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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7화 (8/222)

7. 질질 짜지 마라 꼬맹아

이네스는 이안의 정신 속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좁은 방이었다.

양팔을 뻗으면 양 벽에 동시에 손이 닿았다.

창밖을 보면 거대한 건물들이 우후죽순 솟아 있어, 볕조차 제대로 들지 않았다.

‘이곳은 이안의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공간이겠죠.’

이안이 미치광이가 아니라면, 이곳은 이안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장소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네스는 대륙 어디에서도 이런 도시를 본 적이 없었다.

‘가끔 이안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죠.’

게임이라거나, 스킬이라거나. 이안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를 중얼거리곤 했다.

이네스는 이안이 여러 의미로 특이한 존재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 답답한 방안은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네요. 가축들도 이런 곳에서는 살지 못할 텐데…….’

성검에 200년 동안 갇혀 있던 이네스에게도 노량진의 원룸은 편한 공간이 아니었다.

이안이 원래 살던 장소가 이런 끔찍한 장소였을까.

아니면 이안의 정신이 이렇게 협소해질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다는 걸까?

한숨을 내쉰 이네스는 손잡이를 쥐어 밀려고 했다.

방 밖에는 분명 이안의 기억으로 통하는 공간이 있을 터였다.

따끔.

“아얏.”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게다가 손잡이에 박힌 가시에 찔려, 손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아직 거기까지 마음을 열지는 않았다 이건가요?’

손의 상처는 금방 아물었다. 이네스는 조금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침대에 앉았다.

‘시간이 해결해줄 일이야.’

이네스는 이안에 대해 생각했다.

쓰러진 상대의 주머니를 터는 모습. 비겁한 수를 써 이기는 모습. 가끔씩 나오는 상스러운 말.

자비를 베푸는 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적이고 가차 없는 모습.

이네스가 지금껏 어울려 본 적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10개월의 뒷골목 생활이 그를 이렇게 만든 걸까? 아니면 원래 성격이 이런 걸까.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절대 악한 사람은 아니야.’

이안이 마을을 떠나려 할 때, 마중 나오러 온 사람들. 이네스는 그 사람들의 눈빛을 기억했다.

따뜻함과 아쉬움이 가득한 눈.

만약 이안이 악인이었다면, 사람들에게 그런 반응은 나올 수 없었다.

‘나와는 완전히 다르지만, 그렇다고 악인은 또 아닌 사람.’

성검은 외로움이라는 이름의 감옥이었다. 이네스는 200년 동안 그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이안은 그녀를 감옥에서 꺼내주었다.

이네스는 자신을 꺼내 준 이가 악인이 아니라는 것에.

그리고 함께 어려운 숙명을 짊어진다는 것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

옆 마을까지는 빨리 걸어도 나흘.

산세가 험해 그리 평탄치 않은 여정이었지만, 이네스가 가진 지식 덕에 큰 어려움을 마주하는 일은 없었다.

지루하고 힘든 여정이었다. 할 거라고는 잡담밖에 없었기에, 이네스와 이안은 거의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이안은 다른 세계에서 갑자기 끌려왔다는 거군요?]

“예.”

[그리고 그 게임인지 뭔지, 아직 저는 그 개념을 잘 이해할 수 없지만.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는 거고요.]

“전부는 아니고, 큰 흐름 정도는 알고 있죠.”

[…….거기서 이안은 이 세계가 멸망하는 미래를 보았군요.]

정확히 말하면 멸망을 봤다기보다는 게임 오버가 뜬 거지만.

사실상 같은 거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야 얼추 이해가 되는군요.]

며칠에 걸친 대화 끝에 이네스는 이안이 어떤 곳에서 살다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떻게 수로에 숨겨져 있는 성검을 찾았는지.

왜 그렇게 이안이 흔쾌히 악마를 토벌하기로 승낙했는지도.

[설령 미래를 알고 있다고는 하나, 악마를 토벌하겠다는 결심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겠죠. 오히려 이안의 지식은 악마를 토벌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저도 제 모든 기억과 힘을 다해 도와드리겠어요.]

“그러면 저야 고맙죠.”

산을 하나 넘자, 저 멀리에 펼쳐진 성벽이 보였다.

마을이라기에는 크고, 도시라기에는 살짝 아쉬운 규모의 마을이었다.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건가요? 이안의 말대로라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5년 하고 조금인데.]

“우선 성검의 조각을 모아야겠죠.”

[성검의 조각이요?]

이안은 무구점 주인에게 받은 검집을 툭툭 건드렸다.

“조각을 다 모아서, 온전한 성검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지금의 성검은 당연히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

성검의 조각을 하나하나 모으다 보면, 그 검에 실린 힘이 점점 더 강해진다.

당연히 성검으로부터 부여받는 힘도 강해진다.

[성검의 조각을 모은다라…… 확실히, 지금의 제 힘과 기억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어요. 조각들의 위치는 이안은 다 알고 있다고 했죠?]

“예.”

[하지만 알고 있어도, 그걸 다 회수하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어려워도 뭐 어떻게 하겠어요. 어차피 실패하면 다 죽은 목숨인데.”

이미 10개월이라는 시간을 버린 이상, 안전한 길은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위험을 감수하는 수밖에.

잠시 말을 삼킨 이네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성검은 대륙 곳곳에 퍼져 있어요. 그중 어느 것부터 회수하러 갈 건가요?]

“아카데미로 갑니다.”

한 치의 주저 없는 대답. 이곳에서 아카데미라 부를 만한 곳은 한 군데밖에 없다.

코르디스.

온 대륙의 인재들이 몰려드는 제국 최고의 교육기관.

그곳의 보물 창고에는 성검의 조각 하나가 잠들어 있다.

이안은 그곳에 들려, 반년 안에 성검 조각을 빼낼 생각이었다.

[…….]

이안의 계획을 듣고, 잠시 머뭇거리던 이네스가 곤란한 어조로 얘기했다.

[코르디스는 어퍼 클래스와 사이드 클래스로 나뉘어 있는데…… 아마 이안이 말하는 건 어퍼 클래스를 지칭하는 거겠죠?]

“음, 그런 게 있는 줄은 몰랐지만. 아마 그럴걸요?”

[그러면 이안은 코르디스에 입학하기는 좀 힘들 것 같은데요?]

***

신분과 배경보다는 능력을. 코르디스의 교훈이다.

하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그것도 귀족에 한해서 하는 말이죠. 아니…… 조금 다르려나.]

“평민은 못 들어가나요?”

[아뇨. 능력만 있으면 평민이든 귀족이든 무조건 입학 가능한 게 코르디스가 내건 기치니까요.]

“근데 왜 힘들다는 건가요?”

[음, 이걸 어디서 설명해야 할지……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능력 순으로 서열을 내세우면 평민보다는 귀족 자제들이 훨씬 더 뛰어난 자질을 갖는 게 일반적이에요.]

혈통. 교육. 영양 섭취.

자질이든, 실력이든, 잠재력이든 귀족의 자제들은 평민을 압도한다.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그랬다.

[처음에는 어퍼 클래스에도 몇몇 재능있는 평민들을 뽑고는 했어요. 하지만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더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귀족의 아이들에 비해 평민 아이들은 뒤처졌어요.]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이네스는 최대한 사견 없이 객관적인 사실만을 말하려 애썼다.

귀족 출신인 자신이 이런 말을 하면, 이안이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작 이안은 아무런 감흥이 없었지만.

[그래서 애초에 평민들을 안 뽑는 쪽으로 변해갔어요. 그렇다고 실력주의를 내세웠는데, 아예 안 받으면 그렇잖아요? 그래서 시험을 보는 거죠.]

귀족들은 추천장이나 신분만으로도 프리패스.

하지만 평민들을 대상으로는 엄청난 난이도의 시험을 치르게 한다.

웬만한 수준의 천재는 입학하지도 못하게 하도록.

‘확실히. 코르디스는 이상하게 입학 난이도가 높았지.’

이안이 기억하기로 코르디스의 입학시험도 게임에서는 꽤나 어려운 구간 중 하나였다.

귀족 캐릭터들이랑 친해진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지금의 이안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정확히 그 시험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이안이 통과하기는 힘들 거라고 봐요. 그러니 지금은 우선 다른 곳을 들르는 게 낫지 않을까요?]

타당한 의견이었다.

아직 이안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무조건 무조건 들어가야 해요.”

‘크레이 사가’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시간의 흐름이 있다는 것.

시기에 따라 만날 수 있는 인물과 이벤트가 크게 차이가 난다.

2년 차의 코르디스에는 잠재력이 뛰어난 캐릭터들이 많이 입학한다.

‘엔드급 성능을 가진 캐릭터들도 있으니, 미리 친해져야 최종 보스를 깰 때 수월해.’

[엔드…….급 성능? 그게 뭔가요?]

“……그런 게 있습니다.”

어쨌든 다른 길로 틀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이안이 아무 생각 없이 부딪힐 작정은 아니었다.

어떻게 시험을 통과할지, 이미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전까지는 지금보다 더 성장할 필요는 있겠죠.”

[그래요. 당장 마을이 보이니, 이제는 한동안 수련에 열중할 수 있겠네요!]

왜인지 묘하게 신난듯한 이네스의 말에, 이안은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

코르디스의 입학식은 1월이다.

12월까지 신입생을 받는데, 지금이 벌써 11월 초니, 코르디스까지 찾아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그리 여유롭지는 않았다.

‘웨스트 리버’ 마을에 도착한 이안은 우선 여관을 찾았다.

나흘간의 강행군에 이안은 심적으로도 체력적으로 지쳐 있었다.

‘언제 괴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역시 혼자서 다니는 건 빡세.’

이안은 지친 몸으로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일단 무언간 뜨끈한 걸 먹고, 한 잠 늘어지게 자고 싶었다.

“어서옵…….쇼.”

이안의 입장에 경쾌히 인사하던 여관 주인이 말을 흐렸다.

여관 주인은 이안의 머리카락과 눈을 이리저리 쳐다보았다.

“이곳 사람은 아니군. 여행자요?”

“예.”

“여행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데?”

“그건 당신이 알바는 아니죠.”

주인은 이안에게 무례하게 말했기에, 이안도 퉁명스럽게 답했다.

눈매를 좁힌 주인이 이안에게 말했다.

“식사라면 모르겠지만, 방을 찾는 거라면 안타깝게 되었소. 지금은 빈방이 없는지라.”

이안은 조금 당황했다.

적어도 게임에서 여관이 꽉 차 잠을 못 자는 이벤트는 한 번도 없었으니.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런 것 치고는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

“대부분의 고객이 용병이라, 저녁 시간대가 아니면 한산하지.”

“그렇다 치더라도 이 넓은 여관에 방 하나가 안 남았다는 건 말이 된다 생각해요?”

“뭐, 그렇게 되었소. 정 자고 싶으면, 마굿간에서 하루 정도는 재워줄 수 있소. 그게 싫으면 나가시오.”

사실상 꺼지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었다.

이런 식의 실랑이를 겪어본 적 없는 이네스는 신음을 삼켰다.

[끙. 이거 아무래도…….]

‘예. 저는 손님으로 받기 싫겠다 이거겠죠.’

이 세계의 주민들은 유독 이런저런 미신에 민감하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만…… 어쨌든, 검은 눈과 머리를 한 사람에 대한 적의가 생각보다도 더 심한 모양이었다.

‘시작의 마을은 약과였다 이건가.’

[지금이라도 다른 여관을 찾아보죠.]

‘아뇨. 다른 곳도 비슷할 거예요.’

이안은 여관 주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심상치 않은 기색에 여관 주인은 닦고 있던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얼굴에 서린 조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자, 이제 어떻게 할까.’

이안의 마음엔 두 가지 축이 있다.

현대인이자 크레이 사가의 고인물인 이안.

그리고 10개월 동안 뒷골목에서 구르던 이안.

상황에 따라 그 둘을 적절히 조절하는 게 중요했다.

‘지금 필요한 건…….’

이안은 여관 주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인은 그 손을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뭐요?”

“악수나 하겠어요?”

“하, 이것 참.”

노골적인 도발. 속 보이는 행동.

여관 주인은 그나마 붙이던 존칭도 집어치우고, 껄렁하게 말했다.

“꼬맹아. 웃어줄 때 썩 꺼져라. 볼기짝을 두들겨 맞고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악수나 한 번 하자고. 어려울 것 없잖아. 겁 먹은 것도 아니고.”

“하, 거 참.”

여관 주인은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겉모습으로만 봤을 때 이안은 빼빼 마른 소년일 뿐이었다.

그냥 머리 색이 재수 없고 눈에 힘을 줘서 인상이 더러운,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소년.

반면. 여관 주인은 듬직하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체격이 작은 편은 아니었다.

성인과 소년.

힘의 차이는 명확할 터.

그렇기에 여관 주인은 이 건방진 소년에게 본 때를 보여주기로 했다.

“나중에 질질 짜지나 마라 꼬맹아.”

여관 주인이 이안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리고 온 힘을 손에 집중했다.

“…….”

“…….”

잠시 뒤.

식은땀 한 방울이 여관 주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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