했다. 일 층 끝쪽 사용인들의 거처가 마련된 반대편에 있는 장소였다.
사용인들은 하얗게 질린 저택의 자은 마님의 등장에 놀라 벽에 붙어 서서 고개를 숙였다.
“루이셀, 여기 있어?”
노크도 없이 열린 문에 홍차를 마시고 있던 루이셀이 당황한 듯 에스타를 바라보았다.
“작은 마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얼굴이….”
“루이셀, 묻는 말에 대답해. 카이네스가 입대를 한다는데 사실이야?”
에스타가 한 손에 황실에서 온 편지를 들고 펼쳐 보였다.
“어서 대답해. 사실이냐고 묻잖아.”
에스타가 몰아붙이자 루이셀이 난감한 듯 눈동자를 떨었다.
“사실이구나. 사실이야. 카이네스가 정말로 군에 입대하기로 했구나….”
뒤늦게 사실을 받아들인 에스타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어쩌면 루이셀의 집무실에 올 동안, 카이네스가 입대한다는 사실이 거짓이라 말해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무너지자 울컥 화가 치솟았다.
“그런데 왜 내게 미리 말하지 않았어? 카이네스가 말해 주지 않으려 했다면 루이셀은 내게 꼭 말해 줬어야지. 내가 카이네스의 소식을 황태자 전하를 통해 들어야 속이 시원하겠어?”
에스타는 눈앞에 보이는 루이셀이 야속했다. 카이네스가 두 번이나 집을 나갔을 때 찾은 사람이 그였고, 입대조차 그에겐 상의한 듯했다.
자신보다 더 믿고 따르는 게 그였다.
그래서 루이셀이 야속했다. 하지만 루이셀보다 카이네스가 더 미웠다.
“두 번을 조용히 넘어갔으면 세 번째는 그러지 말아야지. 내가 언제까지 참아줘야 해?”
에스타가 편지를 죽죽 찢어 루이셀의 발치에 던졌다.
그 순간, 여름이라 사용하지 않던 벽난로에 거대한 불이 타올랐다.
“자, 작은 마님!”
놀란 루이셀이 황급히 에스타를 부르며 두 눈을 꼭 감았다.
불씨는 근처에 위치한 루이셀을 잡아먹을 듯 점점 커져 갔다. 에스타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알아서 하라 그래. 더는 신경 쓰나 봐.”
울컥 감정이 솟구친 에스타가 손등으로 벅벅 눈가를 닦았다.
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에스타는 처참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카이네스는 왜 갑자기 입대를 결정했을까.
일 년이나 더 있어야 졸업할 예정이었고, 그 기간에 잘 풀면 된다고 생각했다.
카이네스는 그런 에스타의 계획을 짓밟듯 조기 졸업한 뒤에 곧장 입대를 신청했다.
그는 저택이 아니라 수도를 떠날 생각인가 보다.
에스타는 방으로 올라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편지를 휘갈겼다.
‘말 한번 해 주는 게 그렇게 어렵니? 저택을 두 번이나 떠났을 때도 화내지 않았고, 널 기다렸어. 그런데 갑작스럽게 입대라니? 도대체 우린 무슨….’
편지를 휘갈기던 에스타의 손이 뚝 멈췄다.
‘우리가 무슨 사인데?’
화가 잔뜩 났던 에스타의 마음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가 마음을 고백할 때는 받아 주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상의 없이 수도를 떠난다고 화를 낼 처지인가.
“그때 받아 줬어야 하는 건데.”
해맑게 웃으며 거절이 당연하다며 고백하던 카이네스가 떠올랐다. 팔이 부러지면서도 서툴게 해 준 목욕이 좋다고 말한 모습도.
그때는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는데, 카이네스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나니 마음이 아팠다.
자신은 고작 마음을 깨닫고 만나러 가는 것도 무서워 반년을 허비했는데.
에스타는 여태까지 쓴 편지를 손에 쥐고 불로 태워 버렸다.
“일단 시작부터 잘못됐으니 다시 시작하자.”
애총 안타까운 마음에서 비롯된 결혼이었다. 게다가 카이네스는 에스타의 마음에 관해서는 전혀 몰랐다.
도망가긴 했지만,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 카이네스는 여전히 자신을 좋아했다.
‘고백부터 하는 거야.’
에스타는 다시 편지를 썼다.
‘조기 졸업한다는 말을 들었어. 졸업 후 군에 입대를 희망했다는 말 역시.
네 결정에 관해 꼭 할 말이 있어. 이번 방학에는 저택으로 돌아왔으면 해. 여기가 네 집이잖아. 네가 정말 만나기 싫다면 내가 나가야지.
그러니 이번에는 꼭 만나서 얘기하자. 네 고백에 대한 대답이야.’
에스타는 편지를 마치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늘 보고 싶었어. 친애하는 에스타가.’
결국 첨부까지 덧대고서야 편지를 끝마쳤다. 에스타는 봉투에 넣어 인장을 찍은 뒤 엘리를 불렀다.
“카이네스에게 전해 줘.”
엘리는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물었다.
“편지를 쓰셨어요? 정말 보내시려고요?”
“보내야지. 대체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는데 대화 한번 없이 입대하게 되면 더 억울할 거 같거든.”
편지를 받아든 엘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공작 전하께서 마음이 떠나신 거면 어쩌죠?”
“마음이 떠나다니?”
“그렇잖아요. 말도 없이 아카데미 입학하시고는 이제는 입대까지 하시고……. 저택을 완전히 떠나겠다는 심산이잖아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공작의 마음이 떠났다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떠들어 대는데요. 제가 다 속상해요.”
순식간에 푸념을 늘어 놓던 엘리가 울상을 지었다.
정작 에스타는 놀라 두 눈을 껌뻑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작은 마님께서 너무 태연하신 거 아니에요? 남자들의 마음은 금방 식는다고요.”
“카이네스는 아닐 거야.”
사랑한다고 고백한 게 얼마 지나지 않았는걸. 갑자기 이상해진 것도 이유가 있겠지. 대화해 보면 풀릴 거야.
마지막 모습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놀란 노루 새끼마냥 도망가긴 했지만.
“작은 마님께서는 너무 태연하세요. 결혼 후에 따로 애첩을 두는 게 흔한 귀족가인데 순진하게 구시면 마님만 상처받으실 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니까.”
에스타는 손을 내젓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찝찝했다.
카이네스가 다른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단 생각을 하니 심히 불편해졌다.
예전엔 아카데미에서 헤른과 사랑에 빠지면 쉽게 보내 줄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이리 쉽게 바뀌다니.
에스타가 엘리의 눈을 피하며 이마를 짚었다.
“일단 편지 전해 주고 와. 이번 방학이 마지막이니 꼭 대화하고 싶단 말도 전해 줘.”
“네, 작은 마님.”
엘리는 마지못해 인사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어쩌면 이 방학이 카이네스와 보내는 마지막 방학이 될지도 모르겠다.
‘바람에 이혼이라….’
카이네스와 계약 혼을 했으니 성립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생각만으로 마음이 서늘해졌다.
‘내가 이기적인 건가.’
마음을 받아 주지 않은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 * *
아카데미 방학을 맞이해 카이네스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딱 보름만이었다.
카이네스의 방학이 짧은 이유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이번 겨울에 할 일은 방학이 아닌 졸업이었기 때문이다.
일 년 빨리 졸업한 탓에 한 학년 많은 선배들과 졸업식을 같이하게 되었다. 그 졸업식 후, 카이네스는 곧장 군에 입대하길 희망했다.
예상치 못한 페이시아의 선택에 사교계는 들썩였고, 모두들 모이기만 하면 페이시아에 관한 얘기를 했다.
소공작의 마음이 변했다, 자꾸만 저택을 떠나려는 이유가 부인 때문이다, 부인의 의부증이 결국 선을 넘은 것이다, 등등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카이네스도 에스타도 사교 행사를 다니는 이가 없으니 소문만 더욱 부풀어져 갔다.
결론은 카이네스가 에스타에게 질렸고, 그녀가 곧 버림받을 거란 말들이었다.
그러던 중 짧은 방학을 맞이한 카이네스가 저택으로 돌아왔다.
정원에 정차한 마차에서 말도 안 되게 성장한 카이네스가 내렸다. 저택을 떠났던 약 2년 전보다 키가 훨씬 자랐고, 장성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 더 날카로워진 이목구비는 공작과 닮은 느낌이 났고, 늘 검을 잡았던 손에는 굳은살이 박혔다.
멀리서 카이네스를 지켜보던 에스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숨을 확 들이켜곤 굳어 버렸다.
다가가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반가웠고 기뻤지만, 어쩐지 어려웠다.
심장이 무섭도록 쿵쿵 뛰었다.
멀리서 사용인들 사이를 가로질러 다가오는 카이네스를 봤지만 손을 흔들 수조차 없었다.
결국 카이네스가 에스타의 앞에 서고 말았다.
짧은 시간 동안 에스타의 앞에 멈춰 섰던 카이네스는 그녀를 잠시 내려다본 뒤 곧장 걸음을 재촉했다.
‘날 무시했어…?’
에스타의 뛰던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착각일 거로 생각해 그를 뒤따랐다.
불안한 감정을 애써 모른 척하며 카이네스의 발뒤꿈치만 보며 걸었다.
키가 커서인지 따라잡기 버거울 속도였다.
“카이네스.”
조심히 그를 불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앞서 걷는 카이네스를 다시 한번 불렀다.
“카이네스.”
“누님.”
누님이라고?
카이네스는 결혼한 후 사용인들의 앞에서 누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늘 부인이라 부르며 존대를 사용했다.
“너무 시끄럽습니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나중에 응접실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죠. 지금은 좀 피곤하네요.”
카이네스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루이셀에게 넘기고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남겨진 루이셀은 황당한 표정으로 딱딱히 굳은 에스타를 바라봤다.
“저, 저택에 오랜만에 돌아오셔서 힘드신가 봅니다.”
아닐 거다. 그런 거로 티를 내는 남자도 아닐뿐더러 전쟁에서도 날아다니는 남자가 고작 마차를 탔다고 피곤할 리가 없었다.
“그런 거겠죠….”
사실을 알고 있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카이네스가 자신에게 이상하리만큼 차갑게 군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