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여관 주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손에 전해지는 말도 안 되는 압력.
자존심 때문에 꾹 참고 있었지만, 결국 통증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 알겠…… 끄윽.”
다시 한번 가해지는 압력에 여관 주인은 신음을 참지 못했다.
거의 뼈에 금이 가기 직전에서야 이안은 손을 놓아주었다.
“방. 있죠?”
“흠. 큼큼. 생각해보니까 하나 정도 비었던 것 같소.”
다시 공손해진 여관 주인의 태도에 이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여관 주인이 잘 못 한 건 맞지만, 굳이 이렇게 힘자랑을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이렇게 하는 게 오히려 나중 생각했을 때는 더 좋아요.’
한번 숙이면 만만하게 본다. 만만하게 보면 털어먹으려 한다.
오히려 평화적으로 나가는 게 훗날 또 다른 시비에 휘말리게 돼 버리는 것이다.
한 번쯤은 힘을 보여줘야 한다. 내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상대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그렇다고 너무 과한 폭력을 휘두르면 상대가 앙심을 품고 복수하려 들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바로 이안이 10개월 동안 배운 처세술이었다.
“식사는 하실 거요?”
“예. 방으로 직접 올려보내 주시면 좋겠네요.”
“알겠소.”
짤랑.
여관 주인의 손 위에 동전을 올려다 준 이안은 계단을 올랐다.
손 위에 놓인 동전이 요구한 것보다 조금 많다는 걸 깨달은 여관 주인의 눈에는 한 점 남아 있던 적의마저 사라졌다.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 없지.’
그게 이안이 배운 처세술이었다.
***
잠이 들면 주위는 익숙한 풍경으로 바뀐다.
2평 남짓한 노량진의 작은 원룸.
그곳에는 황금빛 눈과 머리칼을 한 여성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
평소에는 목소리로만 들어서 잊곤 했지만, 역시 이네스의 외모는 아름답다.
이렇게 마주하면 순간 말을 잃고 넋을 잃을 정도로.
그런 이안의 시선에 이네스는 싱긋 미소지었다.
괜스레 부끄러워진 이안은 헛기침하며 말했다.
“흠흠.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려나요?”
“서로 마주 본 건. 그렇죠.”
시작의 마을에서 이곳까지 이동하는 동안, 이안은 꿈속에서 이네스를 만나지 못했다.
피곤한 상태에서 수면의 질까지 떨어트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이네스는 이안의 품에 달려 있던 성검을 뽑아 올렸다.
“꿈속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지만, 그래도 서두르는 게 좋겠죠? 우선, 저번에 했던 내려 베기부터 복습하죠!”
이네스는 마치 성실한 교사처럼 그리 말하며, 이안에게 성검을 건네주었다.
“내려 베기 말하는 거죠?”
“예.”
이안은 검을 쥐어 들어 올렸다.
“잠깐. 그대로 멈춰주세요.”
이네스는 이안의 몸을 이곳저곳 가리키며 자세를 교정했다.
“왼발은 조금 앞으로. 무게 중심이 발꿈치로 쏠리면 안 좋아요. 허리는 살짝 틀어주고요. 예 좋아요. 이제 점에서 점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검을 휘두르면 돼요.”
“점에서 점으로요?”
“음, 이러면 훨씬 이해하기 편하려나요?”
이네스는 양손을 그러모았다. 그러자 은은한 빛을 내뿜는 발광체 두 개가 손바닥 위에서 생겨났다.
이네스는 발광체를 들어 올려 허공에 고정했다.
“……이건 뭔가요?”
“빛의 정령이에요. 이 정령에서 검을 휘둘러, 저 정령에서 검을 멈추면 돼요. 중요한 건 검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정령의 정중앙에서 멈출 것. 해보세요.”
이안은 이네스가 시키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확실히 저번보다는 나은 내려 베기였다.
하지만 이안의 검은 정령을 지나쳐, 한 뼘이나 더 가서 멈췄다.
“쉽지 않네요.”
“그럼요. 당연히 쉽지 않죠. 일단, 지금은 힘을 빼고 천천히 해보세요. 가볍게 십만 번부터 시작할까요?”
“시, 십만 번이요?”
이안은 순간, 단위를 잘못 들으 게 아닌가 싶어 반문했다.
하지만 이네스는 엄한 표정으로 단호히 말했다.
“수련의 기본은 반복. 내려 베기 십만 번. 바로 실시하세요.”
“으음…….”
“어차피 꿈속이라 진짜 체력을 소모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느리게 가니까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한 이네스는 턱을 까딱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시작하라는 의미였다.
왜인지 여기서 더 말을 했다가는, 한 대 얻어맞을 것 같아 이안은 황급히 검을 들었다.
‘무섭다 무서워.’
영웅으로서의 이네스는 몰라도, 교육자로서의 이네스는 몹시도 엄격했다.
이런 이네스의 일면을 본 건…… 사실 별로 기쁘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무서웠다.
“잡생각 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요. 집중 안 하시나요?”
“죄, 죄송합니다! 흡! 흡! 흡! 흡!”
한동안 이안이 외치는 기합 소리만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지옥 같은 수련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이안의 머리맡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
꿈속에서 수련했다 쳐도, 꿈에서 깬다고 그 노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이안은 검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그었다.
“흡!”
깔끔한 내려 베기.
10만 번의 연습은 헛된 게 아니었는지, 검은 이안이 원하는 위치에서 정확히 멈췄다.
‘현실에서도 조금만 연습하면, 익숙해질 수 있겠어.’
그러고는 이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자도 잔 것 같지가 않은 피로감.
어젯밤의 수련은 정말로 끔찍했다.
같은 동작을 십만 번이나 반복했다. 만 번도 아니고 십만 번이다.
지루하고, 피로하고, 끔찍한 경험이었다.
이제는 잠에 드는 게 영 꺼려질 것 같았다.
‘게임에서는 하루 잘 때마다 그냥 알아서 능력치랑 숙련도랑 자동으로 올려줬는데.’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강한 건, 그만큼 캐릭터가 플레이어에게는 보이지 않는 노력을 해왔다는 걸까?
‘날로 먹고 싶었는데, 역시 안 되는구나.’
세상만사에 쉬운 일이 없다.
이네스가 엄하게 말했다.
[오늘 수련은 쉴 거예요. 매일 혹사하는 것도 효율이 떨어지겠죠. 단, 깨어 있을 때 신체 단련은 해야 해요.]
이네스는 그 누구보다 기본기를 중요시하는 성격이었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힘이다.
힘이 눈에 띄게 차이 나면, 기술이 뛰어나도 밀리게 된다.
[지금은 제힘을 받아 강해졌지만, 이안 스스로의 근육을 키운다면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을 거예요.]
이네스는 이안의 몸을 그릇으로 비유했다.
지금 이안의 그릇은 약하고 자그맣다. 이곳에 이네스의 힘을 너무 많이 부어버린다면, 그릇이 깨지거나 힘이 넘치고 만다.
그렇기에 그릇을 좀 더 크게, 그리고 단단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건 자신 있어요.’
[그런가요?]
‘그래도 예전에 운동을 했었으니까요. 몸 키우는 방법 정도는 다 알고 있죠.’
운동에서 손을 놓은 지는 꽤 됐지만, 그래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었다.
‘다만, 힘 빼기 전에 오늘은 일단 일부터 봐야 하지만요.’
출출해진 이안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침의 여관은 어제와는 달리, 용병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관 주인이 이안에게 알은체를 했다.
“일어났소? 식사는?”
“스튜랑 빵. 2인분.”
“음! 한창 많이 먹을 나이지.”
여관 주인의 태도는 어제와는 달리, 매우 싹싹했다.
‘추가로 낸 돈이 만족스러웠나 보네.’
홀로 구석 자리에 앉은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용병들이 일 나가기 전에 배를 채우고 있었다.
용병들은 생긴 것도 입은 것도, 바닥에 내려놓은 무기도 모두 달랐다.
하지만 얼굴에는 하나같이 ‘나 용병이요.’ 하는 듯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못 보던 얼굴의 등장에 몇몇은 이안에게 시선을 주었다.
하나같이 표정이 좋지 않다.
이안의 머리색과 눈 색깔에 꺼려하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직접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하긴, 누가 아침부터 시비를 걸겠어. 졸려 죽겠는데.’
여관 주인의 싹싹한 태도도 한몫했을 것이다.
용병들은 여관 주인과 친할 것이고, 친한 사람이 호의를 품은 대상은 좋게 보기 마련이니까.
‘역시. 어제 여관 주인에게 과하지 않게 행동한 게 정답이었네.’
소소한 뿌듯함을 느끼며, 이안은 억지로 음식을 배 속에 쑤셔 넣었다.
[그래서 오늘 할 일이라는 게 뭔가요?]
‘코르디스로 가는 방법을 찾아야죠.’
[아…….]
원래 RPG게임에서 초보일 때는 지역을 돌아다니는 것도 하나의 일이다.
코르디스까지는 상당히 멀다.
중간중간에 있는 위험지대까지 생각하면, 가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큰길은 대충 다 아니까, 혼자서 찾아가려면 찾아갈 수 있죠. 근데 중간에 어떤 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거잖아요.’
크레이사가는 여러모로 악질인 게임이다. 결코 플레이어를 편안히 내버려 두는 법이 없다.
‘그런 면 때문에 망해버렸고.’
게임에서는 혼자서 다니면 확률적으로 더 많은 괴수와 마주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곳이라고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혼자 다니다 재수 없게 산적 떼라도 만났다가는, 그대로 칼침 맞기 딱이었다.
[그러면 호위를 구할 생각이라는 건가요?]
이네스의 물음에 이안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아니죠. 그러면 돈이 들잖아요. 지금 가진 돈은 대부분 입학금으로 부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러면……?]
‘반대로 제가 돈을 받아야죠.’
이안은 식사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이안이 가는 길의 앞에는 이미 용병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설마…….]
‘여기는 그래도 마차들이 많이 들락거리니까, 호위 의뢰 하나 정도는 있지 않겠어요?’
상단 호위에 참여하는 것.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으면서, 돈도 벌 수 있는. 그야말로 일석이조라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용병 길드는 3층짜리 석조 건물이었다.
1층의 로비에 용병들은 의뢰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그 숫자가 예상보다는 적었다.
‘이제 곧 겨울이니까, 용병들도 쉴 타이밍인가.’
겨울에는 일감이 적다.
겨울에 전쟁을 일으키는 곳은 적고, 의뢰비가 오르기 때문에 자연히 의뢰도 줄어든다,
용병들도 사람인지라 추운 환경에서 일하는 걸 꺼리는 편이고.
이안은 로비의 한 구석에 앉아, 조용히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지나가는 용병들은 한 번씩 이안의 얼굴을 훑어보았지만, 이내 신경을 껐다.
역시 아침부터 시비 걸고 다닐 정도로 기운찬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다음.”
마침내 이안의 차례가 되었다.
이안은 볼에 칼자국이 나 있는 직원이 있는 창구로 향했다.
직원은 이안을 살펴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용병패.”
“여깄습니다.”
“노른에서 왔군.”
이안은 이런 일이 있을까 싶어, 이미 시작의 마을에서 용병패를 만들어 두고, 틈틈이 잡스러운 의뢰도 해결해왔다.
하수구의 해수 구제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 봤자 최하위 등급인 철패였지만.
“용건은?”
“코르디스…… 북쪽으로 향하는 상행 의뢰가 있는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고객으로서? 아니면 호위로서?”
“호위로서요.”
“철패가 받을 수 있는 보수는 크지 않다.”
“괜찮습니다.”
“잠시 기다리도록.”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으로 문답을 마친 직원은 책상 서랍을 열어 서류를 뒤적였다.
친절하지는 않아도, 빠른 일처리에 이안은 만족했다.
아니, 검은 머리가 다짜고짜 무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친절하다고 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상위 1프로지.’
예상보다 빠르게 볼일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안은 기다리는 시간 동안 눈이나 좀 붙일까 고민했다.
하지만 옆에서 들려온 소란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빨리 의뢰를 내놓지 못하겠느냐!”
“하, 하지만 경! 의뢰를 받으려면 용병등록을 하셔야 합니다! 이건 신뢰의 문제라 저희도 어떻게 할 수가…….”
“지금 날 못 믿겠다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갈색 곱슬머리에 푸른 눈. 사각 턱.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사내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사내는 사슬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책상을 쾅쾅 칠 때마다 갑옷 위에 걸친 멋들어진 휘장이 펄럭였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사내의 신분을 짐작했다.
‘아, 기사구나.’
하지만 사내가 누군지를 알아보는 건, 오직 이안 혼자뿐이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