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어렸을 때의 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대통령. 연예인. 운동선수.
난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이라 믿었다.
“응 엄마. 아직 점수 나와봐야 알 것 같아. 너무 기대하지는 마. 응. 밥은 잘 먹고 있어. 다음에 전화할 게. 끊어.”
거짓말이다.
이번 시험도 떨어졌다.
공시를 준비하지도 벌써 3년째.
나는 노량진의 좁은 고시원에서 얼마 안 남은 청춘을 허비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가 특별하다고 믿지 않았다. 아니, 나 자신을 믿지 않았다.
“뒤질 것 같다.”
곰팡이가 핀 누리끼리한 벽지에서는 담배 찌든 내가 난다.
내가 펴서 나는 냄새라면 억울하지도 않을 텐데, 시발.
하지만 억울해할 시간도 아깝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낡은 노트북을 켜, 항상 하는 게임을 실행했다.
‘크레이 사가’
흔한 RPG게임으로 그럭저럭 재미는 있다. 여러 가지 불합리한 점 때문에 인기도 별로 없지만.
나는 벌써 3년 전부터 매일 최소 30분씩은 했으니까, 썩은 물까지는 아니라도 고인물 정도라고 부를 수 있겠지.
게임 내의 광활한 풍경을 볼 수 있었기에, 그나마 이런 좁은 감옥 속에서 3년을 버텼던 거다.
따라란.
익숙한 음향과 함께 게임에 실행된다.
저번 캐릭은 죽어버렸으니…… 새 캐릭을 키워볼까?
나는 마우스 커서를 ‘캐릭터 생성’ 버튼에 가져갔다.
그리고 그 순간.
커스터마이징을 끝낼 새도 없이.
나는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
낯선 바닥이다.
차갑고 딱딱하지만, 묘하게 기분 좋다. 폐를 채우는 공기도 이상할 정도로 맑다.
미세먼지와 배기가스, 오염 물질로 가득 찬 노량진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청량함이다.
“…….”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자취방은 온데간데없었고, 처음 보는 골목길의 돌바닥 위에 누워 있었다.
확실한 건 이곳이 노량진은 아니라는 거다.
“꿈인가?”
그런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엉덩이에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이. 코를 간지럽히는 서늘한 바람이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현실감 있다.
어쨌든, 꿈이든 아니든. 일단은 돌아다녀 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모르지만,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일어났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뭐야 이 새끼는. 머리가 검은데? 재수 없게 시리. 너 어디서 굴러들어온 놈이야.”
“아니, 그건 됐고. 돈 좀 있냐? 이곳을 지나가려면 우리한테 통행세를 내야 하거든.”
금발에 갈색 눈을 한 서양인이 기묘하다 싶을 정도로 유창한 한국어로 날 협박했다.
손에 든 건…… 설마 칼인가?
뾰족한 무언가가 내 등을 쿡쿡 찔렀다.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반사적으로 답했다.
“도, 돈 없는데요?”
“흠…… 그래? 그럼 일단 우리 아지트까지 같이 가자고.”
“돈이 없으면, 뭐. 몸으로 때워야지. 헤헤.”
살벌한 말을 건네며 사내 둘이 내 양팔을 붙잡았다.
묘하게 익숙한 상황이다.
나는 이런 이벤트를 겪은 적이 있다. 현실에서는 아니고…… 시발!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나는 목놓아 외쳤다.
“상태창! 상태차아앙!”
“뭐라는 거야 미친놈이.”
“시끄러워 이 새끼야! 입 다물어!”
하지만 이어지는 건 무자비한 구타. 축 늘어진 채, 사내들에게 끌려가면서 생각했다.
아무래도 나는 좆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