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7화 (18/222)

17. 바람 같은 사내

이안의 제안에 벙쪄서 멍하니 서 있는 녹스.

이안은 순순히 오른손에 들린 목검을 녹스에게 던져주었다.

“받아.”

“…….”

방금의 일합으로 모든 계산이 끝났다.

녹스의 신체 능력은 이안에 비교해 형편없으며, 그걸 뒤집을 정도의 기술적 숙련도도 없다.

하위 귀족의 한계였다.

“이…….”

녹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엄청난 모욕을 겪었다는 건 잘 알았다.

녹스는 다시 검을 들어 달려들었고, 다시 한번 이안의 손에 붙잡혔다.

“놔! 놔라! 나를 모욕하지 마!”

얼굴이 새빨개진 녹스가 처절하게 외쳤다. 하다못해 검에 맞아 쓰러졌다면, 비통함이 덜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덤벼들던 녹스는 결국 체력이 다해 바닥에 뻗어 버렸다.

당혹감과 경악이 섞인 분위기가 짙게 내려앉았다.

“세, 세상에.”

“녹스 도련님이…….”

모두가 경악하고 있을 때 단 한 사람. 헤더 페어윈드만이 만족스레 미소를 지으며 박수를 쳤다.

짝짝짝!

“하하. 훌륭한 결투였습니다. 설마 이안 씨가 이길 줄이야. 상상도 못 했네요.”

뭐가 그리 좋은지. 혼자서 큭큭 웃음을 흘리던 헤더가 선언했다.

“지극히 정당한 결투였고, 과정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양쪽 다 동의하시죠?”

“예.”

“…….”

“녹스 씨도 잘 싸워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년도 코르디스에 입학하는 건 포기해야겠죠?”

“그런…….”

“본인이 한 말이 있는데, 설마 뻔뻔하게 지원하실 건가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페어윈드라는 가문의 위세 때문인지.

헤더의 말에는 묘한 박력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결국. 녹스는 고개를 푹 숙이며 그렇게 선언했다.

***

결투가 끝나고, 구경꾼들은 우수수 해산했다.

녹스와 그 부모는 당연히 창피해서. 다른 귀족은 이안에게 괜히 시비가 걸릴까 봐.

다만, 평민들은 이안이 이긴 게 못내 기쁜 모양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를 대신해서…….”

“설마 이길 줄은 몰랐어요. 평민이 귀족을 이기다니. 동화 속 이야기 같네요.”

“멍청아. 진짜 평민이겠냐. 이름을 숨긴 귀족가 출신이시지요?”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리고 평민 신분.

여러모로 최악의 조건.

근데 그런 사내가 귀족을 순수 힘으로 이겨 버렸다.

그들은 여태껏 믿어왔던 상식을 완전히 부정하느니, 이안이 귀족가의 자식이라고 생각하는 걸 택했다.

이네스는 그들의 모습이 짠하다는 듯,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실제로 귀족들은 그런 믿음을 당연하게 퍼트립니다. 마법이나 정령술, 검광 같은 신비는 오로지 귀족의 전유물이며, 가끔 그런 신비를 다루는 평민이 나온다면 그건 귀족의 사생아라고.]

이곳에서는 믿음이 곧 힘을 얻는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강한 믿음은 현실에 영향을 주어 진짜가 되어 버린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거나. 다리를 떨면 복이 나간다거나.

현실이었으면 전부 허무맹랑한 미신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미신들이 힘을 발휘한다.

‘묘한 설정이었지.’

이안이 크레이 사가를 플레이할 당시에도 느꼈었던 기분.

실제로 ‘다리 떨기’라는 상호작용을 하면, 잠시 동안 행운 능력치가 낮아지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스터 에그 정도로 생각했었지만…….

어쨌든, 평민들은 이안의 출신을 멋대로 망상한 뒤. 대답을 듣지도 않고 연무장을 떠나 버렸다.

내심 이안의 결투가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기를 바랐지만, 그러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되니 결국 연무장에 남은 건 이안과 헤더뿐이었다.

헤더는 어째선지 이안을 기다려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던 것들을 부정하기 싫어하는 법이죠. 이안 씨가 평민이란 건 거짓말이 아니죠?”

“예. 그렇죠 뭐.”

“역시. 하지만 그렇기에 저는 더 흥미가 생기네요. 어떻게 그런 근력을 얻게 된 거죠? 타고났다…… 하기에는 조금 부자연스러운 느낌인데요.”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 선배라고 해도,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사람한테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낌새를 알아챘는지 헤더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멀어져가는 평민들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참 불쌍하죠. 저들은 대부분 사망할 겁니다. 코르디스의 입학시험은 평민에게 특히 더 가혹하니까요. 살아 돌아오는 쪽이 훨씬 적죠.”

“코르디스에서 사망률도 알려주나요?”

“아뇨. 하지만 배를 타고 코르디스에 입학시험으로 떠났던 이가 돌아오는 배를 안 탄다면, 그 결과는 뻔하지 않겠어요?”

이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의 아들인 헤더다. 그 정도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을 터.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오늘 형편없이 깨진 녹스 씨의 심정을 이해할 수도 있죠.”

“예?”

“녹스 씨는 어렸을 적에 가족처럼 지낸 평민 친우가 있었습니다. 가문을 섬기는 시종의 아들이었죠. 나이가 비슷했던 둘은 형제나 다름없이 자랐습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이안은 뭐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헤더는 신경 쓰지 않으며 혼자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비극이 일어납니다. 친우의 검 솜씨가 제법 훌륭했던 거죠. 게다가 그 부모는 신분 상승에 대한 야망이 있었습니다. 만약 코르디스에 합격한다면, 가문에 충성하는 조건으로 시험을 보러 갔고…… 안타깝게 목숨을 잃고 맙니다.”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

헤더는 과장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늘 일도, 사실은 녹스 씨가 단순히 성격이 개차반이라 주위에 시비를 건 게 아니었습니다. 저 지원자들에게서, 옛 친우의 얼굴을 겹쳐보아 비극이 되풀이되는 걸 막으려 한 것이죠.”

이안은 떨떠름하게 물었다.

“어, 음. 그런 사연이 있었나요?”

“아뇨. 제가 방금 지어낸 겁니다.”

“……네?”

“그냥 녹스 씨의 성격이 개차반이라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재밌지 않나요?”

살짝 미안한 감정이 생길 뻔했던 이안은 어이가 없어, 헤더를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헤더는 싱긋 미소지었다.

“세상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언제나 그 너머를 상상하는 건 즐거운 일이죠. 어쨌든 오늘은 즐거웠습니다. 귀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길이라도 잃었는지 당최 오질 않더라고요. 덕분에 시간을 잘 때울 수 있었어요.”

“예…….”

“혹시 여기에서나 코르디스에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저를 찾아주세요. 이래 봬도, 그 정도 능력은 있는지라.”

그렇게 말하며 헤더는 검지 손가락을 휙 들어 올렸다.

그러자 순풍이 불어닥쳐 이안의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연무장이 실내라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현상.

바람이 그치고 이안이 다시 눈을 떴을 때, 헤더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그거…… 마법이었죠?’

[예. 페어윈드는 바람 마법으로도 유명한 가문이니까요.]

‘흠.’

헤더 페어윈드.

적어도 이안의 기억 속에는 없는 캐릭터였다.

그 말은 둘 중 하나였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캐릭터거나, 게임 속에서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 캐릭터거나.

‘후자여도 별로 중요하지는 않다는 뜻이겠지만…….’

어쨌든 헤더는 그가 다루는 바람 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인 듯했다.

‘일단 호감을 산 듯하니, 좋은 게 좋은 거겠죠.’

금방 상념을 털어낸 이안은 다시 접수처로 향했다.

아까와는 달리, 대기자들은 없었기에 금방 시험 접수를 마칠 수 있었다.

“접수비는 금화 한 닢입니다.”

“여, 여깄습니다.”

자루에서 피 같은 동전을 꺼낸 이안의 손에서, 직원이 잽싸게 채가며 말했다.

“다음 달 세 번째 월요일 아침에 이곳으로 와주세요. 이곳에 참가자 전부 모여서 코르디스로 향하는 배에 탈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삼 일 전쯤에 이곳에 다시 들러주세요. 혹시 날씨 때문에 배 뜨는 날짜가 바뀔 수 있거든요.”

이안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겨우 입학시험 따위에 금화를 한 개나 받아 처먹는 건 너무 억울했다.

‘양아치 새끼들.’

[나쁜 말! 그리고 학비는 더 들 텐데, 벌써부터 그러면 어떡하나요.]

‘어차피 코르디스에는 길어야 1학기 정도 있을 거예요.’

코르디스에서 아예 졸업까지 하는 성장 방법도 있지만,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이안은 코르디스에서 얻을 수 있는 단물만 쏙 빼 먹은 뒤, 학교를 자퇴할 생각이었다.

‘이제 남은 기간 동안은 입학 시험 준비를 해야겠어요. 난이도가 빡세니까, 준비할 것도 많고요.’

[한동안은 단련에 집중할 수 있겠네요.]

‘예, 뭐. 그렇죠.’

떨떠름하게 대답한 이안은 건물을 나섰다.

앞으로 한동안은 괴로운 시간들이 이어질 것 같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

다시 여관에 돌아가 육체 단련을 하기 전에, 이안은 도시를 한번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게임 속 지리와 똑같은지 일단 살펴보고 싶었고, 이네스가 도시를 둘러보길 강력히 원하기도 했다.

[으음. 좋네요. 마치 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에요.]

‘이백 살 전이요?’

[이백 살이라 하지 말고, 이백 년이라 하세요. 죽은 후에 나이를 세는 경우가 어딨어요!]

드물게도 격한 반응이 튀어나오자, 찔끔한 이안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와아. 예전이랑 비교하면 참 많이 변했네요.]

이백 년이라는 시간을 성검 속에 홀로 지내오던 이네스다.

그동안의 답답함에 대한 설욕이라도 풀려는 듯, 이네스는 이안에게 이곳저곳 움직이라고 요구해댔다.

[방학이 시작되는 날에는 친구들끼리 이렇게 도시에 나와 다 같이 놀러 다니곤 했어요.]

‘이네스 님이 놀러다니는 모습이라니, 잘 상상이 안 되네요.’

어딜 가든 눈에 띌 외모다. 분명 행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을 터.

추억에 잠긴 이네스는 조금 들뜬 어조로 말했다.

[좋네요. 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추억이 새록새록 하게 떠올라요. 아마 저에게는 그때가 마지막으로 즐겁고 평온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 뒤로 동료들과 함께 악마를 토벌하기 위한 여정에 떠났거든요.]

‘아…….’

이안은 새삼 이네스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네스의 모험은 전설이 되어 이 세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안은 그것들에 대해 하나도 하나도 모르니. 이 얼마나 무신경한 사람인가.

하지만 이네스는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자신이 죽고 나서 세계가 어떻게 되었는지. 자신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되는지. 동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처음 만났을 때.

이안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에는 충격을 받았었지만, 함께 여정을 시작하고 나서 그런 쪽으로는 단 한 번도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안은 그 부분에서 자신의 세심함이 부족했음을 깨닫고, 이네스에게 조심히 물어봤다.

‘저…… 혹시 이네스 님에 대한 이야기를 좀 찾아볼까요? 그 후에 동료들이 어떻게 되었다던가……?’

이안의 질문에도 이네스는 답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졌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네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뇨. 이제 끝난 일인데요 뭘. 다들 잘 살다가, 행복하게 여생을 마무리했을 거예요. 분명.]

그렇게 말하는 이네스의 목소리에는 슬픔과 후회가 깃들어있었다.

무엇에 대한 슬픔이고. 무엇에 대한 후회일까.

이안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있던 그때. 앞쪽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사, 살려만 주세요.”

“산채로 태우는 것만큼은……!”

으슥한 뒷골목.

아름다운 소녀를 왈패들 여럿이 둘러싸고 있었다.

부드럽게 웨이브 진 머리는 불길을 연상케 하는 붉은색으로, 왼쪽 귀 위에서 묶어 내린 포니테일.

눈동자는 붉은색에 가까운 주황색이었는데, 눈매가 올라가 있어 전체적으로 인상이 날카로워 보였다.

키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딱 평균 정도.

여기까지만 보면 둘러싸고 있는 왈패들이 가녀린 소녀를 핍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상황은 반대였다.

소녀의 주위에는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덩이가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이미 왈패들의 머리카락은 반쯤 타 버린 상태.

“여기서 내가 너희들을 살려줘야 할 타당한 이유를 말해. 그러면 살려줄지 말지 고민은 해볼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살벌한 말을 쏟아낸 소녀는 허공에 떠다니는 불꽃을 더더욱 키웠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안은 떨떠름하게 턱을 긁적였다.

‘넌 또 왜 여기서 나오니?’

반드시 동료로 삼아야 하는 최고 성능의 캐릭터를 지금, 맞닥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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