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설마 이게 끝이라고
눈처럼 새하얗지만, 창백하다는 느낌은커녕 오히려 생기가 느껴지는 피부.
태양 빛을 머금은 듯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이 허리께에 내려오고, 머리와 동일한 색의 눈동자에서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힘이 느껴졌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현실에서든 티비나 인터넷 등의 매체에서든 수려한 외모를 가진 사람을 참으로 많이도 보아왔다.
하지만 눈앞의 이 여인에는 그 누구도 미치지 못했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비현실적인 광경.
게다가 여인의 주위에 흐르는 묘하게 신비로운 분위기는 이안인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들었다.
“역시 꿈인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맞아요. 눈치가 빠르시네요. 여기는 당신의 꿈속. 정확히 말하면 의식을 시각화한 공간이라 해야 하려나요.”
청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맑게 웃는 여인.
혼란스러운 상황에 얼굴을 연거푸 쓸어내린 이안이 슬며시 물었다.
“어, 음. 이곳이 꿈이란 건 알겠습니다. 예. 그런데 당신은 혹시…… 몽마입니까?”
얼간이 같은 어조로 물었지만, 이안으로서는 꼭 확인해야 했다.
꿈속에 멋대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니, 대체 몽마가 아니라면 누구란 말인가.
하지만 이안의 질문에 고개를 흠칫한 여성은 짐짓 화난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휘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실례네요. 마(魔)를 베는 걸 일생의 업으로 삼았던 사람에게 몽마냐니.”
“아, 그렇다면…….”
“당신이 잡은 투박한 검은 그렇게는 안 보이겠지만 성검이라 불리는 물건이에요. 그리고 저는 그 성검의 전대 주인이었고요.”
성검의 주인.
이안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그렇다는 건…….”
“네. 200년 전, 악마를 무찌르고 전설이 되어 버린 대영웅. 제가 바로 그 클로딘 이네스랍니다. 편하게 이네스라 불러주세요.”
자신만만하게 설명한 이네스는 턱을 살짝 들어 이안을 살폈다.
이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되어 못 참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네스의 기대는 빗나갔다.
‘이네스 클로딘? 처음 들어보는데…….’
이안은 ‘크레이 사가’의 고인물이라 자처하지만, 사실 세계관이나 스토리에 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았다.
대사나 지문 따위가 나오면 건너뛰기 버튼을 연타하곤 했다.
이른바 ‘스킵충’이라 불리는 타입.
공시를 준비하는 와중에 쓸데없는 정보를 머릿속에 구겨 넣고 싶지 않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덕분에 히든 피스의 위치나 보스의 약점과 패턴, 육성법이나 퀘스트에 대해서는 둘둘 꿰고 있지만 스토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다소 기형적인 플레이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200년 전의 대영웅? 알든 모르든 당장 게임하는 데에 상관이 없는데, 이안이 알고 있을 리가.
“저, 저를 모른다고요?”
이네스의 눈이 땡그래졌다.
마치 이안이 자신을 모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는 듯한 태도다.
아무리 2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도 세상을 구했는데…….
그러다 조금 당황한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음. 그럴 수 있죠. 어쨌든 반가워요.”
“예…….”
이네스의 환한 인사에 이안은 떨떠름하게 인사했고.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
침묵.
둘은 어색하게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이네스가 검에 갇혀 있던 시간이 200년. 당연히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200년 만이다.
홀로 갇힌 시간 동안, 그녀는 이 상황을 종종 상상하곤 했다.
이곳에 찾아와 성검을 잡은 누군가와 말을 하는 상상.
이네스는 누가 찾아오든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그에 관해 얘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곤 했다.
이안이 그녀의 모험담을 궁금해한다면, 밤을 새서라도 얘기할 수 있엇다.
하지만 이안이 자신을 모른단다.
굴욕도 굴욕이지만, 이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200년 동안 혼자 있던 시간은 그녀의 대화 능력을 상당 부분 앗아가 버렸다.
그렇게 계속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자, 그제야 이안은 본인의 실수를 알아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토리도 대충 알아두는 건데.’
악마를 무찌른 대영웅이라 하니, 어쨌든 이곳의 세계관에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안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제가 상식이 짧아 몰라뵙네요. 그래도 악마를 쓰러트렸다니. 어, 음. 대단하네요. 그게 그렇게 쉽게 죽는 게 아닌데.”
물론 게임의 이야기다.
주기적으로 부활하는 대악마는 크레이 사가의 최종 보스로, 그 공격 패턴이나 스펙은 혀를 내두르게 된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아주 아주 지랄 맞은 놈이지.’
대악마라는 말에 이네스의 고개가 휙 올라갔다.
“어? 대악마에 대해 잘 아시나요?”
“알만큼은 알죠.”
“그런 것 치고는 꼭 직접 상대해봤다는 말툰데…….”
이네스가 이안의 두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너무 아름다우면 도리어 부담스럽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이안은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이네스의 눈빛에는 그걸 허락하지 않는 힘이 있었다.
“신기하네요.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은데…… 그렇다면 진짜 대악마를 상대해봤다는 건데 어떻게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거죠? 당신도 혹시 영웅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고…… 또 직접 상대해봤냐고 물으면 상당히 애매한 문제인데…….”
이안은 말을 흐렸다.
‘게임에서 상대했다고 말해야 하나? 그러면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부터 하나하나 다 설명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런 건 나중에 설명해드릴게요. 그것보다…… 제가 지금 당장 힘이 필요하거든요?”
“꽤 다급한 어조네요?”
“지금 당장 제가 죽게 생겨서 말이에요.”
게임 대로라면 성검을 가지면 두 가지 스킬이 생겨난다,
검술의 숙련도를 올려주는 ‘영웅의 검술’.
근력이나 체력, 기타 능력치가 향상되는 ‘축복받은 신체’.
둘 다 하룻밤이 지날 때마다 숙련도가 조금씩 올라간다는 특징이 있다.
스토리에 큰 관심이 없던 이안은 성검이 어떤 원리로 힘을 주는지 몰랐었다.
그냥 막연히 ‘성검이니까 그런가 보다’하고 생각했을 뿐.
‘그런데 사실 검에 영웅의 혼이 깃들어있었다고?’
그렇다면 힘을 주는 주체가 누군지는 명확했다.
힘을 주는 건 성검 그 자체가 아니라 눈앞의 자칭 대영웅.
이네스가 전수해주는 것이리라.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했다.
힘을 달라고.
그런 이안의 태도에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던 이네스가 말했다.
“좋아요. 제 힘과 기술, 경험. 모든 걸 전수해드릴게요. 다만 조건이 있어요.”
“……뭔가요.”
한 호흡 뜸을 들인 이네스가 비장하게 말했다.
“이곳에 갇혀 있지만 저는 느낄 수 있어요. 200년 전 제가 쓰러트린 악마가 부활해, 본신의 힘을 되찾아간다는 걸.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세상은 다시 그림자에 휩싸이고 말 거예요. 그러니…… 당신이 그 악마를 쓰러트려 주세요. 그러면 저는 당신께 기꺼이 제힘을 드리겠어요. 이게 제 조건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네스는 조심스레 이안의 눈치를 봤다.
이네스는 자신의 부탁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를 잘 알았다.
대악마를 쓰러트리라니.
대륙에서 가장 명예로운 기사라도. 이름 있는 용병이라도. 저 마탑의 주인이라도 쉽사리 승낙할 수는 없으리라.
200년 전에도 수많은 사람이 악마 토벌을 기치로 내세웠고, 그중에 악마의 앞에 발을 디딘 이는 이네스와 그 동료들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모두 죽거나, 마음이 꺾여 여정을 포기했다.
하물며 눈앞의 이안은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몸에 조금 단련한 흔적이 보였지만, 일반 병사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악마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정도.
그렇기에 이네스는 부탁하면서도 거절당할 걸 각오했다.
‘만약 거절한다면…….’
그렇다면 또다시 홀로 검안에 깃들어 기약 없는 시간 동안 기다릴 수밖에.
이미 마음속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이네스에게 이안이 말했다.
“알았어요.”
“네?”
“알았다고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
‘어차피 그거 못 잡으면 다 죽는다.’
게임상으로 6년이 흐르면 최종보스가 등장하고, 최종보스를 이기지 못하면 게임 오버로 끝이 난다.
대륙의 모든 인간이 그 목숨을 잃으니, 도망칠 수도 없다.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이안에게는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네스에게는 그 모습이 충격이었다.
‘망설이지도 않고 즉답이라니…….’
그렇기에 이네스는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엄청 힘든 여정이 될 거예요. 죽을 위기도 많을 거고…… 잘 모르시고 승낙하신 거면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보세요.”
“아뇨. 말했잖아요. 악마에 대해서는 잘 아는 편이라고. 그건 제가 잡아야 해요.”
‘크레이 사가’에는 수많은 캐릭터가 있다. 개중에는 대륙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실력자도 있다.
하지만 게임에서 최종보스를 사냥하는 건 언제나 플레이어의 몫이었다.
게임에서 그랬다면, 여기서도 그리할 것이고. 그 말은 이안이 직접 악마를 토벌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안의 흔들림 없는 대답에 이네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예전의 나는 어떻게 대답했었지?’
먼 과거에도 이네스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어떻게 대답했던가.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이렇게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답하지는 않았으리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무지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강한 사람이야.’
수백 년의 시간 동안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와 주기를 기다렸다.
가끔은 무거운 고독 속에서 자신마저 잊어버리는 게 아닐가 하는 두려움도 들었다.
하지만 이안은 결국 자신을 찾아주었고, 자신과 함께 해주겠다고 말해주었다.
기쁜 마음에 이네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하얀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걸어간 이네스가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내밀어진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이안도 급하게 손을 내밀어 마주 잡았다.
“이안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음…… 이네스님.”
“편하게 대해주세요. 이안.”
둘은 그렇게 한참이나 손을 마주 잡고 있었다.
이네스의 손은 무척이나 따뜻하다고. 이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
이안은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안은 운 나쁘게 불량배들에게 잡혀, 강제로 노동을 하고 있다는 거네요?”
“예.”
“그리고 그들이 지금 추격해 오고 있는 거고요. 과연. 잘 알겠어요. 확실히,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네요.”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이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오른손에는 투박한 성검이 들려 있었다.
“제힘을 전수받으면 근력이나 체력, 동체 시력이 좋아질 거예요. 뭐, 단기간에 줄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지만요.”
“그럼 어서…….”
“하지만 검술을 비롯한 기술과 지식들은 얘기가 좀 달라요. 무의식에 제 지식과 재능이 자리 잡아 도움은 주겠지만, 결국에는 이안이 직접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해요.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밤 꿈속에서 저한테 직접 배우는 거겠죠.”
“아…….”
이안은 성검의 설정을 생각했다.
하룻밤을 잘 때마다 능력치가 오르고, 검술등의 스킬의 숙련도를 올려주는 아이템.
‘그러니까, 그게 그냥 올려주는 게 아니라. 매일 꿈속에서 직접 수련한다는 설정이었던 거야?’
처음 안 사실이었다.
그냥 편하게 날로 먹으려 했는데, 사실 직접 몸으로 배워야 한다니.
생각보다 이안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이네스가 황급히 말했다.
“제, 제 검술이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그렇지만 대륙의 다른 어떤 검술에 밀리지 않는다고요? 전성기에는 제게 가르침 한 번 받으려고 온 대륙에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네에…… 그렇군요.”
“아무튼 제대로 봐주세요!”
이네스는 검을 들고 자세를 잡은 뒤,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그러면서 크게 외쳤다.
“흐읍!”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내리치는 내려 베기.
분명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검에 문외한인 이안이 보기에도 예사롭지는 않았다.
“모든 검술의 가장 기초이자 마지막이 되는 동작이에요. 잘 보셨나요?”
“네.”
“그럼 됐어요.”
“네?”
“이것만 제대로 해도 마을 불량배 따위한테는 질 일은 없으니까요.”
그러고는 이네스는 손뼉을 부딪쳤다. 짝―하는 소리와 함께 이안의 의식이 날아갔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둡고 습한 수로의 안이었다.
“설마 이게 끝이라고?”
황당해진 이안은 한동안 멍하니 주저앉아있었다.
이안
불길한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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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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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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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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