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기회를 제대로 잡기 위해서
피투성이 구울.
굶주린 광인이 인간의 시체를 파먹다, 결국 괴수가 되어 버린 비극의 산물.
놈이 입에서 뱉는 타액은 인간의 피부 따위는 순식간에 녹여 버릴 정도의 극독이다.
‘이 정도는 예상했어.’
푸른 갈기 루시녹.
짐승답지 않은 영리함과 뛰어난 통솔력으로 먹이를 절대 놓치지 않는 냉철한 사냥꾼.
루시녹의 무리에 한 번 포위당하면, 사실상 죽은 거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 또한 예상했다. 하지만…….’
마지막.
포식자 그레이.
100년을 넘게 살아온 그리즐리 베어.
그 덩치만큼이나 강한 힘으로 마을을 습격해 인간들을 산채로 씹어먹길 좋아하는 거대한 괴수.
공포의 대상이자 레지스 산맥의 폭군.
이안이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녀석이었다.
‘설마 넷을 한꺼번에 마주치다니…….’
당황한 건 게르와 그 부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왜, 왜 이 녀석들이 여기에?”
“여기는 놈들의 영역이랑 멀리 떨어져 있을 텐데…….”
이 셋이 모인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안은 이 모든 게 사건을 몰고 다니는 에스테반의 체질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네스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겨울이 되기 전에는 모두가 분주해지는 법이죠. 인간이든, 짐승이든, 괴수든.]
살아 있는 모든 동물은 추운 겨울을 대비해야 한다.
인간들은 식량을 미리 비축하고, 동면을 준비하는 짐승들은 미리 배불리 먹어둬야 한다.
[한창 먹이를 찾아다닐 때, 고기 익는 냄새가 났으니. 이렇게 멀리서라도 찾아올 만하죠.]
상단 일행은 이곳에서 화전민 마을의 시체들을 화장했다.
그 냄새가 퍼져, 괴수들이 전부 몰려들었다는 게 이네스의 추측이었다.
[이안의 말처럼 에스테반의 체질이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죠?]
‘네. 일단 당장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지 생각해야겠죠……. 하지만 이렇게 한꺼번에 맞닥뜨린 게 의외로 나쁘지 않을 수도 있어요.’
레지스 산맥의 명물들이 모두 모였다.
다르게 생각하면, 명물들끼리 싸우다가 어부지리로 승리할 수도 있다는 거였다.
‘마침 위치도 우리를 둘러싼 산적들을 괴수들이 포위하는 형식이니까. 놈들은 당장 산적과 맞붙겠지. 서로가 싸우다가 지친다면, 그때가 기회야.’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괴수들이 한 발짝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동요하는 산적들에게 게르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동요하지 마! 괴수라 해봤자 조금 사나운 짐승일 뿐이야! 진형을 유지하고, 침착하게 대응해!”
게르의 외침에 산적들은 동요하면서도 자리를 지켰다.
포위당한 터라 도망갈 길이 없기도 하지만, 그만큼 게르가 산적들을 꽉 잡고 있기도 하다는 뜻이다.
게르는 이번에는 상단을 향해 외쳤다.
“동맹을 맺자! 너희들도 상황이 긴박한 건 알겠지? 함께 싸워서 살아남는다면, 너희들이 이 산을 넘을 때까지는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 나와 내 선조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게르의 제안에 상인과 용병들이 술렁였다.
그들도 산적들과 손을 잡는 게 맞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에스테반은 단호히 대답했다.
“거절한다! 나중에 상황이 바뀌면, 배신할 생각을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뭐, 뭣? 그러니까 선조의 명예에…….”
“너 같은 놈을 배출한 너희 일족에게 명예라는 게 있을 리 없지! 존재하지도 않는 걸 담보로 협상하려 들지 마라!”
에스테반의 폭언에 게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말은 거칠어도, 에스테반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방금 게르 녀석이 우리를 순식간에 구슬리려 했어. 에스테반은 내 생각보다 똑똑한 캐릭터인건가?’
[아니면 말이 안 통하는 바보던가요.]
에스테반과 게르가 설전을 벌이는 사이. 고함 소리에 자극받은 괴수들이 하나둘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시작은 피투성이 구울이었다.
“키키키.”
구울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아무런 주저도 없이 산적들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막아!”
“끄아악! 떼어줘!”
“멍청아! 뭉쳐 있는 곳에서 무기 휘두르지 마!”
구울은 산적 하나의 몸에 올라타, 목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아 넣었다.
사방에 구울의 타액과 산적들의 피가 튀었고. 그에 맞춰 다른 괴수들도 사냥을 시작했다.
기회를 보다 산적들을 물어뜯는 늑대 무리.
거대한 몸 그대로 엎어져 산적들을 깔아뭉개는 곰.
하지만 산적들도 당하고 있지만은 알았다.
“쇠뇌수들 준비!”
“옙!”
진형의 안쪽에 숨어 있던 산적들이 쇠뇌를 꺼내 들었다.
가까이에서 맞으면 갑옷조차 뚫어 버리는 무기였다.
“발사!”
파바박!
“깽!”
쇠뇌에 맞은 늑대 몇이 바닥에 쓰러졌다.
쇠뇌수들은 다른 산적들의 보호를 받으며, 능숙하게 당음 화살을 장전했다.
‘기사를 상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거지.’
산적들의 전력은 대강 파악했다.
이제는 행동에 나설 때.
이안은 황급히 에스테반에게 달려갔다.
마침 에스테반은 말을 박차 달려나갈 준비를 하려 하고 있었다.
“에스테반 경!”
“오, 스콰이어 이안! 나와 함께 첫 돌격의 명예를 누리겠나?”
“무턱대고 싸워서는 안 됩니다 경.”
“음?”
“어느 한쪽의 균형이 무너지면, 경은 몰라도 저희는 모두 위험해집니다. 일단 조금 진정하고, 제 말에 따라 싸워주시겠습니까?”
“흠…….”
에스테반은 이안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보호해야 할 자들을 모두 잃는다면, 진정한 승리는 얻을 수 없겠지. 그래 스콰이어 이안. 나는 누구랑 싸우면 되겠나?”
“지금은…….”
이안은 전장을 살폈다.
산적과 상단. 루시녹, 구울, 그레이의 오파전.
지금 밀리고 있는 곳은…….
“루시녹! 산적들의 쇠뇌수들이 늑대들을 다 죽이기 전에 방해해야 해요!”
“알았다! 가자 레이야드!”
“푸르릉!”
이안이 손가락을 가리키자, 에스테반이 쇠뇌수들을 향해 돌격했다.
산적들이 급하게 막아섰지만, 레이야드의 발길질 한꺼번에 나가떨어졌다.
방어선은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졌고, 에스테반이 날뛰는 덕에 쇠뇌수들은 제대로 조준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늑대 무리가 기세를 타고 날뛰기 시작했다.
루시녹은 에스테반이 자신들을 돕는다는 걸 아는지, 일부러 에스테반을 도와주는 움직임을 몇 번 보여주기도 했다.
설마 늑대를 도와 자신들과 싸울 줄은 몰랐는지, 게르는 벙찐 얼굴로 서 있었다.
‘좋아. 늑대들이 기세가 올랐어. 일단 구울과는 호각을 이루는 것 같으니…… 다음은 그레이다!’
이안은 에스테반이 뚫어놓은 길로 달려가 에스테반에게 외쳤다.
“에스테반 경! 이번에는 그레이 쪽입니다! 산적이 아닌, 그레이를 상대하셔야 합니다!”
거대한 곰을 상대로, 산적들은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다.
그레이의 두꺼운 가죽과 억센 털은 웬만한 날붙이로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종횡무진 전장을 유린하던 에스테반은 너무나 간단하게 산적들을 뛰어넘어 그레이에게 향했다.
“기사도 온다!”
“아, 안 돼!”
그레이를 상대하고 있던 산적들이 당황해 무기를 휘둘렀지만, 에스테반은 유유히 빠져나가 거대한 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밀리고 있던 산적들도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에스테반을 도와 그레이를 상대했다.
적이 되었다가, 아군이 되었다가, 다시 적이 되는 혼란스러운 전투.
그리고 지금 이 혼란은, 이안이 지휘하고 있었다.
“저놈이다! 저놈부터 죽여!”
산적들 사이에 꼭꼭 숨어 있던 게르가 핏발 선 눈으로 이안을 가리켰다.
상황이 개판이 되는 이유가 이안임을 바로 알아본 것이다.
“윽!”
날아오는 무기를 피해낸 이안은 곧장 에스테반이 뚫어놓은 길을 내달렸다.
이 혼란한 전장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에스테반의 옆이었으니까.
“나 잡아봐라 이 새끼들아!”
이안의 도발에 산적들은 이를 갈며 살벌하게 쫓아왔다.
하지만 이내 다른 산적들과 진형이 얽혀 버렸다.
“뭐해 이새끼들아!”
“비켜!”
“네가 곰이랑 싸우던가 그럼!”
“닥치고 비키라고!”
하지만 그레이를 상대하고 있던 산적들은 쉬이 협조해주지 않았다.
여기서 이안을 공격한다는 건 곧 에스테반을 공격한다는 것이고, 그들은 다시 저 무시무시한 곰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강적을 함께 상대하다 보니 어느새 에스테반을 향해 생겨난 기묘한 전우애.
이안은 훌륭하게 산적들 간의 내분까지 일으킨 것이다.
“좀 어떻습니까 에스테반 경!”
“아주 짜릿짜릿해! 오늘 내 모험담에 한 줄이 더 추가될 것 같군.”
“크어어어!”
그레이는 강하다.
포식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일격 하나하나가 너무나 강력했다.
아무리 에스테반이라 해도 고전을 면할 수 없었다.
쾅!
그레이가 바닥을 내리쳤고, 레이야드가 재빨리 뛰어올라 거리를 벌렸다.
에스테반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재밌어! 아주 재밌어!”
그렇게 에스테반이 그레이의 시선을 끄는 사이.
전장의 판도가 슬슬 바뀌어 가고 있었다.
“끼에에에!”
“주, 죽여!”
“몸을 산산이 조각 내! 되살아날 수도 있어!”
수많은 희생 끝에, 구울을 완전히 제압해낸 산적들이 도끼를 마구 휘둘렀다.
“키에엑……!”
구울은 소름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발악하며 타액을 사방에 뿌리다 끝내 숨을 거두었다.
명물 중에서는 가장 약했던 구울이니만큼, 예견된 일이었다.
‘이렇게 되면 산적들 쪽에 여유가 생겨 버린다.’
구울을 상대하던 병력을 어디로 돌리느냐가 큰 관건.
게르는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상단 쪽을 가리켰다.
“저 새끼들부터 죽여!”
이안의 활약에 어지간히도 열이 오른 모양.
구울을 상대하던 산적들은 명령을 듣자마자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달려들었다.
피 칠갑을 한 채 악착스럽게 달려드는 괴수보다는 용병들이 상대하기 더 편했으니가.
상황을 지켜보던 이안은 곧바로 대응했다.
“경. 아군이 위험합니다. 후퇴해야 합니다.”
“하하! 어이! 짐승 친구! 이따가 마저 붙자고! 내 뒤에 타라, 스콰이어 이안.”
“저는 말을 탈 줄…….”
에스테반은 대답도 듣지 않고 이안의 팔을 들어 올려 레이야드의 뒤에 태우고, 곧장 박차를 가했다.
엄청난 속도감에 이안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거의 레이야드에게 매달리다시피 해야 했다.
에스테반이 순식간에 전장을 뜨자, 다른 산적들이 오는 걸 막아서던 산적들이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
얼굴로는 ‘기사님, 우리를 배신 한 거예요? 우리가 다른 산적도 막아줬는데요?’ 라며 말하고 있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애초에 같은 편이 아니었던 것을.
둘은 자리를 이탈했고, 당연히 화가 난 그레이는 산적들을 덮쳤다.
에스테반은 광기어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내 생에 이렇게 다양한 적과 싸웠던 적은 처음이야! 오늘 밤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
“그것도 살아남아야 가능한 거죠!”
“음! 하지만 저 거대한 곰이랑은 꼭 결판을 내고 싶군.”
“일단 상단 쪽으로 가죠!”
레이야드가 쏜살같이 내달려, 궁지에 몰려 있던 용병들에게 당도했다.
이안은 곧장 뛰어내려, 넘어진 스튜어트를 내리찍으려 하는 용병의 뒤를 쳤다.
촤악!
용병의 등을 가르는 깔끔한 내려 베기.
“꺽!”
“씁.”
이안은 손에 느껴지는 감촉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 감각은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네.’
불쾌함.
하지만 전장의 한복판에서 음미하기에는 너무 사치스러운 감정이다.
죽을 뻔했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스튜어트가 외쳤다.
“종자님! 도와주러 오셨군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고향에 있는 메리 씨에게 청혼하려면, 살아남아야겠죠? 후딱 일어나세요.”
“클로라입니다.”
“아무튼요.”
스튜어트는 곧장 일어났지만, 이미 전장의 판도는 많이 기울어 가고 있었다.
산적들은 잇따른 전투로 이미 절반 가까이가 전투 불능이 되었고, 무엇보다 에스테반과 그레이는 규격 외의 존재였다.
잘 훈련된 정규군도 이런 상황에는 이탈자가 생기기 마련.
하물며 산적이면 말할 것도 없다.
“아, 안 돼. 도망쳐야 해!”
“이대로는 다 죽어!”
“다들 어디로 가는 거야! 이탈하지 마! 여기서 흩어지면 다 죽는다!”
게르가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이미 전의를 모두 상실한 순간.
의미 없는 외침이었다.
“도망치지 말…… 억!”
몸으로라도 이탈을 막으려던 게르의 몸이 산적과 부딪혀 전열 밖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그 틈을 타, 푸른 갈기를 가진 늑대가 뛰어들어 게르를 낚아챘다.
“이, 이거 놔!”
루시녹은 몸 이곳저곳에 화살을 맞거나 상처가 나 있었다.
늑대 무리도 산적만큼이나 피해가 심각했다.
“끄아악!”
우득.
루시녹은 게르를 한입에 씹어 버렸다.
세치 혀를 잘 놀린다 하나, 괴수에게는 인간의 언어가 안 통하는 법.
게르 자신에게는 참으로 억울한 죽음이었다.
“크릉.”
게르를 뼈째로 씹어 삼킨 루시녹은 한쪽에서 날뛰는 그레이를 쳐다봤다.
그러고 에스테반과 이안을 쳐다보더니, 이내 절뚝거리며 흩어지는 산적들을 쫓기 시작했다.
영리한 루시녹은 전장 이탈을 선택했다.
‘이제 상황이 단순해졌어. 그레이를 우리가 이길 수 있느냐, 마냐 그 싸움이야.’
솔직히.
확신할 수가 없었다.
게임 수치상으로 보면, 에스테반은 확실히 강자다.
실력도 뛰어나고, 그 잠재력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1년차.
에스테반의 실력이 충분히 여물지 않은 시간대다.
게다가 상대는 포식자 그레이다.
백 년을 살아온 이 거대한 곰은 인간의 두려움을 먹으며 흉포하고 강력한 괴수가 되었다.
원래는 이 지역의 보스 개념으로, 애초에 혼자서 잡으라고 설계된 괴수가 아니었다.
‘그런 걸 상대로 에스테반이 혼자서 이길 수 있을까?’
솔직히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남아 있는 용병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터.
그때, 이네스가 이안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안은 같이 싸우지 않는 건가요?]
‘저는…… 아직 내려 베기랑 찌르기밖에 못하는 데요?’
[그럼 에스테반이 혼자서 싸우게 내버려 둘 셈인가요?]
서늘하게 찔러 오는 목소리.
이안은 저도 모르게 굳어 버렸다.
이네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안에는 항거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있었다.
‘그렇다면…….’
[무모하게 나가서 싸우라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언제든 긴장을 놓치 않고, 대비하고 있어야 해요.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제대로 거머쥐기 위해서라면.]
요는 스스로의 운명을 완전히 다른 사람에게 맡겨 두지 말란 것.
확실히.
그레이와의 전투에서 이안은 전혀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실력 차이는 명확하고, 그가 끼어들어봤자 방해밖에 안 되었으니까.
아니,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레이를 상대할 수 있는 꼼수는 몇 개가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보스로 설정된 괴수다.
그 하나하나가 별로 큰 의미를 가지긴 힘들었다.
도리어 에스테반의 신경만 거스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안은 숨을 죽이고. 정신을 집중하며. 천천히 기다렸다.
때가 오기를.
“크헝!”
쾅!
그레이가 거대한 앞발을 지면에 내리치자, 흙과 돌 따위가 비산했다.
에스테반과 레이야드는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달빛 아래에서 에스테반과 그레이가 수 합을 겨루었다.
그레이의 공격은 재빠른 에스테반에게 닿지 못했다.
에스테반의 검은 몇 번 닿았지만, 그레이의 두꺼운 가죽과 털을 뚫어내지 못했다.
언뜻 봐서는 호각.
하지만 보는 모두가 에스테반이 불리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기사라도 저런 거 한테 한 대 맞으면 끝이야.’
공격을 단 한 번만 허용해도, 그 즉시 전투 불능이다.
에스테반은 높다란 벼랑 위에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에스테반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하! 참으로 질기구나! 이거, 곤란하군.”
아무리 강하다 해도 에스테반도 결국은 인간이다.
싸우면 지치고, 체력에는 결국 한계가 있다.
이대로 시간이 끌리면 패배라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에스테반은 마지막 한 수를 사용하기로 했다.
“뒤로 물러나라, 레이야드.”
“푸르르.”
에스테반은 레이야드에서 뛰어내렸다.
양손으로 롱소드를 강하게 쥐었고. 두 눈은 굳게 감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뭐, 뭔?”
“포기한 건가?”
하지만 이네스만이 차분하게 말했다.
[기회가 올 거예요 이안. 준비하세요.]
‘예?’
그 순간.
푸른빛 빛무리가 에스테반의 검신을 감쌌다.
에스테반의 눈동자 색이 연상되는, 신비로우면서도 어딘가 광기 어린 푸른빛.
이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검광(劍光)…….”
경지에 다다른 검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기.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는 파멸의 빛.
하지만 검에 서린 빛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직 에스테반의 검광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증거.
기껏해야 한 합이나 휘두를 수 있을까.
어쨌든 에스테반은 땅을 박찼다.
한 번의 승부에 모든 걸 걸고, 높이 뛰어올랐다.
“크워어어!”
그레이가 포효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그 앞발을 향해 에스테반도 검을 휘둘렀다.
“아아…….”
용병들이 탄식을 내질렀다.
이 공방의 결과가 눈에 보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서걱.
“쿠워어어!”
빛에 닿은 그레이의 앞발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동시에 에스테반의 코에서 피가 울컥 솟아 나왔다.
그 잠깐 사이, 벌써 한계에 다다랐다는 증거.
검에 서린 빛무리도 그 밝기를 많이 잃었다.
그렇기에 에스테반은 멈추지 않고, 공중에서 크게 돌며, 마지막 일격을 휘둘렀다.
노리는 건 목!
“끝이다!”
쩌렁쩌렁한 기합과 함께 롱소드가 그레이의 목을 한 번에 베어낼 기세로 휘둘러졌다.
부드럽게 잘려나가는 털. 그다음은 가죽. 그다음은…….
팍!
“……!”
거대한 곰의 급소. 그 바로 앞에서. 검에 서린 빛무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털도 베었고, 가죽도 갈랐다.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백 년 먹은 괴수를 죽일 수 없다.
다시 검을 돌려 마무리를 할까?
하지만 불가능하다.
에스테반은 남은 체력이 없다.
검을 다시 휘두르기 전에 바로 눈앞에 쩍―하고 벌려진 아가리가 에스테반의 머리를 으깨 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에스테반은 마지막 힘을 다해 외쳤다.
“스콰이어 이안!”
[이안! 지금이에요!]
에스테반과 이네스가 외치기 전.
이안은 이미 성검을 꼬나쥐고, 자세를 낮춰 그레이에게 파고들고 있었다.
목표는 에스테반이 열어 놓은 길. 그 길을 뚫어내는 것.
‘기회는 한 번이다.’
궁지에 몰린 그레이는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른바 광폭화 패턴.
공략 난이도를 빌어먹게 어렵도록 만드는 패턴이었다.
하지만 공략법은 있었다.
광폭화하기 전에 일격에 죽이는 것.
‘한점을 향해 정확하게 내지른다.’
한점에 모든 위력을 집중하는 찌르기는 가장 날카로운 일격이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적절하고, 필요한 공격.
이안은 생각을 비우고, 무수히 연습했었던 동작을 몸으로 펼쳐냈다.
“흡!”
이안이 내지른 성검이 곧은 직선을 그리며 나아갔고…….
푹!
벌려진 상처를 파고든 성검의 날 끝이 그레이의 머리 안쪽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