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2화 (13/222)

12. 올스타전

밤사이의 화기애애한 시간은 지나가고.

다시 해가 뜨고, 출발해야 할 시간이 되니 용병들은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스텔은 촌장에게서 전해 들은 정보를 에스테반에게 알려주었다.

“아무래도 요즘 들어 산적들이 득시글거리는 모양입니다. 게르라는 녀석이 두목으로 있는 산적단인데, 그 규모가 작지 않다고 합니다.”

‘게르라.’

옆에서 듣고 있던 이안은 게르라는 이름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 새끼인가.’

선동꾼 게르.

레지스 산맥 일대에서 활동하는 산적으로, 무력 자체는 그리 뛰어나지 않다.

하지만 게르에게는 ‘설득술’이라는 매우 성가신 스킬이 있다.

‘사람들을 순식간에 포섭해 버리는 효과였지.’

만약 플레이어가 레지스 산맥을 공략하기 위해 용병이나 병사들을 데리고 간다면.

그리고 그 용병이나 병사들의 호감도가 충분히 높지 않다면?

그러면 게르는 순식간에 용병과 병사를 설득해 자신의 아군으로 삼아 버린다.

‘처음 당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책상을 내리쳤었지.’

기껏 데려온 아군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등에 칼을 꼽는 건, 지금 생각해도 꽤나 악랄한 패턴이었다.

그러나 스텔이 알려준 정보에도 에스테반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산적 따위는 몇이 달려들어도 내 상대가 되지 못한다.”

“예. 저희는 에스테반 경이 있으니 안심입니다.”

오만한 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도 에스테반의 실력은 산적 따위가 비벼볼 만한 실력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잘 됐어. 게르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하가 늘어나는 타입이니, 최대한 빨리 제거하는 게 나아.’

괜히 어영부영 놔뒀다가, 레지스 산맥을 주름잡는 거대한 산적 집단이 생겨 버리면 그것만큼 골치 아픈 일도 없다.

에스테반이 옆에 있을 때, 미리 화근을 잘라두는 게 좋았다.

“자! 출발합니다!”

스텔의 외침과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전민 마을에서 새로 합류한 사냥꾼이 선두에서 길 안내를 했고, 그 옆을 에스테반이 지켰다.

이안은 에스테반을 따라가는 대신, 멈춰 서서 용병들을 살폈다.

‘아마 게르를 마주치는 건 확정일 거야. 그렇다면…… 용병들을 미리 좀 구슬려 놔야겠어.’

지금 당장 호감을 산다고 얼마나 큰 차이가 생길지는 알 수 없다.

게르에게 넘어갈 사람은 어차피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가만히 있는 건, 이안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호감도 올리기 가장 좋은 건 역시 돈이지…….’

돈 싫어하는 사람 없고, 특히 용병들은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이안의 지갑 사정이 그렇게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코르디스의 입학금을 생각하면, 지금 가진 돈은 최대한 아껴둬야 해.’

그래서 이안은 일단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우선은 가장 친숙한 대머리 용병부터.

“스튜어트…… 였죠?”

“맞습니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이안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는 게 무엇이 그리 기쁜지, 스튜어트은 활짝 웃음 지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종자님.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아뇨 그냥. 얘기나 하고 싶어서요.”

“얘기요?”

“그냥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가족 이야기나 왜 용병이 되었는지나. 제가 남 얘기 듣는 걸 좋아해서요.”

생판 모르는 남을 배신하는 건 손쉬운 일이다.

하지만 가족 이야기까지 나눈 사람을 배신하는 건, 조금 껄끄럽기 마련이다.

심리적인 저항감.

미약할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무조건 나았다.

“뭐, 제 얘기가 왜 궁금하신지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리를 긁적이던 스튜어트가 하나하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농사꾼 집안에서 뛰쳐나와, 동패 용병이 되기까지의 여정.

어디서 들을 수 있을 법한 평범한 이야기들.

솔직히 말해, 이안도 듣는 시늉만 했지 제대로 듣지는 않았다.

‘게임에서 스킵하던 버릇이 남아 있는 건가.’

[먼저 말 걸었으면 제대로 들으세요 이안. 실례잖아요.]

‘이네스 님이 대신 들어주시고 있으니까, 괜찮은 거 아닐까요?’

[…….]

그렇게 하품을 참는 사이, 스튜어트이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래서 이번 의뢰가 끝나고 돈을 받으면, 은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그녀에게 청혼할 겁니다.”

이안은 미묘한 얼굴로 답했다.

“어 그래요 스튜어트. 잘 들었어요. 기왕이면 마지막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았겠지만.”

“예?”

“꼭 고향의 메리 씨와 결혼하길 바라요.”

“클로라입니다.”

“아무튼요.”

어쨌든 스튜어트의 눈치를 살피니,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어서 제법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이안은 슬슬 마무리하고 다른 용병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지금은 아직 마을 근처라 안전하지만, 곧 있으면 대화할 시간조차 없게 된다.

슬슬 뒤로 빠지려는 이안에게 스튜어트가 웃으며 말했다.

“종자님은 참 특이하신 분입니다.”

“뭐가요?”

“지금껏 살면서 제가 본 귀족분들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다들 저희를 인간이 아니라 화살받이 정도로 생각하고, 말도 섞으려 하지 않죠.”

“어, 음.”

이안은 뭐라 말하기 힘들어, 애매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한데 종자님은, 저희랑 스스럼없이 대화도 하시고. 심지어 제 이름까지 기억해주셨습니다.”

그야 당연하다. 이안은 귀족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스튜어트은 이미 잔뜩 감격한 모양이었다.

“제가 감히 예측해 보건대, 종자님도 그 머리 색 때문에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거겠죠. 어쨌든, 살면서 귀족분들께 이런 대우를 받아보긴 처음입니다. 이 스튜어트. 진심으로 감동했습니다!”

“예. 뭐.”

“설령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종자님은 지켜드리겠습니다! 다른 용병들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힘든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기묘한 동질감을 공유하기 마련이다.

해맑게 웃으며 지켜 주겠노라 말하는 스튜어트를 보면, 이안의 무뎌진 양심도 조금은 쓰라렸다.

‘귀찮아서 착각을 내버려 뒀더니,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네요.’

[거짓말은 영혼을 타락시키는 법이에요. 이안.]

‘어, 음. 그래도 나쁜 의도로 한 건 아니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좋은 게 좋은 거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이네스 님이 제 머릿속에 있으니, 저도 따지고 보면 반쯤은 귀족이 아닐까…….’

변명을 늘어놓던 이안은 이내 그만두었다.

말할수록 스스로가 구차해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어쨌든, 이안도 모르는 사이에 용병들은 그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게르가 나타나도, 선동에 넘어가 곧바로 등 뒤에서 칼을 찌를 확률은 크게 준 셈이다.

얼굴은 화끈거렸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안은 스스로를 위안 했다.

***

길 안내를 하던 사냥꾼이 앞길을 살피며 말했다.

“조금 있으면 마지막 마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너머부터는 산적들과 괴수들의 영역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산적과 괴수들의 영역.

상단 책임자 스텔은 나무 틈 사이로 내려오는 햇빛을 보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고 싶지만, 시간이 애매하군요. 아무리 산에는 밤이 빨리 찾아온다고 해도, 아직 반나절은 더 이동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고심하던 스텔은 결정을 내렸다.

“마을에 들려서, 잠시만 휴식을 하고 다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흠.”

“왜 그러시죠?”

사냥꾼이 말을 멈추고,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고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무언가 타는 냄새가 납니다.”

“탄 내요?”

“예. 지금처럼 건조한 시기에는 산불이 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지만, 위치로 보면…….”

사냥꾼의 시선은 다음 마을이 있다는 방향을 향해 있었다.

“아무래도 서둘러 확인하는 게 좋겠습니다. 만약 산불이라면, 지금이라도 진로를 바꿔야 합니다. 일단 여러분은 여기에 남아 계십시오. 제가 혼자 가서 무슨 상황인지 보고 오겠습니다.”

사냥꾼은 무언가 불길한 기분을 느꼈는지,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발을 굴렀다.

“나도 함께 가겠다. 스콰이어 이안. 따라오도록.”

“예.”

“어서 안내해라.”

고개를 한번 끄덕인 사냥꾼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산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답게 그 속도가 몹시 빨랐다.

그 뒤를 레이야드에 올라탄 에스테반이 뒤따랐고, 마지막으로 이안이 뒤쫓았다.

‘씁. 더럽게 힘드네.’

평지를 달리는 것과 산을 달리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평소보다 체력이 배는 소모되는 기분.

하지만 그간의 훈련이 헛되지 않았는지, 이안은 가까스로 따라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마을.

널따란 빈 공터에 자리한 마을 이곳저곳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매캐한 탄내와 함께 피비린내가 흘러나왔다.

“아…….”

사냥꾼은 입을 벌린 채 신음에 가까운 탄식을 토해냈다.

진한 혈향에 에스테반도 얼굴을 찌푸렸다.

“비명이 들리지 않아. 이미 상황이 마무리되었다는 뜻이다.”

마을 주민들은 다 죽었거나, 아니면 사로잡혔으리라.

더 앞으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목책 위에는 주민의 것으로 보이는 시체 몇 구가 널려 있었다.

시체는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는데, 싸우다가 생긴 상처라기보다는 고문의 흔적 같았다.

참혹한 광경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쁜 놈들이라도 최소한의 선은 지키려 하는 법인데…….”

이 산적들에게 그런 선은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 게르라는 인물이 잔인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

마을의 목책 밖으로 산적들이 빠져나왔다.

그들의 손에는 약탈한 듯한 곡물 포대나 자루 따위가 들려 있었다.

산적들과 이안 일행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산적들이 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에스테반이 주저 없이 앞으로 뛰어나갔다.

“이랴! 가자 레이야드! 쓰레기들을 청소할 시간이다!”

흑마가 질풍처럼 내달렸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산적들은 상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굳어 버렸다.

“내 검을 받아라!”

에스테반이 눈으로 쫓기도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촤악!

산적 하나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동료의 피를 뒤집어쓰고 나서야 옆에 있던 산적들은 정신을 차렸다.

“기, 기사다!”

“도망쳐!”

산적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열.

하지만 에스테반 하나에게 겁을 집어먹고,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거기서라! 쓰레기 같은 너희들이라도, 최소한의 부끄러움을 안다면 도망치지 마라!”

에스테반은 고함을 질러가며 산적들을 추격해 하나하나 찔러죽였다.

이안과 사냥꾼 역시 에스테반을 뒤따랐다.

사냥꾼은 재빨리 화살을 시위에 걸은 뒤, 손을 놓았다.

퉁!

빠르게 날아간 화살이 산적의 왼 다리에 적중했다.

억―하는 비명과 함께 쓰러진 산적이 바닥을 굴렀다.

이안은 쓰러진 산적에게 다가가, 놈의 다리와 팔을 포박했다.

‘한 명쯤은 잡아서 포박해야 해. 그래야 정보를 얻을 수 있어.’

이안은 발버둥 치는 산적의 뒷통수를 후려쳐 기절시키고, 주위를 살폈다.

에스테반을 보조할 생각이었는데, 이미 상황은 모두 마무리되어 있었다.

“제기랄. 두 놈인가 세 놈을 놓치고 말았다.”

아무리 에스테반이라도 흩어져서 도망치는 산적들을 모두 잡을 수는 없었던 모양.

오히려 나머지를 하나하나 쫓아가 처리한 게 대단하다고 봐야 했다.

‘역시 에스테반이야. 산적들이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 했어.’

새삼 에스테반에 대해 감탄을 하며, 이안은 사로잡은 산적을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정보를 얻을 시간이었다.

***

상단 책임자 스텔은 훌륭한 상인이었지만 마음 약한 사내이기도 했다.

그는 불타 버린 화전민 마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용병들과 함께 시체를 거두어 화장하고, 간소하게 무덤도 만들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갔기를…….”

“썩을 놈들.”

“아무리 돈 때문이라도 어떻게 이런 짓을…….”

산적들이 저지른 만행은 용병들의 분노도 샀다.

적어도 게르에게 넘어갈 확률은 크게 준 셈이었다.

그 사이, 이안은 사로잡은 산적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사, 산채가 세 개 있습니다. 하지만 산채의 위치가 수비하기 너무 좋은 위치라, 요새나 다름없습니다.”

산적은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술술 정보를 불었다.

어지간히도 살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안은 에스테반의 눈치를 살폈다. 당장에라도 혼자서 산채로 쳐들어가는 게 아닐까 걱정이었다.

‘아무리 에스테반이라도 혼자서 요새를 공략하는 건 너무 위험해.’

하지만 에스테반은 심호흡하며 분노를 삼킬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안에게는 속으로 안도하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어차피 우리 쪽에서 먼저 건드린 이상, 저쪽에서 반드시 보복해올 거야.’

아마도 게르 녀석은 기사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졸개들을 보내 주위를 정찰을 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멈춰 있는 상단 행렬을 발견했을 터.

‘마을을 불태우면서까지 재물을 모으던 놈이니, 이 기회를 놓치지는 않겠지.’

이네스는 걱정스레 물었다.

[위험한 상황이에요. 지금이라도 산행을 포기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좀 돌아서 가더라도, 코르디스의 입학 기간 전까지는 맞출 수 있을 텐데.]

‘지금 후퇴하면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동 중에 해가 져 버리고 말아요. 그리고 우리가 산행을 포기하면, 우리 뒤를 쫓던 산적들이 누구를 노리겠어요.’

[…….화전민 마을을 노리겠지요.]

여기서 도망쳐 버리면, 위험한 건 다른 무고한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이안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산맥을 쭉 돌아가다가, 만에 하나라도 코르디스를 입학하지 못한다면?

그러면 대참사다.

앞으로의 모든 계획을 깡그리 수정해야 한다.

그렇기에 이안은 후퇴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저쪽에서 공격해올 때까지 기다릴 셈인가요? 언제, 어디서 공격해올지 알 수 없는데?]

‘글쎄요. 제 생각에는 얼마 안 가 습격해올 것 같은데요?’

확신에 찬 이안의 어조에 이네스가 물었다.

[왜 그런가요?]

‘만약에 우리가 산적들에게 겁먹고, 산을 가로지르는 걸 포기한다면 낭패니까요.’

이안과 에스테반을 고용하느라 상대적으로 용병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산적들에게 지금의 상행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다.

아무리 기사가 한 명 있다 해도, 게르는 별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이쪽에 있는 게 그저 그런 평범한 기사가 아니라, 에스테반이란 걸 모르니까.

‘이르면 오늘 밤 안에 습격할 수도 있겠네요.’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오늘은 결국, 이 근처에서 야영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이안은 상인들과 용병들을 모아 놓고 얘기했다.

“오늘 밤에 습격이 있을 확률이 높아요. 미리 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겁니다.”

“오, 오늘요?”

“꽤나 서둘러서 올 테니, 병력을 전부 끌고 오지는 못할 거예요. 아무튼, 대비는 해야 합니다.”

용병들과 상인들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산적들이 그렇게 빠릿빠릿하게 행동할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게르를 안다.

놈에 대한 자세한 설정은 모르지만, 놈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로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놈은 아주 유능한 놈이야.’

게르를 내버려 두면, 산적들의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다.

대규모 단체를. 그것도 포악한 산적들을 무리 없이 이끌 수 있는 능력.

카리스마와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게르는 절대 방심할 수 없는 상대다.

하지만 이 같은 사실을 설명하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이안이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때, 에스테반이 입을 열었다.

“스콰이어 이안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늘 오는 게 맞는 거겠지.”

이안을 향한 이상할 정도로 굳은 신뢰.

에스테반이 그리 말해 버리니, 용병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종자님이 허튼소리를 하실 분이 아니시지.”

“우리보다 똑똑하실 테니까…….”

방침이 정해지자,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용병들은 마지막으로 무기와 갑옷을 점검했고, 상인들은 미리 안전한 장소를 만들어 두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해가 완전히 지고, 달이 머리 위에 떠올랐을 때.

놈들이 왔다.

***

“뭐야. 이 새끼들 다 깨어 있는 데요?”

“우리가 올 줄 알았나 본데?”

“흐흐. 근데 뭐, 깨어 있으면 어쩔 건데.”

산적들이 하나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달빛을 반사해 빛나고 있었다.

“맙소사…….”

“무슨 숫자가 이리 많아!”

산적들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칠십을 가뿐히 넘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이안도 크게 놀랐다.

‘…….내 생각보다 훨씬 유능하구나. 게르.’

이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로잡은 산적에게서 산채에 약 백 명 내외의 인원이 있다는 걸 들었다.

그래서 이안은 그중에서 약 절반 정도만 올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병력을 갈무리하고, 준비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게르가 데려온 인원은 총 칠십.

사실상 산채의 전투 가능 인원은 모두 데려 나온 셈이었다.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운다면 에스테반이 질 것 같지는 않아. 하지만…….’

에스테반이 싸우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그리고 자신은?

설령 에스테반이 싸워 승리한다고 해도, 살아남는 사람은 에스테반 하나뿐일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일 점 돌파해서 뚫어내야 하나?’

그리하면 사상자는 많이 나오더라도 전멸하지는 않을 것이다.

에스테반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산맥을 삥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너무 게임하는 감각으로 생각한 건가? 내 계산이 틀린 건가?’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상황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선뜻 정할 수가 없었다.

이러는 사이, 산적들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얍삽한 인상의 땅딸막한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선동꾼 게르.

“큼큼.”

게르는 목을 몇 번 풀더니, 멋들어지게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산적들을 거느리는 게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안을 할 게…….”

“크워어어!”

혀에 기름칠한 듯, 매끄럽게 이어가던 말은 갑자기 들려온 포효소리에 말이 끊겨 버렸다.

“뭐, 뭐야!”

“저, 저건……!”

산적들이 술렁거렸다.

공터의 저 너머에서 입에 피 칠갑을 한 흉측한 생물이 붉은 안광을 빛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피, 피투성이 구울이다!”

“저 새끼가 왜 여기에!”

레지스 산맥의 명물 중 하나.

피투성이 구울.

갑작스러운 상황에 이안은 본능적으로 에스테반을 쳐다보았다.

‘이놈 때문이구나!’

사건을 끌어들이는 에스테반의 체질.

왠지 산적 하나만 마주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변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크르륵!”

낙엽을 밟으며 천천히 다가오는 늑대 무리.

그리고 그 선두에 서 있는 아름 다운 푸른 갈기를 가진 거대한 늑대.

“푸른 갈기 루시녹이다!”

“무, 무슨 일이야! 구울에 루시녹까지 나타났다고?”

산적들이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셋. 그래. 셋까지는 마주칠 수 있지. 그래. 걔는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하지만 그런 바람이 무색하게. 옆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포식자 그레이다! 그레이까지 왔다고!”

3미터를 훌쩍 넘는 육중한 갈색 곰.

이안은 저도 모르게 에스테반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

‘에스테반 이 새끼…….’

에스테반의 체질 때문인지, 레지스 산맥의 명물 들이 모두 모였다.

사실상 올스타전이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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