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2화 (3/222)

2. 살아남기 위한 도박

노른 안에는 던전이 딱 한 개가 있다.

마을 아래의 지하수로가 바로 그것인데, 멸망한 고대 제국의 구조물이라는 흔하디흔한 설정을 가지고 있다.

거대한 벌레나 쥐 따위의 괴수도 많고, 길도 복잡해 아무도 찾지 않는 던전.

이 던전의 아래에는 막강한 성능을 자랑하는 아이템이 잠들어 있다.

‘성검.’

옛 영웅이 대악마를 베는 데에 사용했다는 성검.

이 성검은 무기 자체의 스펙도 좋지만, 지니는 것만으로도 하룻밤이 지날 때마다 검술의 숙련도나 플레이어의 스탯을 조금씩 올려준다.

너무 사기적인 성능이라 게임이 너무 쉬워지는 터라, 고인물들은 선호하지 않는 아이템.

하지만 이안은 이미 10개월이라는 시간을 날려 버린 터라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 성검이 마냥 얻기 쉬운 것도 아니지.’

마을의 노파에게 성검에 대한 단서를 얻거나, 무구점 주인과 친해져 참나무 방패를 얻거나, 약초꾼을 도와주고 약초를 얻거나.

여러 조건을 만족해야 하지만, 이미 관련 지식이 머릿속에 다 들어있는 이안은 과정의 상당 부분을 생략할 수 있었다.

철퍽.

지하수로 안으로 발을 디디니, 습한 바닥과 끈적한 악취가 이안을 반겼다.

시커먼 구정물이 가운데에 흐르고, 양옆으로 사람 한 명이 간신히 걸을 수 있는 길이 나 있었다.

이안은 한 손에는 횃불을, 다른 한 손에는 몽둥이를, 마지막으로 방패를 등에 짊어지고 걸음을 옮겼다.

‘왼쪽 오른쪽 오른쪽.’

게임상에서는 지하 수로 1층에는 아무것도 튀어나오지 않는다.

그건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인지, 이안은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이미 몇 번이고 사전 답사 겸, 괴수들을 미리미리 정리해둘 겸 와봤던 길이라 익숙한 감각이었다.

어두운 수로를 횃불 하나에 의지에 걷다 보니, 어느새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왔다.

이안은 주저 없이 내려가려다…… 바닥에 귀를 바짝 붙였다.

저벅저벅.

‘누군가 오고 있어.’

멀리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린다.

수로에 서식하는 괴수의 발소리일까?

‘그건 아니겠지.’

1층에는 괴수가 없다. 있었으면 진즉에 한 마리쯤은 마주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발자국은 사람의 것이라는 얘기가 된다.

‘누구지?’

용병이나 모험가, 주민일 가능성은 적다. 이곳은 아무도 찾지 않는 던전이니까.

그렇다면 남은 후보는 하나였다.

‘칼날 형제들 놈들이구나.’

이안은 오늘, 끝을 볼 생각으로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게다가 한 손에는 새로 얻은 방패까지 들고 있다.

항상 이안을 감시하는 그들로서는 무언가 낌새를 느꼈으리라.

‘숫자는 기껏해야 둘이나 셋?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긴다 해도 몸이 성치 못할 거야. 지금은 일단 내려가자.’

추격이 붙었다.

잡히면 아마 좋은 꼴은 못 볼 터다.

이안은 이런 냄새나는 수로의 한구석에 죽어 널브러지는 건 사양이었다.

걸음을 서둘렀다.

‘왼쪽 왼쪽 오른쪽. 그리고 쭉 직진하면 바로 계단이 나온다.’

점점 복잡해지는 길. 하지만 구조는 이미 머릿속에 들어있었다.

미끄러지지 않게 바닥을 조심하며 달리던 중, 이안이 급하게 걸음을 멈췄다.

“크르르.”

붉은 눈에 거대한 앞니.

성인 남성의 절반 정도 크기의 거대한 쥐가 이안의 앞을 막아섰다.

‘언제봐도 크구나.’

이 덩치 큰 설치류는 이 지하수로의 최상위 포식자다.

그 크기만큼이나 힘도 세고, 앞니에 물리면 병에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덩치 탓인지, 다행히 무리 지어 다니지는 않았다.

‘생긴 건 징그러워도, 제법 먹을 만하지.’

이 세계에 떨어지고, 돈이 없어 딱딱한 빵 쪼가리도 제대로 못 먹던 그때.

훌륭한 단백질이 공급원이 되어주었던 고마운 존재다.

제대로 익혀 먹지 않으면 심한 배탈을 앓게 되지만.

“상대를 해주고 싶지만…….”

이미 배는 부르다.

뒤에서 적은 쫓아오고.

괜히 시간을 끌고 싶지는 않았다.

“크륵!”

이안이 가만히 서 있자, 거대한 쥐가 발톱으로 바닥을 긁었다.

‘거리가 있는 상태로 바닥을 세 번 긁으면…… 뛰어온다.’

탓!

이안의 예측과 동시에 거대 쥐가 바닥을 박차 뛰어올랐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갑옷 하나 없는 이안에게는 긁히기만 해도 치명상이었다.

재수 없게 세균에 감염되면, 사제에게 치료받을 돈이 없는 이안은 꼼짝없이 뒈져야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안은 눈을 크게 뜨며 타이밍을 쟀다. 이미 예측하고 있었기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참나무 방패를 들어 올린 이안이 도리어 몸을 앞으로 힘껏 내밀었다.

쾅!

방패가 거대 쥐의 몸통을 밀쳐냈고, 녀석은 그대로 뒤로 밀려 물속으로 빠졌다.

“찍! 찍!”

물에 빠진 거대한 쥐가 찍찍대며 첨벙거렸다.

이안은 그대로 방패를 내려놓고, 양손으로 몽둥이를 들어 쥐의 대가리를 내리쳤다.

배트를 휘둘러 무언가를 타격하는 건 이안의 몇 안 되는 특기 중 하나였다.

빡!

“찌익…….”

머리를 얻어맞은 거대 쥐가 기절했다. 녀석은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기포가 꼬르륵 수면으로 올라왔다.

‘역시 장비 빨이 좋구나.’

평소였다면 훨씬 까다로운 상대였을 터다.

하지만 제대로 된 방패가 하나 생겼다고, 전투가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

‘방패를 미리 사용해 본 것도 나쁘지 않아.’

다른 방패는 몇 번 사용해봤지만, 어쨌든 참나무 방패에 손에 익을 필요가 있었다.

게임에서야 컨트롤 실수 한 두 번 한다고 죽지는 않는다.

게임 오버 당한다 해도, 캐릭이야 다시 키우면 그만이고.

하지만 현실에서 두 번째 기회는 없는 법이다.

특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크레이 사가에서, 과한 대비라는 말은 없다.

‘뒤에 다가오는 소리가 가까워졌어. 서둘러야 해.’

전투의 소음을 들은 건지, 추격자들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안은 미로와 다름없는 복잡한 길을 거침없이 내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수로의 3층.

이안은 걸음을 멈췄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수로의 3층은 위험하다.

괴수는 없지만, 치명적인 함정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속된 말로는 ‘점프 맵’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어쨌든 그 난도가 상당히 높아 초보자들은 몇 번이고 목숨을 잃고는 한다.

“후우.”

이안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게임 속에서의 함정의 위치는 전부 다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게임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10개월 동안 살아온 결과, 이안은 이 세계가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했다.

‘크레이 사가’와 이곳은 대부분 일치한다.

마을이나 건물의 구조도 같았고, 괴수들의 행동 패턴도 습성이나 습관이라는 식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모든 게 일치하는 건 아니었다.

이곳은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고, 그렇기에 게임에서는 시스템적으로 표현되지 못한 것도 전부 있다.

‘그런 것들이 어떤 영향이나 변화를 줄지를 예측할 수 없어.’

예를 들어 이곳에 설치된 함정들. 그 함정들이 시간의 흐름에 노화되어 위치가 미묘하게 바뀌었다면?

이안의 피지컬만으로 피할 수 있을까?

‘힘들겠지.’

이안은 자신의 능력을 절대 과신하지 않았다.

10개월 동안 가혹한 노동과 학대, 그리고 변변치 않은 식사는 이안의 건강을 갉아먹었다.

날아오는 화살이나 머리 위에 뚝 떨어지는 돌을 피할 자신은 없었다.

잠시 갈등.

층 곳곳에 널브러진 해골들이 불길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머뭇거리던 이안은 이내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처음부터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여기서 성검을 얻지 못하면, 쫓아온 추격자에게 죽는다.

설령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시간이 흐르면 결국 최종 보스에게 죽는 미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안은 죽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살고 싶다는 격렬한 의지가 샘솟았다.

그러므로 역설적이지만,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한번 발을 들이면 멈추지 말아야 해. 그게 오히려 가장 쉬워.’

이미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해봤다.

함정의 위치는 전부 외우고 있다.

이제 그 함정의 위치가 게임과 같다는 데에 도박을 걸어볼 수밖에 없다.

‘처음은 왼쪽에서 날아오는 화살.’

이안이 한 걸음을 내딛자, 예측한 지점에서 화살이 맹렬하게 날아왔다.

눈으로 보고 피하기에는 너무 빠른 속도.

이안이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퉁!

참나무 방패는 화살을 무리 없이 튕겨냈다.

하지만 기뻐할 세는 없다. 이안은 바로 다음을 준비했다.

‘3초 뒤에 오른쪽 방향에서 갈고리. 그리고 갑자기 바닥 아래가 꺼지면서 창날이 튀어나온다.’

갈고리는 방패로 튕겨내고, 바닥이 꺼지기 전에 힘껏 뛰어넘었다.

그 뒤로 날아오는 화살과 비수. 바닥에 깔린 함정.

갑작스레 물속에서 튀어나오는 갈고리. 머리 위로 쏟아지는 돌무더기.

그 모든 걸 머릿속 기억과 예측에 의지해 피해낸다.

가끔 화살 따위가 피부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면, 머리카락이 쭈뼛 서곤 했다.

하지만 머릿속 지식과 함정 위치가 일치한다는 게 확실해지자, 이안은 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두 걸음 앞으로 전진하고 잠시 정지…… 얼마 남지 않았어. 방패의 내구도도, 체력도,’

오늘 새로 산 방패는 벌써 너덜너덜했고, 숨도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수로의 통로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였다.

‘저게 마지막이야.’

통로의 끝에서 반짝이는 쇠뇌.

웬만한 괴수도 일격에 꿰뚫어 버릴 정도로 두꺼운 화살.

통로가 워낙 좁기에 피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이안은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제발 버텨줘라…….’

무구점의 다른 방패는 저 화살을 막아낼 수 없다.

하지만 유일하게 이 참나무 방패만은. 단 한 번이라 해도 저걸 막아낼 수 있다.

적어도 게임 시스템으로는 그랬다.

쐐액.

두꺼운 화살이 공기 찢는 소리와 함께 날아왔다.

이안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양손으로 참나무 방패를 들어 올렸다.

쾅!

어마어마한 충격이 팔에 전해지고, 화살이 방패의 표면을 꿰뚫었다.

“이런 씨……!”

머리를 향해 가까워져 오는 화살에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화살이 이안의 얼굴을 한 뼘 앞두고 그 움직임을 멈췄다.

무구점 주인이 만든 방패는 끝까지 제 역할을 다 한 셈이었다.

“후우.”

그제야 이안은 이제는 방패라 부르기도 민망한 물건을 바닥에 내려놨다.

손은 아직도 저릿저릿했고, 심장도 세차게 뛰었다.

오늘만 몇 번의 죽을 위기를 넘겼는지 모르겠다.

‘자주 해먹을 일은 아니구만. 시작 마을의 던전인데, 좀 쉽게 만들어주면 안 되나?’

마을의 지하의 성검을 얻으려면 요구되는 게 너무 많았다.

방패도 얻어야 하고, 미로의 길 찾기도 해야 하고, 함정을 뚫어낼 컨트롤도 필요하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은 아니기에, 대부분의 유저들은 그냥 나중에 성장하고 다시 와 함정을 몸으로 맞아가면서 뚫는 걸 선호했다.

애초에 이 던전의 설계 자체가 고인물들을 위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대세.

이런 걸 초보자 마을 아래에 넣어 수많은 뉴비들을 절망시켰으니, 개발자의 악의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씁. 게임 좀 잘 좀 만들지.’

이안은 비좁은 통로를 지났다. 자그마한 공동이 나왔고, 그 가운데에 투박한 검 한 자루가 바닥에 꽂혀 있었다.

게임에서의 외양과 완전히 같은 모습이었다.

‘이것만 있으면 이제 쉽게 해먹을 수 있겠지?’

마른 침을 삼킨 이안은 조심스레 성검의 손잡이를 잡았고.

그와 동시에 의식이 끊겼다.

***

“여기는…….”

이안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주위 풍경이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어둡고 습하고 냄새나는 곳에서…… 익숙한 풍경으로.

“내 방?”

노량진의 좁디좁은 자취방.

이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돌아왔다니…… 아니, 꿈이었던 건가?”

지난 10개월의 고생은 단순히 악몽이었던 건가?

‘그래. 공시 떨어지고 스트레스도 받았으니, 악몽을 꿀 법도 하지.’

이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마냥 기뻤다.

그토록 싫어하던 담배 찌든 냄새도 지금은 기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한껏 올라갔던 기분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곤두박질쳤다.

“안타깝게도 그 반대에요. 이쪽이 꿈이에요.”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지금껏 그의 인생에서 봐왔던 모든 이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 침대 한편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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