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넌 또 여기서 왜 나와
플로라 피에람.
게임 내에 등장하는 모든 화염 계열 마법사 중에 가장 뛰어나며, 두루두루 쓸모가 많아 플레이어들이 애용하는 인기 캐릭터.
동료가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한번 동료가 되면 파티의 화력 문제는 해결되는 먼치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플로라의 호감을 사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호감도를 얻어, 관련 퀘스트를 진행하지 않으면 타락해 버리지.’
플로라는 그냥 놔두면 적이 되어 버린다.
이안이 대충 기억하는 바로, 플로라가 속한 피에람 가문은 힘은 있을지언정, 뒤가 매우 구린 가문이었다.
가문의 지하에 악마 같은 걸 가두고 있었으니, 그 가문에서 자고 나란 아이가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어쨌든. 크레이 사가의 플레이어들은 좋든 싫든 플로라의 호감도를 쌓고, 플로라가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해야 했다.
‘적으로 돌아선 플로라는 불합리할 정도로 강하니까.’
이안이 다른 모든 걸 제쳐두고 코르디스에 입학하려는 이유도 플로라 때문이 컸다.
그나마 코르디스에 있을 때가 친분을 쌓아 호감도를 얻기 쉽기 때문.
[…….]
이안이 그렇게 당황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네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이안은 우선 당면한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상황은 대충 예상이 간다.
이 아가씨가 왜 혼자 다니는지, 또 왜 이런 뒷골목으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 한량 무리들과 마주쳤을 것이다.
당연히 옆에 아리따운 소녀가 무방비하게 지나가니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추파를 날렸을 터.
‘아니면 납치해서 팔아먹으려고 하거나.’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아직 재능이 완전히 개화하지 않았음에도 혼자서 괴수 수십을 불태울 수 있는 소녀다.
고작 뒷골목 왈패들이 비벼볼 만한 상대가 아니다.
치이익.
“끄아악. 그, 그만둬주세요!”
“그만둬? 그러니까 왜 그만둬야 하는지 설명을 해보라니까?”
잔뜩 심통이 난 플로라는 사내의 머리카락을 위에서부터 서서히 태우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동료들은 도망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주위에 둥둥 떠다니는 불덩이 때문에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개입을 해야 하느냐가 문제네.’
왈패들이 괜히 플로라를 건드렸다가 된통 당하는 모양새.
차라리 상황이 반대였으면 고민 없이 끼어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오히려 안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그래도 사람을 산채로 태우는 건 말려야 하지 않겠어요. 저 아이를 위해서라도.]
한참 만에 입을 연 이네스의 의견에 이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성향이 그쪽으로 넘어가면 곤란하죠.’
플로라는 플레이어가 하기에 따라 동료가 될 수 있다. 반대로 말하면, 플로라를 그냥 놔두면 반드시 적이 된다는 의미다.
사람의 성향이라는 건 그 행동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처음에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태우는 데에 그치던 게 그다음은 팔다리를. 그다음은 목숨을.
그렇게 한 단계씩 올라가다 보면, 사람은 쉽게 괴물이 되어 버릴 수 있다.
‘다른 건 괜찮아도. 저 불꽃이 나한테 날아오는 미래만큼은 막아야 해.’
지금 자그마한 불씨가 무서워 피해 버린다면, 훗날 커다란 불덩이가 되어 이안을 덮칠 것이다.
결심을 굳힌 이안이 왈패들을 향해 다가갔다.
“뭐야? 너도 얘네들이랑 한패야?”
이안이 다가가자 플로가가 경계의 기색을 띄며 노려봤다.
하지만 이안은 플로라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 맹렬하게 달려가…… 무릎 꿇고 있던 왈패의 가슴을 걷어찼다.
뻑!
갑자기 얻어맞은 사내가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컥!”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뻑!
“여기가 어디라고 대낮부터 말이야!”
뻑!
“개수작을 부리고 있어!”
뻑!
무자비한 구타가 사내에게 퍼부어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떨고 있던 왈패들도, 머리카락을 플로라도 멍하니 이안이 하는 세를 쳐다봤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린 플로라 외쳤다.
“뭐하는 거야!”
“말리지 마! 이런 새끼는 좀 맞아야 해!”
“아니, 말리는 게 아니라……!”
플로라가 무슨 말을 하던, 이안은 왈패의 가슴을 걷어찼다.
너무 강하지는 않게. 하지만 충분히 타격음이 들릴 정도로.
갑작스럽게 얻어맞게 된 왈패는 신음을 흘리며 이리저리 바닥을 굴렀다.
‘미안하다 친구야. 아니. 사실 미안하지는 않아. 자업자득이니까. 그리고 평생 대머리로 사는 것보다는 갈비뼈 좀 부러지는 게 낫지.’
구타가 계속 이어지고. 사내의 반응도 점점 희미해질 때쯤.
참다못한 플로라가 빽 외쳤다.
“그만! 그만하면 됐잖아!”
“아니. 쓰레기 새끼들은 보이는 족족 밟아야 해!”
“내가 됐다고 하잖아!”
그제야 이안은 구타를 멈췄다. 플로라의 표정을 보니 당혹감이 어려 있었다.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옆에서 대신 화를 크게 내버리면 자기가 화를 내기가 애매해지지.’
이안은 아직 화가 났다는 걸 표정으로 연기하며, 플로라에게 물었다.
“이 새끼들이 시비 건 거 아니야? 너 잘못하면 잡혀서 팔려갈 수도 있었어.”
“저, 저희는 거기까지는……!”
“어허. 누구 맘대로 말하라고 했어.”
“그러니까! 나는 이제 괜찮다니까?”
이안이 다시 주먹을 들 기세자, 플로라가 급하게 말했다.
아직 그 나잇대 소녀에 걸맞게, 누군가가 심하게 다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안 좋은 모양.
이안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그럼 용서하는 거야?”
“그래! 용서할 테니까 그만해!”
“들었지? 너희들은 오늘 운이 아주 좋은 거야. 얘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면, 여기서 오늘 다 죽었어야 할 목숨이지. 다들 일어나서 얘한테 고맙다고 하고, 다음에 또 이런 일 하다 걸리면 알지?”
“아, 알겠습니다!”
왈패들은 일제히 일어나, 이네스에게 고개를 90도로 꺾었다.
“용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으, 응.”
“그래. 기절한 니네 친구 데리고, 빨랑 꺼져라.”
왈패들은 신속하게 동료를 업고, 골목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마 동료를 데리고 복수하러 올 일은 없을 것이다.
머리 위에 둥둥 떠다니는 불덩이를 보고도 다시 덤빌 생각을 하는 눈치 없는 놈들은, 진즉에 다 죽어 없어졌을 테니까.
왈패들이 다 사라지자, 그제야 플로라는 언짢은 표정을 했다.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속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플로라가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
“너. 뭐야. 뭔데 갑자기 끼어드는 거야.”
“이안.”
“이름 물어본 게 아니거든?”
“내년에 코르디스 입학할 사람이다.”
“코, 코르디스?”
“그래.”
“너 귀족이었어?”
“아니.”
플로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귀족도 아니면서 어떻게 코르디스에 입학한다는 거야!”
“뭐 귀족만 입학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아니…… 그. 하. 말을 말자. 어차피 더 볼일도 없는 인간인데.”
“볼일이 없긴. 너도 코르디스 갈 거잖아.”
“뭐? 그건 어떻게 아는데!”
“어려 보이는 마법사가 이 근방에서 서성대면, 뻔하지 뭐.”
순간 경계의 기색을 띠던 플로라는 미리 준비한 이안의 대답에 납득했다.
플로라는 팔짱을 끼고 턱 끝을 살짝 들며, 새침하게 말했다.
“흥. 그래도 너랑 볼 일 없어.”
“왜.”
“너 같은 놈이 입학 시험에 합격할 리가 없잖아?”
‘이런 싸가지 없는…….’
원래였다면 열 살 이상 차이 나는 여자애에게 비웃음 당한 셈이다.
순간 욱한 이안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반드시 친해져야 할 상대고. 무엇보다 지금 싸우면 무조건 진다.
이안은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아닌데? 나 무조건 합격할 건데?”
[어린애인가요? 제발 성검의 주인이라는 자각을 가지세요.]
“흥. 누구나 말은 쉽게 하지. 그리고 설령 합격한다 해도, 난 어퍼 클래스라 마주칠 일 없을걸? 아니, 무조건 없어!”
코르디스는 성적에 따라 두 클라스로 나뉜다. 어퍼클래스와 사이드 클래스.
당연히 이안이 노리는 건 전자였다.
“나도 어퍼 클래스 갈 건데?”
이네스의 만류에도 이안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서는 건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좀 애 같으면 어떤가.
지금 신체 나이는 애가 맞는데.
하지만 이안의 대답에 플로라는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뭐? 푸핫. 근 100년간 평민이 어퍼 클래스에 간 적 없거든? 그것도 몰라?”
“그래서 뭐. 그게 어쨌는데.”
“어쩌긴 뭘 어째. 멍청이야? 넌 안 될 거라고.”
톡 쏘아붙이는 플로라의 말에 이안이 슬며시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질 걸 알기에 그럴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참으세요 이안.]
‘예. 좋은 집안에서 오냐오냐 자라면 그럴 수 있죠. 인성이야 차차 교정해나가면 되는 부분이고요.’
그래도 지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안은 플로라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합격하면 어떡할 건데.”
“뭐?”
“내가 어퍼 클래스에 합격하면 어쩔 거냐고.”
생각보다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플로라가 이안의 아래위를 살폈다.
뭐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하는 표정.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이안에게서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눈에 띄는 건 꺼림칙한 머리와 눈 색깔 정도인데, 그건 해가 되면 됐지. 절대 이점은 아니었다.
결국. 자기 객관화가 안 된 평민이 쓸데없이 허세 부리는 거라 판단한 플로라는 가볍게 말했다.
“흥. 그러면 부탁이든 뭐든 들어줄게.”
절대 합격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가볍게 뱉은 약속.
하지만 이안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덥석 물었다.
“좋아.”
“응?”
“내가 합격하면, 그 브로치. 나한테 줘.”
“뭐…….뭐?”
“브로치 예쁘네. 마음에 들었어.”
플로라의 가슴께에 달린, 새빨간 보석으로 만들어진 브로치.
이안은 저 브로치가 어떤 아이템인지 잘 알았다.
이안이 구체적으로 요구해오자, 플로라는 조금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적당히 던진 말을 이렇게 받아 버릴 줄은 몰랐던 것.
“왜. 겁나냐? 지금 생각하니 내가 합격할 것 같아? 무서운 거야? 무서우면 말고.”
“…….”
하지만 옆에서 깐족거리는 이안에게 이제 와서 무르자고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조, 좋아. 절대로 그럴 일은 없지만, 그 내기 받아들일게.”
“설마 나중에 추하게 딴소리하는 거 아니지?”
“그럴 리 없어!”
빽 소리치는 플로라를 보며 이안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어린 애는 속여먹기가 쉽다니까.’
재능이 어떻든, 가문이 어떻든. 아직은 17살밖에 안 된 소녀다.
적당히 도발만 좀 해주면, 이렇게 쉽게 넘어오는 법이다.
[어린아이를 속여놓고 좋아하는 건 좀…….]
‘정당한 내기일 뿐이에요.’
내기야 어쨌든. 뜻하지 않게 플로라와 인연이 생겼다.
이건 이안이 예상치 못했던 큰 수확이다.
“아무튼 다음에 코르디스에서 보자고.”
“흥. 볼 일 없거든?”
새침하게 대꾸하는 플로라를 보며 어깨를 으쓱인 이안은, 이내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다시 종종 걸음으로 달려온 플로라가 이안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왜.”
그러곤 한참을 뜸을 들이다 말했다.
“……나 길 잃었어.”
“…….”
이안은 플로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플로라는 황급히 고개를 내리깔았다.
“아니. 너네 집 메이드나 호위는.”
“……자꾸 이것저것 참견해서 몰래 빠져나왔어.”
이안의 마음속에서 막연하게 맴돌고 있던 감정이 확신이 되었다.
이 아가씨. 허당 끼가 있다.
이안은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는데.”
“……코르디스. 폭풍 대피소.”
‘헤더가 중요한 손님을 기다린다 했더니, 그게 얘였구만.’
상황을 대충 이해 한 이안은 앞장서서 걸어나갔고. 그 뒤를 플로라가 급하게 따랐다.
부끄러운지, 잠시 말없이 따라오던 플로라가 막 생각났다는 듯.
이안에게 쏘아붙였다.
“근데 왜 자꾸 반말하는 거야? 평민이면 귀족에 대한 예를 갖춰야지!”
“뭐래 쥐방울만 한 게.”
“쥐, 쥐방울?”
금지옥엽으로 자란 플로라가 아마 처음으로 들었을 모욕.
플로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너. 너어…… 감히…….”
“싫으면 여기서 버리고 간다?”
“…….”
이안을 한참을 노려보던 플로라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씨이…… 여기서 나가기만 해봐.”
“진짜 버리고 간다?”
“아, 아무 말도 안 했거든!”
플로라 피에람.
세계관 내의 가장 재능있는 캐릭터이자, 적이 되면 가장 골치 아픈 캐릭터.
하지만 지금은 다루기 쉬운 소녀일 뿐이다.
이안은 그 사실에 안도했다.
만약 플로라를 동료로 삼기 불가능하다고 판단되고. 그녀의 타락을 막기 힘들었다고 판단된다면.
이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새싹이 그 재능을 개화하기 전에 잘라 버릴 생각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