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은 밑바닥부터
꿈과 믿음이 곧 현실이 되는 곳.
크레이 사가에 어서 오세요.
이곳에서 당신은 밤거리를 배회하는 도적이 될 수도.
황제에게 충성하는 기사가 될 수도.
대마법사가 되어 마탑의 주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양한 직업과 전설적인 무기, 강력한 동료를 모아 대륙을 위협하는 악마를 무찌르세요!
크레이 사가의 소개 문구다.
기본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이기에 유저는 특정 장소와 시각, 선행 조건에 따라 여러 이벤트를 맞닥뜨릴 수 있다.
개중에는 꽤나 불합리하고, 악질적인 것들도 있는데.
이안이 맞닥뜨린 것도 그중 하나였다.
마을의 뒷골목을 배회하다 낮은 확률로 소매치기와 강도를 맞닥뜨리는 이벤트.
운이 없으면 강제로 돈을 뜯기거나 전투에 돌입해 사망할 수도 있고.
행동하기에 따라 폭력 조직의 일원이 될 수도 있다.
아무런 예고도 전조도 없이 게임 속에 떨어진 지 10개월.
이안은 범죄 조직, ‘칼날 형제들’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이번 달에 갑자기 아들이 크게 다치는 바람에 그 약값을 대느라…… 죄송하지만, 돈이 없습니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이안을 향해 연신 굽신거렸다.
보호세라는 명목으로 돈을 대신 뜯으러 온 이안은 인상을 찌푸렸다.
동방예의지국에서 나고 자란 이안으로서는 참으로 불편한 상황이었다.
‘쯧. 이번에도 못 받아가면 개지랄할 텐데.’
고민은 짧았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피차 쥐어짜이는 처진데, 그 정도야 봐 드릴 수 있죠.”
“감사! 감사합니다!”
굽신거리는 노인을 뒤로 하고, 이안은 깍지를 머리 뒤로 끼며 길을 걸었다.
‘제이드 그 새끼가 또 날뛸 텐데. 다른 놈한테서 슬쩍 해야 하나?’
폭력 조직원이 되고 배운 기술이래 봤자 남 주머니를 털거나 하는 따위의 잡기술 밖에 없다.
이안은 적절한 상대가 있나 주위를 둘러봤다.
빨강, 파랑, 초록. 형형색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행인들이 지나다녔다.
의복은 미묘하게 현대적이었고.
주위 건물들은 르네상스와 중세. 그리고 여러 문화권의 건물 양식을 이것저것 섞어 놓은 느낌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참 근본 없다.’
이 비현실적인 배경 덕에 이안은 자신이 떨어진 장소가 게임이라는 걸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꼬르륵.
이안은 허기진 배를 쓰다듬으며, 주머니를 털 만한 사람을 물색했다.
하지만 마땅한 상대가 없었다.
다들 그리 삶이 넉넉지 않은 얼굴이었다.
게임에서 시작의 마을이라 불리는 노른은, 가난하고 볼품없는 곳이었다.
다스리는 영주조차 별 신경을 안 쓸 정도로 말이다.
‘쯧. 그냥 몇 대 맞고 끝내면 되겠지.’
뒷골목에 자리한 아지트. 그 문 앞에서 한차례 심호흡 한 이안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대낮이었지만 술 냄새가 코를 찌르고.
창문은 널빤지 따위로 전부 막혀 실내는 어두컴컴했다.
갑자기 흘러들어온 빛에 사내들의 시선이 전부 쏠렸다.
표정이 좋지 않다.
이안은 곧장 실내를 가로질러 얼굴에 커다란 흉터를 지닌 거구의 사내에게 걸어갔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래서. 한스 노인네가 이번 달에는 진짜 돈이 없어서, 보호비를 못 낸다고 했다고? 넌 그걸 알았습니다아. 하고 온 거고?”
“예.”
이안을 처음 발견해 데려온 장본인인 제이드가 이안을 노려보았다. 무시무시한 기세였지만, 이안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퍽!
“컥!”
제이드의 커다란 주먹이 이안의 배에 박혔다.
아득한 고통에 이안은 바닥을 굴렀다.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올 듯 메스꺼웠지만, 먹은 게 없어서 토할 것도 없었다.
이안은 급히 자세를 잡고 다시 일어났다.
그대로 누워 있으면 더 얻어맞는다는 걸 그간의 경험을 통해 학습한 상태였다.
하지만 제이드는 오늘은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건방진 새끼는 근데 꼭 한 번씩 기어오른단 말이야?”
짝!
이안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얻어맞은 뺨이 얼얼했다.
짝! 짝! 짝!
제이드는 연거푸 따귀를 올렸다.
자신의 화가 풀릴 때까지.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된 이안은 그 시선만은 꼿꼿이 제이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더 열이 난 제이드는 더더욱 강한 힘으로 때렸다.
“푸하하! 오늘도 처맞는 거야?”
“쯧쯧. 머저리 같은 새끼. 하여튼 머리 검은 새끼들은 맞아야 정신 차리지.”
“이야! 형님! 잘 때린다!”
주위에서 술판을 벌이던 조직원들은 그런 모습에 비웃음을 흘렸다.
몇몇은 왁자하게 웃으며 환호를 보냈다.
그렇게 구타가 한참이나 이어지고. 쓰러져 있는 이안에게 침을 퉤― 하고 뱉은 제이드가 이안의 머리를 장화로 지그시 밟았다.
그리고 엄포를 늘어놓았다.
“똑바로 해라. 눈깔에 힘 풀고. 어디 하나 부러트려 버리기 전에. 알아들었으면 꺼져. 더러운 면상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이안은 발로 밟힌 상태에서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제이드는 이안의 머리에서 발을 뗐고, 이안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아지트를 나섰다.
얻어맞은 배와 잔뜩 부은 뺨이 욱신거렸다.
이안은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었다.
“쓰발.”
한국에서 살 때의 몸에서 10년 정도 어려진 상태로 이곳에 온 지 벌써 10개월이 지났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혼란을 겪거나, 방황할 틈은 없었다.
시작할 때 주어지는 무기라거나 소비품, 돈은 전부 빼앗겼다.
검은 머리를 불길하게 여기는 기조 때문에 다행히 노예로 팔리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대우로 조직에서 일해야 했다.
대부분은 힘들거나, 더럽거나, 위험하거나, 아니면 그 모든 것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강도를 만나는 이벤트에 맞닥뜨리다니.’
조우할 확률 자체는 낮지만, 꽤나 흉악한 이벤트였다.
막상 맞서 싸우려 해도, 수십 명의 조직원이 몰려오기 때문에 초반 단계에서 이기기도 쉽지 않다.
괜히 뉴비 분쇄기라 불리는 이벤트가 아니었다.
‘쓰레기 게임.’
크레이 사가를 하는 모두가 외치곤 했던 말.
이안은 그런 유저들을 볼 때마다, 꼬우면 접으라고 말했던 과거의 자신을 저주했다.
‘게임이었으면 그냥 다 컨트롤로 죽이는 건데.’
나름 고인물이라 자부하는 이안이다.
게임이었다면 이런 불합리한 이벤트도 컨트롤을 통해 어찌어찌 해결했을 거다.
하지만 이곳은 게임이지만 게임이 아니었다.
마우스와 키보드로 캐릭터를 움직이는 것과, 직접 몸을 맞대고 싸우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도망갈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일단 돈이 없었다. 돈과 장비 없이 마을을 나섰다가는 객사하기 딱 좋았다.
게다가 마을 곳곳에 있는 조직원이 이안을 감시하고 있었다.
만약 이안이 마을을 나서려는 낌새를 보인다면, 탈출을 시도하기도 전에 저지당할 것이다.
탈출해도 곧장 추격해 올 것이고.
‘더럽게 아프네.’
이안은 뜨겁게 부은 얼굴을 문질렀다. 서럽고 화가 났지만, 지금은 일단 참아야 했다.
이안은 힘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활도 조만간 끝이다. 이 마을 아래에 잠들어 있는 물건만 챙긴다면, 그때부터는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어이 자네!”
아픈 몸을 이끌고 비척비척 걷던 이안에게 누군가가 말을 건넸다.
“이리 와보게!”
“무슨 일입니까?”
막 작업을 끝내고 나왔는지, 얼굴에 숯 검댕을 묻힌 무구점 주인이 이안을 불렀다.
“듣자 하니, 이번에 한스 노인장을 도와줬다지?”
“뭐, 도움이랄 것도 없는 일이었죠.”
“글쎄. 자네 얼굴 꼬라지를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안의 퉁퉁 부은 얼굴을 보고 실실 웃은 주인이 가게 안으로 이안을 끌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처음 자네를 봤을 때는 첫인상이 영 안 좋았어. 머리도 검고, 눈매도 날카로운 게 칼날 형제들 놈들이 드디어 악마랑 손을 잡았다고 생각했지.”
“…….”
이곳의 주민들은 유달리 미신에 민감하다.
검은 머리와 눈동자는 악마의 상징이었기에, 이안은 어딜 가든 멸시와 경계의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주인의 고백에도 이안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번쩍 뜨며, 속으로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이건...... 드디어 이벤트가 뜬건가!’
억지로 모른 체를 하는 이안에게 주인이 말했다.
“그래도, 뭐. 이제는 그게 오해였다는 걸 인정하네. 자네가 주기적으로 쿠리 풀도 선물해줬으니…… 흠흠. 그래서 그간의 도움에 보답하고자, 열심히 만들었지.”
주인은 이안에게 방패를 내밀었다.
참나무를 이용해 둥글게 짜 맞춘 방패였는데, 테두리를 쇠로 보강하고 가죽으로 덮어서 몹시 튼튼해 보였다.
‘드디어 이걸 얻을 줄이야.’
참나무 가죽 방패.
이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성능 좋은 방패로, 게임에서는 무구점 주인의 호감도가 일정 수치에 다다라야 상점에서 구매가 가능해진다.
‘내가 이 아저씨 호감도 올리려고 한 고생을 생각하면…….’
무구점 주인에게 가장 잘 먹히는 선물은 쿠리 풀. 정력에 효과가 있었는데, 그 때문에 뒷산을 온종일 뒹굴어야 했다.
그간의 고생이 떠올라 감격하던 이안은 순간, 뻗으려던 손을 멈췄다.
“아. 음.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아서 혹시 얼마인지…….”
제이드의 주먹 앞에서도 당당했던 이안이 조금은 비굴한 눈빛을 쏘았다.
세상에 돈보다 무서운 건 없었으니까.
“말했지 않나. 그간의 감사라고. 내 특별히 원래 받아야 할 가격에 반값에 해 주겠네. 이 정도면 거의 재룟값만 받는 거야.”
반값이라는 말에 이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정도라면 지불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픈 것도 잊고. 평소 묵고 있는 허름한 마구간으로 빠르게 달려간 이안은 짚더미 아래를 파헤쳤다.
놀란 이와 벼룩 따위가 튀어 오르는 걸 무시하고 아래의 흙을 파내니, 넝마 짝에 가까운 자루 하나가 나타났다.
안에는 반짝이는 동화 십수 닢이 들어있었다.
이안은 서둘러 동화들을 세어 나갔다.
‘열 하나, 열둘…… 딱 맞는다!’
전 재산을 털면 아슬하게 방패값을 지불할 수 있다.
10개월 동안 조직원들의 눈을 피해 한 닢 한 닢 벌어온 피 같은 돈.
하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생활도 끝이다.’
이안은 다시 무구점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품에 거금을 들고 있으니, 괜스레 주위를 경계하게 되었다.
자루 속 동전을 모두 센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맞군. 공들여서 만든 물건이니, 부디 잘 써주게나.”
“예. 요긴하게 써먹겠습니다.”
“그나저나…….”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 주인이, 이안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말했다.
“이 방패는 어디에 쓰려는 건가? 혹시 칼날 형제들 녀석들이 또 어딘가랑 싸움이라도 벌이는 건가?”
“정확히 말하면, 제가 그 녀석들이랑 싸우는 데에 사용할 거죠.”
“……자네 혼자서 말인가?”
주인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이안의 위아래를 훑었다.
“혹시 자네 미쳤나? 아무리 그놈들 아래에서 구르는 게 고되고 힘들어도,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알겠지만, 나중에 보시면 알 겁니다.”
“……말리지는 않겠네. 그래도 안 될 것 같으면 싹싹 빌게나. 자존심이 목숨을 보호해주지는 않아.”
이안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자기가 맞아 죽으면 죽었지, 제이드한테 싹싹 빌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뒤로 이안은 마을 안을 부지런하게 돌았다.
약초상에게 공짜로 약초를 받고, 여관에 가서 마지막으로 든든하게 식사를 해결했다.
지난날 동안 부지런하게 작업을 쳐둔 결과, 주민들은 하나같이 흔쾌히 이안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10개월 동안 어느새 이안은 어엿한 이 세계의 주민이 되어 있었다.
‘이제 진짜 시작일 뿐이야.’
이안은 애용하는 방망이와 참나무 방패를 꼬나쥐고, 지하수로의 입구에 잠시 멈춰 섰다.
지난 기억들이 눈앞에 아련하게 흘러갔다.
게임 속 세상에 떨어지고 10개월.
한창 강해져야 할 때, 너무 긴 시간을 어처구니없게 소모해버리고 말았다.
게임 후반부에 싸워야 하는 강적들과 최종 보스를 생각하면, 참으로 피 같은 시간과 기회들을 날려 버린 셈이다.
하지만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고인물을 자부하는 이안은 아직 충분히 해볼 만하다고, 강하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걸 위해서는 우선 이 지하수로 아래에 잠들어 있는 아이템을 얻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조직에 10개월간 부려 먹힌 대가를 받아내고.
그때부터는 진정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크레이’ 사가라는 게임아 시작되었다고.
‘반드시 살아남는다.’
수백 번이고 다짐해온 생각을 되새김질하며, 이안은 지하수로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이 사라진 자리에 조직원 둘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