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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83/83)

82화

응접실로 찾아가는 에스타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몇 번을 주저하고, 몇 번이나 다시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문을 열자 정갈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카이네스가 신문을 펼쳐 보고 있었다.

에스타가 들어갔지만, 그는 시선을 주지 않고 여전히 신문을 보고 있었다.

“카이네스.”

“아, 오셨습니까.”

에스타의 부름에 카이네스는 그제야 신문을 접어 옆에 두었다. 조금은 나른한 음색이 꼭 귀찮다는 듯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요.”

사실 에스타는 카이네스가 돌아오자마자 좋아한다고 고백하려 했다. 그의 마음이 변했을 리 없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어딘가 싸늘한 카이네스의 얼굴을 보자 그 마음이 쏙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거절당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에스타는 문 앞에 서서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앉으시죠.”

결국 카이네스가 손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그제야 자리를 찾아간 에스타가 카이네스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멀리서 봤을 때보다 더 멋있어졌다. 이제 정말 어른이라 해도 믿을 법한 모습이었다.

마력이 폭주했던 날에 이성을 잃고 몸이 커졌을 때와 닮아 있었다.

에스타의 눈이 카이네스의 커다란 덩치와 뚜렷한 이목구비, 상처가 생긴 손까지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하실 말씀은요.”

카이네스가 다시 한번 그녀를 재촉했다.

“입대를 희망한다고 들었어.”

에스타는 끝내 본심이 아닌 다른 말을 꺼냈다. 차가운 카이네스를 보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정말 갈 생각이야? 굳이 가야 할 이유는 없잖아.”

“이유가 생겨서요.”

카이네스의 눈이 에스타를 향했다. 똑바로 직시하는 두 눈에 에스타는 뒤늦게 눈을 깜빡였다.

“지금 나 때문에 간다는 소리야?”

카이네스는 긍정하지 않았지만 부정도 하지 않았다.

“왜? 저택에 내가 있어서?”

카이네스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맞은편 의자만 쳐다보았다.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못 본 척하는 것도 화가 났다.

“그러면 차라리 날 쫓아내지그래. 힘들게 군에 들어갈 필요도 없잖아. 곧 계약은 끝이고 이혼하면 되는데.”

“누님이 나가지 않으면요?”

어느새 삐딱해진 카이네스의 고개가 에스타를 향했다.

“소공작 부인이 되었으니 이혼하기 싫으실 수도 있잖아요.”

“너…!”

무례한 말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을 카이네스가 주저 없이 꺼냈다.

“아스텔 제국법상 귀족 부부의 이혼이 쉬운 것도 아닌데, 부부 사이의 합의는 필수라서요. 누님이 반대하면 이혼은 성사될 수 없어요.”

“그럼 넌 이혼을 원한다는 거야?”

에스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카이네스에게 다가가 놀란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카이네스가 등을 의자에 붙이며 멀어졌다.

“네. 우리 그렇게 약속했었잖아요.”

“너… 나한테 고백했었잖아.”

에스타의 목소리가 떨렸다. 카이네스는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잠시 착각한 거였어요. 평생 본 여자라고는 누님밖에 없었으니까. 좀 잘해 준 거로 마음이 흔들렸어요.”

에스타는 그의 말이 거절이라는 걸 깨달았다. 고백하기도 전에 거절당한 것이다.

아카데미에 가 있는 사이, 카이네스의 마음이 변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카이네스의 입을 통해 들으니 충격이 너무 컸다. 당장 자리에 주저앉을 듯 에스타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뭐…?”

“누님께서 하실 말씀은 끝나셨나요? 그럼 이거 받으세요.”

카이네스가 품 안에서 서류를 꺼냈다.

에스타는 제 앞에 놓인 서류에 적힌 글을 믿을 수 없어 카이네스의 옷깃을 붙잡았다.

“정말 이혼하자는 말이야?”

이혼 서류, 그가 내민 서류에 적힌 글이었다.

“곧 제가 성인식을 맞이하는데 이혼하지 않을 생각이셨나요?”

“그건…!”

에스타의 입이 풀을 바른 듯 딱 붙어 버렸다.

자신이 먼저 제시했던 약속 때문에 에스타 스스로도 할 말이 없었다.

“약속했잖아요. 성인이 되면 헤어지기로.”

카이네스의 눈이 지나치게 차분해 보여 에스타는 마음이 칼에 찔리는 듯했다.

무표정한 카이네스의 얼굴이 무서웠다. 자신의 앞에서는 늘 웃던 카이네스였으니까.

카이네스는 에스타의 손을 모질게 뿌리치며 구겨진 옷을 매만졌다.

“전 군에 갈 거고, 누님은 누님의 인생을 사세요. 우린 여기서 끝입니다.”

카이네스는 다 끝났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타는 손에 들린 이혼 서류를 붙잡고 부들거리며 몸을 떨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저택을 떠나기 전까지 자주 마주치지는 않을 겁니다.”

이제 대놓고 피할 거라는 예고까지 날린다.

에스타의 부들거리던 몸이 멈췄다. 숙였던 고개를 올리며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겼다.

“누구 맘대로?”

한껏 불만스러워진 에스타의 얼굴이 드러났다. 한참 커진 신장 때문에 카이네스를 올려다보게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자꾸만 멀어지는 카이네스를 본 에스타는 곧장 그의 가슴 깃을 잡아당겼다.

“넌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지? 나도 다 할 거야. 나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너처럼 마음이 다 사라지면 그때 헤어질 거라고.”

에스타의 눈이 울 것처럼 구겨졌지만 끝내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에스타는 오히려 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소리쳤다.

“내가 왜 제가 없는 저택을 지켰는데! 내가 누구를 기다렸는데!”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에스타가 카이네스의 어깨를 주먹으로 치고 말았다.

“망할 카이네스.”

나지막이 욕을 읊조린 에스타가 손을 털고 방을 나갔다.

졸지에 얻어맞고 혼자 남은 카이네스가 황당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하아…….”

카이네스의 입을 비집고 한숨이 튀어나왔다.

“화내는 걸 보니 어색하지는 않았나 보네.”

카이네스는 급격히 피곤함을 느껴 도로 자리에 앉았다.

맞은 어깨가 아프지 않았으나 묘한 온기가 느껴졌다.

* * *

“망할, 망할, 망할!! 망할 카이네스!!”

에스타는 분이 풀리지 않아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베개를 곤죽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어머, 어머. 작은 마님, 제발 진정 좀 하세요! 왜 그러시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에스타의 행동에 엘리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악! 짜증 나!”

에스타는 어디 속풀이할 곳도 없이 침대 위를 동동 굴러다녔다.

저를 좋아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마음이 바뀌었다며 이혼을 들먹이는지!

“부부 운운할 때는 언제고 마음이 그렇게 쉽게 바뀌어? 진짜 열받아!”

“설마 소공작님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거였어요?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소공작님이 돌아오신다고 좋아하셨잖아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엘리가 걱정스럽게 묻자 에스타의 행동이 멈췄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휴, 베개가 많이 뭉쳤네.”

에스타는 의연한 척 베개를 툭툭 펴서는 침대에 바르게 누워 이불을 덮었다.

“좀 피곤하네. 나 좀 쉬고 싶은데 나가 있을래?”

“대낮인데 무슨 잠을 주무세요? 그랬다간 저녁에 푹 못 쉬세요.”

에스타가 이상하게 굴자 엘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소공작님과 무슨 일 있으셨죠?”

에스타는 속이 뜨끔했지만 모르는 척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게 보인다는 건 알았지만 엘리에게 말할 수 없었다.

최근 베일리 가문에 다녀온 엘리는 부모님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사소한 일만 있어도 자꾸 저택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혼 운운하는 사람이 근처에 한 명 더 있었던 거다.

“그러니까 이런 수모 겪지 말고 저택으로 돌아가자니까요. 백작님도 돌아오시라 말씀하셨고, 정말 괜찮으시대요!”

‘내가 안 괜찮다고.’

에스타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이를 꽉 물었다.

카이네스에게 맘대로 하겠다고 소리쳤지만 에스타는 내심 무서웠다. 카이네스가 받아 주지 않을 텐데, 홀로 애정을 표현하는 건 생각만으로 두려운 일이었다.

“전 몰라요! 작은 마님 알아서 하시든지요!”

흥, 콧김을 뿜은 엘리가 발을 굴리며 방을 나갔다. 어릴 때부터 함께여서 그런지 엘리가 유달리 에스타를 아끼는 경향이 있었다.

에스타 역시 엘리를 가족처럼 여겼다.

“휴….”

에스타는 엘리가 나갔다는 걸 알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쩐지 일이 어렵게 꼬였다. 카이네스가 돌아오면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잘 지내면 될 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막혔다.

“카이네스가 더는 날 좋아하지 않는다니.”

심장이 따끔거렸다. 직접 들으니 자연스럽게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들키기 싫어 화를 버럭 냈지만, 카이네스도 눈치챘겠지.

카이네스는 그다지 인내심이 좋지 않았다. 받아 주는 것도 잠깐이고, 분명 군에 가기 전 이혼할 것이다.

“…결국 원작 따라 가는구나.”

에스타는 다리 사이에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참았던 눈물을 흘리자 방 안의 온기가 훅 올랐다.

깨끗하게 청소해서 더는 불이 나지 않는 벽난로와 촛농이 떨어진 샹들리에에서도 불꽃이 피어났다.

불은 더 이상 몸을 부풀리지 않았다. 춤추듯 흔들거리며 온기를 뿜어냈다.

따스한 온기가 꼭 자신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아서 더 눈물이 났다.

“이혼하기 전에 후회라도 남지 않게 최선을 다하자.”

에스타는 주먹을 꼭 쥐고 다짐했다. 거절당할 걸 알고 고백했던 카이네스처럼 자신도 고백하겠다고.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고백하자. 어쩌면 받아 줄지도 모르잖아.”

헤어지기 전 왜 그렇게 놀랐는지, 왜 그동안 저택에 오지 않았는지, 왜 마음이 변했는지.

에스타는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았지만 지금은 카이네스의 얼굴을 보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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