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지긋지긋하던 참이었다
이 세상에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인종은 없다.
하지만 역사의 어느 순간부터.
귀족과 평민을 막론하고, 아주 낮은 확률로 돌연변이처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인간은 악마의 후손이라 불리었다.
놈들은 사악하고 비겁하며 남의 것을 탐낸다.
놈들은 교활하다.
신체는 형편없고, 머리에는 음모만이 가득해 제대로 된 일을 하지도 못한다.
악의 섞인 편견, 미신에 가까운 믿음. 하지만 이곳에서는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
그렇기에 칼로스는 방금 벌어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체 뭐가 일어난 거지?’
로디가 형편없이 당했다. 로디가 원래 저렇게 약했던가?
절대 아니다.
로디는 조금 맹한 대신, 그만큼 힘이 세고 발이 빨랐다. 조직에서도 전투 능력만으로는 순위권에 들 정도다.
근데 당해 버렸다.
그것도 그냥 당한 게 아니라, 단 일격에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져 어깨까지 부러졌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건 하나였다.
‘괴력으로 내리쳤다?’
칼로스는 쉬이 이해할 수 없었다.
검은 머리를 가진 인간에 대한 편견을 차치하고, 이안은 1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학대당했고, 제대로 된 영양 섭취도 하지 못 했다.
칼로스는 이안이 수로에 들어와 자주 쥐나 벌레 따위를 잡아먹던 걸 기억했다.
그것들이 뭐 얼마나 맛있고, 영양이 풍부해 일부러 잡아먹겠는가.
이안은 그만큼 굶주렸고, 고달픈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힘은 대체 무슨…… 아.’
칼로스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악마랑 계약을 했다면?’
그렇다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 갑자기 생긴 괴력.
쥐나 벌레를 잡아먹는 괴악한 식성.
이런 음침한 지하 수로 깊은 곳에 악마가 잠들어있다면 그것도 그럴듯하다.
수로로 들어간 사람들이 실종된 것도, 악마에게 잡아 먹힌 것이라면…….
추측은 곧 확신이 되었다.
칼로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안에게 말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렇지, 악마랑 계약을 한 건가?”
“……뭔 소리야?”
“시치미 떼지 마라. 그런 괴력을 갑자기 얻는 게 비상식적인 일이라는 걸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이런 곳에 악마가 숨어 있었다니…… 품에 매고 있는 그건 저주받은 검인가? 과연 불길하게도 생겼군.”
멋대로 터무니없는 얘기를 늘어놓는 칼로스를 보며 이안은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네스의 반응이 격렬했다.
[이번엔 몽마도 아니고 악마라니……! 더는 참을 수 없어요! 그냥 이곳에서 죽이죠!]
‘아까는 살인의 무게에 익숙해지면 안 된다면서요…….’
칼로스는 결연한 얼굴로 검을 꼬나쥐었다.
“악마를 이 위로 올려보낼 수는 없어.”
이놈을 위로 올려보내면 대체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까.
비록 힘없는 일반인들의 돈을 갈취하며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한다.
그걸 위해 받는 보호세니까.
물론, 상대하는 이안으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비장해? 너 원래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닥치고 덤벼라! 으아아아!”
칼로스는 그리 외치며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낮게 한숨을 내쉰 이안은 다시 방망이를 들어 올렸다가…… 아래로 내리쳤다.
방망이가 떨어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속도가 빠르다는 건 공격이 더 먼저 닿는다는 뜻이고, 그 말은 칼로스가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피하거나, 막거나.
‘저건 못 막아!’
로디도 일격에 보낼 정도의 괴력이다. 그의 힘으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칼로스는 피하는 걸 선택했다.
후웅.
발끝과 턱만 살짝 당겨, 몽둥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밀려난 바람이 칼로스의 얼굴을 때렸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피, 피했다!’
거의 죽을 뻔했지만 어쨌든 피했다는 것.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을까?
칼로스는 곧장 검을 내질러 이안의 배를 꿰뚫으려 했지만…….
빡!
이마에 전해지는 충격과 함께 뒤로 넘어갔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아야…….”
이안은 새빨개진 머리를 부여잡았다. 일단 본능적으로 박치기를 날리긴 했는데, 근력이 세졌다고 이마까지 단단해진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안은 흰거품을 물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칼로스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이안? 내버려 둘 건가요?]
“제 손으로 죽이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업어서 지상까지 데려다줄 의리는 없죠.”
만약에 이렇게 기절해 있다가, 지네나 거대 쥐 따위가 온다면 그건 칼로스와 로디가 운이 나쁜 것일 뿐이다.
“그럴 확률은 적겠지만요.”
이미 몇 개월에 걸쳐 수로에 있는 괴수의 숫자는 착실히 줄였다.
지하 3층을 내려갈 때까지 거대쥐 한 마리를 조우한 것 빼고는 괴수가 한 마리도 안 나온 게 그 증거였다.
이안은 로디와 칼로스를 수로의 계단으로 옮겨준 뒤, 그 주머니를 뒤졌다.
그런 이안의 행동에 이네스가 기겁했다.
[…….지금 뭐 하는 건가요?]
“……주머니를 털고 있는데요?”
[아니, 진짜 뭘 하는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는데요.]
아이템 루팅은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이안이 도리어 되묻자, 이네스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예롭지 못한 행동이에요.]
“세상 물정을 모르시네. 원래 뒷골목 사람들은 다 이렇게 삽니다. 이네스님도 한 3일 정도 굶어보면 그런 말 안 나올걸요?”
[…….]
실제로도 이네스는 있는 명문가의 자식이었고, 살면서 돈이 부족해 곤란함을 겪었던 적은 없었다.
세상 물정을 몰랐던 것도 맞고.
그렇기에 이안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교단이나 황궁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면, 돈 정도는 넘치도록 지원해줄 거예요.]
확실히.
교회가 내주는 퀘스트를 깨나가는 루트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들을 선택할 거였으면 진즉에 했어야 했다.
10개월을 날려 먹은 지금, 이안에겐 선택지라는 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돈이고. 그동안 일해온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챙겨줘야죠.”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겠어요.]
이네스는 마지못해 납득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흠…….”
당장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이대로 마을을 벗어나거나, 아니면 칼날 형제들의 아지트로 가거나.
후자는 꽤나 위험한 선택이었다.
‘내가 얻은 힘이 강력하긴 해. 하지만 한 번에 스무 명 정도를 상대할 수 있을까?’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숫자다. 싸움 좀 한다고 거들먹거리던 용병도, 불량배 수십이 우르르 달려들어 밟아 버리면 당해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안은 결코 자신을 과신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힘을 얻었어도, 한 번에 수십 명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었다.
[불량배라고 해서 어중이떠중이들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크나 보네요. 스무 명이면 지금의 이안의 실력으로는 조금 힘들 수도 있겠어요.]
이안은 고민했다. 안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이대로 도망치는 게 나았다.
게임이었다면 아무 고민 없이 과감하게 행동해도 다시 살아나면 그만이지만, 이곳은 엄연히 현실이다.
죽으면 끝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떠난다고 안전할까?
일단 확실한 건, 칼날 형제들은 이안을 추격할 것이다.
쫓기면서 언제 있을지 모를 습격에 두려워하느니, 먼저 기습을 거는 게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이안의 마음을 기운 건…….
‘생각할수록 열 받네?’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제이드에게 강제로 잡혀 오고 두드려 맞은 날.
노예 상인에게 팔려다가 실패하고 두드려 맞은 날.
칼받이로 던져놓고 살아남으니까 두드려 맞은 날.
그리고 어제는 두드려 패고 머리에 침까지 뱉었다.
누리끼리하고 걸쭉한 녀석이었다.
아픈 건 참을 수 있다. 힘든 것도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만큼은 절대로 참을 수 없다.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놈들의 아지트를 칠 겁니다. 혼자서.”
[……진심이에요?]
“놔두면 추격자를 꾸릴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제가 당하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이안의 선언을 곱씹던 이네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용기라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봐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긴, 그러니까 제 제안을 받아들인 거겠죠. 아마 위험할 거예요.]
“알아요. 그리고 딱히 정정당당하게 갈 생각은 없어요.”
일대 다수의 싸움은 불리하다.
하지만 그건 정직하게 싸워줄 때의 이야기다.
이안은 이 게임의 고인물이다.
다수의 적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서둘러야겠네요. 이 둘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 전에요.”
로디와 칼로스의 몸을 발로 툭툭 건드린 이안은 위를 향해 빠르게 달려나갔다.
목적지는 칼날 형제들의 아지트. 중간에 딴 길로 세지는 않았다.
이미 준비는 끝났으니까.
‘마침내 이날이 왔구나.’
이안은 기묘한 기분을 느끼며 아지트를 올려다보았다.
뒷골목에 있는 2층짜리 목조 주택.
창문은 혹시 있을 습격을 대비해 널빤지 따위로 막혀 있었다.
칼날 형제들이 이 마을을 완전히 장악한 건 불과 얼마 안 됐고, 제이드는 언제나 외부에서 찾아올 경쟁자를 경계했다.
‘불을 지를까?’
처음에 생각한 건 목조 건물에 불을 붙이는 거였다.
잘만하면 연기로든, 불로든 조직원들을 한 번에 몰살시킬 수 있다.
‘게임에서는 구현되지 않았지.’
게임에서는 시작의 마을에서, 건물에 불을 지르는 상호작용은 구현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불을 지를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현실이니까.
하지만 이안은 그러지 않았다.
‘자칫하다가는 옆 건물에 불이 옮겨붙을 수도 있어.’
그리고 딱히 이안은 조직원들을 전부 몰살할 생각이 아니었다.
제이드한테만 복수해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다.
‘불은 아니라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게 있지.’
이안은 품에서 자루를 꺼냈다. 안쪽에는 검푸른 풀뿌리가 가득 들어있었다.
[이건 뭔가요?]
‘블루 허브입니다. 지독한 향을 내뿜죠.’
원래는 지하수로에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괴수들이 몰려 들었을 때, 놈들을 쫓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다.
‘게임에서 블루 허브를 사용하면 주위 NPC가 공격받았다고 판단하고 적대적으로 돌변했었지…….’
그리고 그 말은 블루 허브의 냄새가 공격받았다고 판단할 정도로 지독하다는 뜻이다.
이안은 블루 허브를 자루에서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부싯돌을 부시 쇠와 힘껏 부딪혔다.
탁! 탁!
몇 번 부딪히며 튀긴 스파크가 블루 허브에 불을 붙였다.
검은 연기와 함께 지독한 향이 피어올랐다.
오래되어서 상한 우유의 냄새와 거대한 짐승의 배설물 냄새를 섞어 놓은 듯한 악취.
빠르게 코를 틀어막은 이안도 헛구역질할 정도로 지독한 냄새였다.
이안은 서둘러 블루 허브를 쥐어 아지트의 문을 열어 안쪽으로 집어 던졌다.
반응은 빠르게 나왔다.
“으악! 퉷! 뭔 냄새야!”
“우욱! 창문 열어! 빨리!”
“창문 다 막았잖아 멍청아!”
“일단 나가!”
입구로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안은 문에서 한걸음 떨어져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을 때, 주저 없이 몽둥이를 내려쳤다.
“일단 하나!”
“끄악!”
가장 선두에서 달려 나오다 이안에게 얻어맞고, 오른팔이 부러진 사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사내의 몸에 발이 걸린 다른 조직원들이 우르르 넘어졌다.
‘일대 다수가 불리하면, 일대일로 만들면 그만이야.’
지형을 이용하고, 상황을 통제해 일대일을 만든다.
비록 그 수법은 조금 비겁할지라도, 꽤나 효과적인 방법에 이네스는 감탄을 흘렸다.
[요령이 좋다고 해야 하나…… 싸움을 잘 안다기보다는, 이기는 법을 잘 아는 느낌이네요.]
빡! 또 하나의 조직원이 몽둥이에 얻어맞아 기절했다.
안 그래도 좁은 입구가 조직원들의 몸으로 더욱 좁아진다.
안쪽에서는 서로 나가겠다고 난리를 쳐대니,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런 혼란을 틈타 이안은 조직원들을 하나하나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혼란이 가중된다.
‘이 페이스로만 간다면 의외로 무난하게 끝날 수도 있지만…….’
그때였다.
쾅!
입구를 나가려던 조직원 하나의 몸이 저 멀리 튕겨 나갔다.
다른 조직원들을 마구잡이로 내던지고 나온 거구의 사내가 구역질을 하며 이안을 노려보았다.
“우욱. 어떤 새낀가 했더니 네놈이었냐?”
코를 부여잡으며 헛구역질하는 제이드를 향해 이안이 비웃듯이 말했다.
“아무리 무식한 새끼라도 그렇지, 부하들을 그렇게 내던지고 나오면 쓰나.”
“……이 새끼가 드디어 미쳤구나.”
일그러졌던 제이드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언젠가 이러지 않을까 싶었지. 흐흐. 그동안은 나름 쓸모가 있어서 살려뒀었는데, 이제 그 더러운 면상 볼일도 없겠군.”
게임 속에서는 ‘괴력의 제이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내가 그리 말하며 손을 뚜둑― 하고 풀었다.
두 눈에서는 살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눈만 봐도 얼마나 잔인한 성정인지 잘 알겠네요. 사람을 아주 많이 죽였을 거예요. 그것도 다 자기보다 약자들이었겠죠.]
‘정확한 평가십니다.’
봐줄 생각도, 이유도 없는 악인. 이안은 벨트에 걸어놓은 성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서늘하고도 묵직한 감각이 손에 전해졌다.
“기나긴 모멸과 핍박의 시간…… 지긋지긋하던 참이었다.”
긴 시간 동안 당해오던 수모.
이제는 갚아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