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당신의 팬입니다
‘정열의 에스테반’
제국의 기사단원 중 하나였지만, 꿈과 모험을 좇아 방랑기사가 되어 버린 괴짜.
어디를 가든 사고와 사건에 휘말리는 트러블 메이커.
하지만 강하다.
제국의 기사답게 지금의 무력도 약하지는 않지만, 가진 잠재력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
‘에스테반의 아래에 들어가 성장하는 플레이 방식도 나쁘지 않지.’
에스테반의 종자가 되어 대륙을 떠돌고, 모험을 거듭한다.
거인을 토벌하고, 사악한 용을 무찌르고, 납치된 공주를 구하고, 그러면서 실력을 쌓아간다.
그렇게 에스테반의 모든 걸 전수받은 플레이어가 결국 뛰어난 기사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게 스토리의 골자였다.
‘낭만적이라서 나도 좋아했지.’
이안이 ‘크레이 사가’를 했던 건, 결국 원룸 생활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테반을 따르는 스토리는 대륙 이곳저곳을 떠돌기에 제격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안은 에스테반을 따라다니지 않았다.
스토리의 후반부. 에스테반은 언제나 플레이어를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하니까.
이안은 본인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죽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저 휘장에 새겨진 문양은……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화이트가드 백작가의 것일 텐데요.]
‘아마 맞을 겁니다.’
[시간이 흘러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예전의 화이트가드는 역사와 힘을 모두 가진 가문이었어요. 그런 가문의 기사가 종자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건 좀 이상하군요.]
이안은 좋아하는 캐릭터를 실물로 본다는 호기심으로.
이네스는 이 정체불명의 기사에 대한 흥미로 에스테반이 하는 모양새를 구경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당장 돈이 필요하단 말이다! 그러니 의뢰를 빨리 내놓아라!”
“그, 그러면 용병등록을 하시면 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지금 감히 기사인 나에게 용병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냐!”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대체!”
결국, 상대하던 길드 직원이 폭발했다.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는데, 보고 있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이안은 상황을 대충 파악했다.
‘또 사고치고 다니느라 돈이 다 떨어졌나 보구만.’
[잘 아는 분인가 보네요. 그것도 미래 지식으로……?]
‘예. 실제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요.’
에스테반은 트러블 메이커다.
사건이 에스테반을 찾아오기도 하지만, 스스로 사건으로 뛰어들기도 한다.
그 대부분을 명예라는 명목으로 공짜로 해결해주니, 돈이 모일 리가.
‘게다가 쓸데없이 고집은 있어서 자기 가문에 손도 벌리지 않고요.’
[바보네요.]
‘바보죠.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바보에 좋은 의미가 있나요?]
‘보면 알게 돼요. 사람은 좋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실랑이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테고, 그러면 길드 직원이 너무 불쌍하다.
게다가 용병 길드는 제국에서 직접 관리하는 단체다.
아무리 에스테반의 신분이 높아도, 소란이 커지면 좋을 것이 없다.
소속 없는 방랑기사인 지금은 더더욱.
그렇기에 이안은 손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네요.”
“음?”
“아…….”
이안이 끼어들자 의아하게 쳐다보는 에스테반. 구원군이라도 본 듯 쳐다보는 길드 직원.
그리고 호기심 어린 얼굴로 보는 용병들.
뜬금없긴 할 거다.
처음 보는 소년이 갑자기 끼어들었으니.
“에스테반 경 맞죠? 에스테반 화이트가드 경.”
“음? 나를 어떻게 알아보는 거지? 설마 ‘황혼의 그림자’를 궤멸시킨 복수를 하러…… 아니면 ‘학살자 조지’의 원수를 갚으러 왔나?”
스릉.
눈 깜짝할 새에 에스테반의 검이 뽑혀 이안의 목 바로 옆에 멈춰 있었다.
향상된 신체 능력으로도 반응조차 할 수 없었던 신속함.
이네스만이 감탄을 흘렸다.
[역시 화이트가드인가요? 동작에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어요.]
이안은 황급히 손을 올려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히며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에스테반 경의 팬입니다. 예.”
“팬이라고……?”
주위의 표정들이 기묘하게 변했다.
대체 이 미치광이 기사가 누구길래 팬을 자칭한단 말인가.
저 미친 기사처럼, 저 꼬맹이도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퍼졌다.
“흠.”
에스테반은 이안의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쳐다보다…… 이내 폭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 팬! 팬이라고?”
“네. 네. 팬입니다.”
“그래. 벌써 내 모험담이 그렇게 퍼진건가.”
“저희 고향에서는 에스테반 경의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었죠.”
“음! 그런가…… 하지만 직접 내게 팬이라고 말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그래. 1호 팬이라 할 수 있지. 영광으로 알도록!”
“……무척이나 영광이네요.”
에스테반은 명성에 미쳐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호감도 쌓기도 무척 쉽다.
‘그냥 팬이라고 한마디 하면, 바로 호감도가 쫙쫙 올랐지.’
에스테반은 감정이 표정에 다 드러나는 타입이다.
그는 자신의 1호 팬이 생겼다는 게 진심으로 기쁜 모양이다.
“음음! 그럼 어디 술집이라도 가지. 가서 내 모험담을 하나하나 들려주겠다.”
“……그것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않으세요?”
“음? 뭐가 말이지?”
“…….”
진심으로 모른다는 표정.
자기 팬에게 모험담을 자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단 말인가!
이안은 상황을 파악 못 해 눈알만 또르르 굴리고 있는 길드 직원을 가리켰다.
“의뢰받으려 하신 거 아니에요? 돈이 부족하신 것 같은데.”
“흠흠. 낭만을 좇는 방랑기사는 으레 돈에 쪼들리는 법이야.”
“제가 또 에스테반 경의 팬으로서 어떻게 그냥 지켜보겠습니까.”
길드 직원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낸 이안은 에스테반에게 물었다.
“혹시 생각해두신 의뢰 종류가 있습니까?”
“겨울이 오니 북쪽에서 설인들이 슬슬 기승을 부린다더군. 나는 내 애마, 레이야드를 몰아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먹을 게 다 떨어지더군. 내가 굶는 건 참을 수 있어도 레이야드가 굶는 건 참을 수 없었지.”
에스테반은 자기 얘길 장황하게 떠들길 좋아하는 사내였다.
이안은 게임에서도 에스테반의 대화 지문이 유달리 길었던 걸 기억했다.
‘원래는 그냥 다 스킵해 버렸는데…….’
현실에서는 스킵 기능 따위는 없었다.
이안은 인내심을 발휘해 에스테반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때 문득, 벼락처럼 머릿속에 묘책이 떠올랐다. 내가 북쪽으로 가는 누군가를 호위한다면, 이동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것 아닌가?”
“사람 생각이 다 똑같군요.”
“음?”
“계속 말씀하시죠.”
에스테반은 멋들어지게 기른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어딜 가면 내 호위가 필요할지 곰곰이 생각해봤지.”
“그래서 용병 길드로 찾아왔다?”
“그래! 근데 저 무지한 자가 내게 용병이 되라는 헛소리를 하지 않나!”
“요, 용병 길드에 찾아오셨으면 당연히 용병이 되셔야죠.”
직원의 소심한 반격.
얘기를 듣던 이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조금 우스운 일이지만, 아예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네요. 기사들은 용병들을 천하거나 하찮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결국은 자존심 문제다.
그냥 눈 딱 감고 용병패 등록만 하면 모든 게 깔끔하게 처리되는 문제.
하지만 에스테반은 그것조차 용납할 수 없는 고집 센 사내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저도 마침 북쪽으로 갈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에스테반 경의 종자. 그러니까 스콰이어가 되겠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임시지만요.”
“임시 스콰이어?”
“저한테는 용병패가 있으니, 제가 의뢰를 받으면 에스테반경께서 저를 도와주시는 느낌으로 함께 해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흠. 확실히. 기사의 스콰이어가 용병이지 말란 법은 없지. 옛 역사에도 용병 출신 스콰이어들이 종종 있었고…….”
짧게 고민하던 에스테반이 눈을 번쩍 떴다.
“음! 아주 영리한 생각이야! 역시 나의 팬답군.”
이안은 길드 직원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직원은 황급히 말했다.
“그, 그렇다면 여기 있는 용병분께서 의뢰를 받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다만, 기사님은 의뢰주와 직접 만나 사정을 설명하셔야 합니다.”
“알겠다. 설마 내 호위를 거절할 사람은 없으니, 면접 따위는 아무 의미 없겠지만!”
“……그리고 기사님을 의뢰주에게 소개하는 건 어디까지나 여기 있는 용병분이시니, 행여 문제가 생겨도 저희 쪽에서는 책임을 일절 지지 않는다는 걸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그 정도는 당연히 제가 책임져야죠.”
용병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신뢰.
아무리 날카로운 검이라도, 그 검끝이 자신의 목을 향하면 무용지물인 법이다.
길드는 용병들을 등급화하고 실적을 기록해, 적절한 의뢰주들에게 추천한다.
혹시 추천해준 용병들이 사고라도 친다면 길드에서도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
반대로 용병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그것에 대해서도 보상해준다.
그렇기에 에스테반이 용병 길드와는 관련 없다고 선을 그어두는 건 중요했다.
‘이 사람들은 따지고 보면 공무원들이고, 공무원들은 책임소재에 굉장히 민감하니까.’
길드 소속도 아닌데 함부로 에스테반을 의뢰주한테 소개했다가 문제라도 생긴다면, 고스란히 담당자의 책임이 되고 말아버린다.
그러니까 필사적으로 에스테반의 억지에 저항했던 거고.
그때.
이안의 요청으로 서류를 뒤적거리던 무뚝뚝한 길드 직원이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한 조건에 부합하는 의뢰 중 가장 빠른 건 이거다.”
이안은 직원이 내민 서류를 훑었다.
‘안테 상단의 곡물 수송 의뢰라.’
직원은 차갑게 말했다.
“철패 용병에게는 조금 벅찰 수도 있겠군.”
상단이 이동하는 위치는 거의 이안이 목적지로 하는 코르디스까지 직행하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길. 하지만 중간중간 위험한 구역들을 지나야 했다.
[이안이 가기에는 위험하네요. 그리고 저 직원이 말한 대로, 이런 위험한 의뢰라면 이안을 고용하지 않을 수도 있겠는데요?]
타당한 말이었다.
이안도 원래라면 이렇게 위험한 길로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괜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위험한 건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아요. 고용이 안 될 일도 없고요.’
[예?]
‘저는 이제 철패 용병 이안이 아닌, 에스테반 경의 종자. 스콰이어 이안이니까요.’
[…….]
밥상이 차려졌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닷새 후 아침에 출발이니, 빨리 면접을 보는 게 좋을 거다.”
“에스테반 경도 괜찮죠?”
“시간은 금보다 귀하니,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하하! 그럼. 말 나온 김에 바로 가보자고!”
그렇게 말한 에스테반은 혼자서 쌩하고 나가 버렸다.
곤욕을 치르던 길드 직원이 덩그러니 남겨진 이안에게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대로였다면 오늘 하루 종일 시달릴 판이었어요.”
“뭘요. 돕고 사는 거죠.”
“이안씨라 했던가요? 나중에 제가 도울 일 있으면 말해주세요. 꼭 보답할게요.”
에스테반을 끌어들이는 것만으로도 활동의 폭이 크게 늘었다.
게다가 길드 직원의 호의까지 샀다.
[설마 이것까지 다 계산한 건가요?]
‘에스테반 경을 돕는 게 이득이라고는 생각했죠. 그걸 빼고도 그냥 돕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요.’
에스테반은 이안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중 하나였으니까.
이네스도 이안이 호의를 가지고 남을 돕는다는 게 퍽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역시. 남을 돕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그리고 이제 더 기분 좋은 일이 남아 있어요.’
[예?]
‘보면 알아요.’
이득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이안은 에스테반의 뒤를 따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용병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
“열흘간 호위하는 데에 금화 세 닢이라고요? 이건 말도 안 되는 금액입니다!”
얼굴이 허옇게 질려, 제자리에서 팔팔 뛰는 상단 책임자. 스텔.
갑작스레 면접을 보러 와서 이 무슨 파격적인 요구란 말인가.
하지만 이안은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옆에 서 있는 에스테반에게 말했다.
“에스테반 경.”
“왜 그런가, 스콰이어 이안.”
“이 사람은 에스테반 경에게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있군요.”
“무엇이……! 네노옴!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에스테반의 두 눈에 불이 붙었다.
스텔의 얼굴은 더더욱 창백해졌고, 그 모든 걸 지켜보던 이네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