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4화 (5/222)

4. 비켜

이안은 몸 이곳저곳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확실히 뭔가 달라진 것 같긴 한데…….’

여기까지 오며 누적된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기분은 묘하게 상쾌했고,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심장도 좀 더 힘차게 뛰는 느낌이었다.

[주변에 있는 적당한 돌멩이를 주워서 한 번 던져보세요.]

갑작스레 머릿속을 울리는 이네스의 목소리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상황을 파악했다.

‘……대화도 가능한 거군요. 꿈속에서만 보는 건 줄 알았는데.’

[혹시…… 불편하신가요?]

머뭇거리며 묻는 말에 어찌 싫다고 답할 수 있겠는가.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그보다 제 생각을 읽을 수 있네요?’

[제가 지금 있는 곳의 이안의 머릿속인데, 당연히 읽을 수 있죠. 어쨌든 빨리 돌멩이를 하나 던져보세요.]

이안은 순순히 이네스가 시키는 대로 돌멩이를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벽을 향해 힘껏 집어 던졌다.

퉁!

“으악!”

예상보다 더 빠르게 날아간 돌멩이가 벽에 부딪힌 뒤, 그러고도 힘을 잃지 않고 튕겨 나와 이안의 얼굴 옆을 지나쳤다.

10개월 동안 가혹한 학대와 노동에 시달려온 몸으로는 절대 낼 수 없는 힘.

‘축복받은 신체’를 통해 신체 능력이 오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체감하니 기분이 남달랐다.

“대, 대단하잖아.”

[그보다 저는 이안이 더 대단한데요? 방금 원하는 지점에 빠르고 정확하게 돌을 던졌죠? 혹시 투석을 전문적으로 배운 건가요?]

“예전에 야구라는 운동을 했었는데…….”

[야구…… 요?]

“아무튼, 전문적으로 공 던지는 걸 배운 건 맞습니다.”

생전 처음 듣는 단어에 이네스는 의문을 표했고, 이안은 대충 설명을 얼버무렸다.

아무래도 더 얘기하고 싶지 않은 주제 같았기에, 이네스도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정도 근력이라면 동네 싸움 수준에서는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원래 기술이라는 것도, 체급에서 크게 밀리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러려나요?”

힘이 센 건 확실히 싸움에 있어 중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숫자가 많다는 것.

자기보다 많은 숫자를 상대하려면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잠깐 떠올랐지만 이내 빠르게 지워 버렸다.

‘뭐, 일단 부딪혀 봐야지.’

당장 이쪽으로 다가오는 추적자들이 있다.

그 숫자는 많지 않았으니, 새로 얻은 힘을 시험하기에는 제격일 것이다.

***

‘칼날 형제들’은 이안을 느슨하게 풀어주면서도 감시의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이안에게 최소한의 자유가 보장되는 건 이안이 그동안 보여준 행동도 있거니와, 이 마을에서 이안 같은 일반인이 탈출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근처 마을까지는 최소 나흘은 걸어야 하고, 이는 곧 도망치려면 준비가 많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바깥에는 괴수와 맹수들이 돌아다니니, 어차피 혼자서 나가봤자 짐승의 한 끼 식사가 될 뿐.

그래서 어느 정도 풀어주었는데…….

그런 이안의 행동이 요즘 좀 이상하다.

이건 이안의 감시를 떠맡은 칼날 형제들의 두 막내, 칼로스와 로디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저 새끼 좀 이상하지?”

“……응.”

원래 이안이 오지랖을 부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아픈 노파의 허드렛일을 대신 해주거나, 무구점 주인에게 풀을 캐서 준다거나, 약초상을 도와준다거나.

원래는 그냥 오지랖이 넓겠거니. 검은 머리치고는 심성이 고운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르다.

이안은 친분이 있는 모든 주민을 한 번씩 만났고, 무언가를 분주히 준비했다.

마치 어디론 가로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처럼.

게다가 이안의 손에는 못 보던 방패가 들려 있었다.

방패는 엄연히 무기다.

데리고 다니는 노예가 새 무기를 얻었다?

이건 좌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너는 대장께 상황 설명해. 나는 놈이 도망가는지 지켜보고 있을 게.”

“알았어.”

로디를 보낸 칼로스는 착잡한 심정으로 이안을 감시했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차라리 도주를 시도한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이안의 낌새를 보면…….

어쩌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든다.

‘저런 질 좋은 방패를 녀석이 자력으로 구할 수 있을 리 없어.’

주민들의 협조를 얻은 걸까?

그렇다면 더 큰 문제다.

주민들에게 보호세를 뜯어내 살아가는 폭력 조직은, 안 그래 보여도 주민들의 민심을 신경 쓰기 마련이다.

‘만약에 주민들과 저 녀석이 붙어먹었다면…….’

생각을 정리하던 와중.

이안은 지하수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보고하러 떠났던 로디가 다시 돌아왔다.

“우리들끼리 알아서 알아보고, 무슨 일 생기면 다시 보고하라는데?”

“……그럴 줄 알았다.”

“까맹이 녀석은 어디 갔어?”

“수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안이 수로를 들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아니, 과할 정도로 많이 들어갔다.

그걸 의심스럽게 여긴 둘이 이안에게 수로를 들어가는 이유를 물어보자, 이안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어떻게 딱딱한 빵 쪼가리만 먹으면서 살겠습니까? 고기도 먹어야지.

그렇게 말하며 이안은 구운 쥐의 큼직한 꼬리를 야만스럽게 물어뜯었다.

그 혐오스러운 광경에 역시 머리 검은 놈들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칼로스는 진절머리를 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일부러 의심을 안 사려고 연기한 것 같단 말이지.’

칼로스 생각을 정리하며 수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야! 어디가!”

“아무래도 불안해서 따라가 봐야겠다. 분명 뭔가 꾸미고 있어.”

“씁.”

이 지하수로는 썩 들어가고 싶은 공간은 아니다.

거대한 지네나 쥐 따위의 괴수도 많고, 길도 미로처럼 복잡한지라 실종자들도 많았다.

그런데도 본능이 어서 쫓아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칼로스와 로디는 계속해서 의견을 교환했다.

“그 녀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응? 까맹이 말하는 거야? 그거야 뭐…….”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로디가 말했다.

“처음에는 그냥 기분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지. 생긴 것도 그렇고, 눈깔에 힘 팍주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그래도…… 지금은 꽤 대단하다고 생각하려나?”

“대단하다?”

“응. 제이드 그 새끼…… 아니, 대장께 그렇게 얻어맞았으면 알아서 빌빌 길 만도 한데 끝까지 눈에 힘을 안 풀잖아. 그건 뭐랄까, 나 같은 사람은 못 하는 거니까.”

칼로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녀석은 노예지만, 절대 비굴하게 행동하지는 않지. 자존심이 강한 것 같던데.”

“응. 그리고 일 같은 걸 시키면 착착 잘하는 거 보니 머리도 좋고 센스도 있어. 싸움 벌어질 때 칼받이로 앞에 세우면 진짜 악착같이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도 보이고. 도움이 필요한 주민들을 잘 도와주는 거 보면, 성격이 아주 나쁜 놈도 아니고.”

좋은 머리와 악착같은 성격.

장시간 이안을 지켜봐 온 칼로스와 로디의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솔직히 내가 그놈을 상대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하인이나 노예가 아니라, 같은 형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생각했었어. 우리도 슬슬 막내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고.”

깡도 있고 머리도 좋고 의외로 약자들을 상대로는 마음씨도 좋다.

조직에 이만큼 잘 어울리는 인재가 있을까.

하지만 칼로스는 그 너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그런 놈이 아무런 의미 없이 행동할까?”

“뭐?”

“그렇게 머리 좋고, 깡도 있고, 살려는 의지도 강한 새끼가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겠냐고.”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는지, 로디의 눈이 크게 뜨였다.

미끄러운 바닥에 넘어질 뻔한 로디가 황급히 말했다.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

“내 추측은 이래. 우선 놈은 시간을 들여서 주민들과 친해진 거야. 그리고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냈겠지. 그리고 지하수로를 내려가는 거야.”

“지, 지하수로는 왜 내려가는 건데?”

“나도 모르지. 이 아래에 뭔가 대단한 게 잠들어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앉은뱅이 노파가 가끔 하는 이야기 말하는 거지? 하지만 그거 듣고 혹해서 지하수로로 내려간 놈들 중 반은 허탕치고, 반은 돌아오지도 못했는데…….”

“그렇지.”

하지만 칼로스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이안은 다른 놈들과는 다르다.

녀석은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차근차근 행동하고 있었다.

‘칼날 형제들’은 이안을 그저 성격 나쁘고 띠껍지만, 쓸 만한 놈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칼로스가 경고했음에도 심드렁하게 대응할 뿐이었다.

‘멍청한 새끼들.’

만약 칼로스가 대장이었다면, 적어도 이 두 명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거, 어쩌면 더 쫓기보다 도망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불안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들기도 했다.

수개월 동안 관찰해왔던 놈이, 과연 어떤 사고를 칠지.

“으…… 길이 엄청 복잡한데? 놓쳐버렸어. 여기서부터는 따라가지 않는 게 좋겠는데?”

“어차피 다시 올라오게 되어 있어. 우리는 여기서 기다린다.”

지하수로의 2층은 미로다. 뭣 모르고 돌아다니다가는 길을 잃기에 십상이다.

그렇기에 둘은 더 쫓아가는 대신,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막아섰다.

‘놈은 뭘 믿고 그냥 간 거지? 지도라도 있는 건가?’

이 허름한 미로에도 과연 지도라는 게 있을까?

만약 그런 게 존재한다면, 그걸 찾아낸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둘은 하염없이 기다렸다.

옆의 로디는 언제 거대 쥐나 지네 따위가 튀어나올까 겁이 나 사방을 경계했다.

하지만 운이 좋은 건지 습격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손에 든 횃불이 반 정도 타 버렸을 무렵.

저 멀리서 발걸음이 소리가 들려왔다.

“온다.”

칼로스와 로디는 우선 무기부터 뽑았다.

칼로스는 팔뚝만 한 길이의 한 손 검을. 그리고 로디는 양아치들이 즐겨 사용하는 몽둥이와 단검을 각각 손에 들었다.

걸어오던 이안도 칼로스와 로디를 알아봤다.

‘역시 추격자는 이놈들이었나?’

자신의 감시를 맡은 조직의 막내들. 이안은 그 둘을 이렇게 평가했다.

‘칼로스는 묘하게 감이 좋고 머리가 똑똑한 놈. 로디는 조금 멍청하지만, 발이 빠른 녀석.’

칼로스는 이안의 몸을 한차례 훑더니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못 보던 검이 생겼군 그래?”

“아래에서 주웠어.”

대답하는 이안의 태도도 차갑다. 칼로스는 그 반응에서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하지만 입은 멈추지 않았다.

“아까 들고 다니던 방패는?”

“망가졌다.”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를 물은 거야.”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허세인지. 아니면 진짜로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칼로스는 더더욱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태도를 보면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그 검이 그렇게 대단한 물건은 아닌 것 같고…… 잘 모르겠군.”

말을 하던 칼로스가 스리슬쩍 자세를 잡았다.

언제라도 틈이 생기면 기습할 생각이었다.

이안은 검집도 없이 억지로 벨트에 걸어놓은 성검을 꺼낼까 고민하다, 평소 애용하는 방망이를 꺼냈다.

‘역시 이게 아직은 손에 익어. 저 둘은 뭐랄까. 별로 죽이고 싶지도 않고.’

칼로스와 로디랑은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둘은 조직에서 유일하게 이안을 때리지 않은 놈들이었고, 로디는 가끔 멍청한 얼굴로 먹을 걸 주기도 했다.

‘그래도 나름 오래 봤다고, 정이 든 건가?’

죽이는 게 깔끔하지만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익숙해져야 하지만, 익숙해지지 말아야 할 게 살인의 무게겠지요.]

이네스의 모호한 말을 이안은 바로 이해했다. 이안은 이미 몇 번의 살인을 경험했었다.

타 조직과의 분쟁. 대열의 가장 앞에서 칼받이로 떠밀린 이안은 살기 위해 악착같이 몸부림쳐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몇 명이 죽었다.

이안이 직접적으로 죽이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에 일정 부분은 이안의 몫이었다.

그때의 기분은……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안은 검 대신 몽둥이를 들었다.

몽둥이에 잘못 맞아도 인간은 죽을 수 있다. 그래도 검으로 베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리라.

“비켜.”

비키라고 말했지만, 비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로디와 칼로스가 누가 먼저랄 세도 없이 땅을 박찼다.

[기억하고 있죠? 내려 베기. 그거면 충분해요.]

‘알겠어요.’

걸음이 가벼운 로디가 조금 더 빠르게 이안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본래라면 눈으로 따라가기도 힘겨웠을 거다.

하지만 지금.

로디의 움직임은 마치 느리게 재생된 영화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이네스에게서 받은 힘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내려 베기는 인간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간단한 동작이다.

검에 문외한인 일반인에게 검을 자연스럽게 휘둘러보라 하면, 열에 아홉은 내려 베기를 사용한다.

하지만 내려 베기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위력이 강한 동작이었다.

그렇기에 내려 베기는 모든 검술의 기본인 것이다.

“흐읍!”

이안은 기합과 함께 몽둥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 사선으로 내렸다.

전수받은 이네스의 지식과 재능덕에, 어떻게 휘둘러야 할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으응?”

생각보다도 훨씬 빠른 이안의 움직임에 로디는 당황했다.

로디는 몽둥이의 양 끝을 두 손으로 잡아 앞으로 내밀었다.

일격을 막은 뒤, 곧바로 반격을 가할 셈이었다.

하지만 두 몽둥이가 서로 맞부딪혔을 때, 그런 계산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빡!

몽둥이를 들고 있던 로디의 몸이 균형을 잃고, 형편없이 바닥에 넘어졌다.

잠깐 튕겨났다가 다시 내리친 이안의 몽둥이가 그대로 로디의 어깨에 클린 히트.

“억!”

우득.

어깨가 부러진 로디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억―하는 비명과 함께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뭐야 시발.”

언제나 냉정을 잃지 않고, 머리 굴리는 게 장점이던 칼로스도……. 이때만큼은 입을 크게 벌린 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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