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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9화 (20/222)

19. 들어 올리다

플로라와 친해지지 못하면 죽여라.

모든 크레이 사가 플레이어들이 공감하는 문장이다.

물론 플로라를 죽이면 뒤따르는 페널티는 만만치 않다. 곧장 추격자가 붙으며, 도시에서는 활동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애초에 죽이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고.

하지만 그 모든 리스크를 감수하는 이유는, 완전한 상태의 플로라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마음은 안 좋지만…….’

어린 소녀를 죽인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성의 많은 부분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지난 10개월 동안 이안은 변했다.

배고픔과 아픔, 죽을 위기를 늘 옆에 두고 살았기에. 오히려 삶에 대한 강한 열망이 피어올랐다.

만약 상황이 어렵다고 판단하면, 이안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플로라를 죽일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다면 인간성마저도 버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될 일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오늘 본 플로라는 조금 싸가지 없는 귀족 아가씨였지만, 그래도 나쁜 인간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결국, 미래는 이안이 하기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이안은 그런 생각을 하며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함께한 시간 동안 이네스가 이안의 많은 걸 알게 된 만큼.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생각을 하면 길길이 날뛸 거라는 것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안은 조용히 생각을 멈추고, 머릿속에 집중했다.

정신이 연결되어 있는 만큼, 이네스의 감정이 희미하게 전해져왔다.

아련함과 그리움. 회한.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

그제야 이안은 이네스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는 걸 깨닫고 물었다.

‘이네스 님?’

이안이 여러 차례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이네스는 입을 열었다.

[아. 저도 모르게 생각에 빠져 있었네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시나요.’

[그냥 이것저것이요.]

‘혹시 플로라 때문인가요?’

이안은 이네스가 플로라와 헤어지고부터 유독 말이 없었던 걸 예리하게 알아챘다.

이네스도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예. 상당히 놀랐어요. 그도 그럴 게, 저 아이가 제 옛 동료의 후손이거든요.]

‘예?’

[로잘리아 피에람. 저와 함께 악마를 무찔렀던 화염 마법사의 이름이에요.]

‘피에람이라면…….’

[예. 그때 당시에도 대륙에서 손꼽히는 화염 마법사 가문이니, 악마를 무찌른 이후에는 더 권세를 떨쳤겠죠? 그나저나 피에람 가문의 피는 매우 진한가 보네요. 어쩜 로잘리아랑 저리 닮았는지…… 깜짝 놀랐어요.]

피에람 가문을 대충 권세 있는 가문 정도로 생각하던 이안이다.

근데 대악마를 무찌른 결사대의 일원을 배출한 가문이란다.

‘생각보다 더 급 높은 아가씨였네요…….’

[어쨌든 오랜만에 동료를 다시 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네요. 저 아이를 나중에 동료로 삼는다고 했던가요?]

‘예. 일단 그렇게 계획은 하고 있어요.’

[음. 그 계획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보죠.]

‘예?’

[오늘은 일단 도시를 더 둘러볼까요?]

그렇게 억지로 화제를 돌리는 이네스의 목소리에는 묘하게 힘이 없었다.

자신은 악마와의 싸움에서 죽었지만, 동료는 살아남아 가정을 꾸린걸 보고 회한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동료들과 풀지 못한 일이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이안은 일부러 모른 척 해주었다.

‘그럼 좀만 더 둘러보죠.’

[예. 아직 해가 질 때까지는 시간이 많으니까요.]

시간은 많다.

아직 서로가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얘기들도, 언젠가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다.

이네스가 그러했듯. 이안도 그날이 올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

입학시험까지는 아직 3주의 시간이 남아 있다.

이안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두고 고민했다.

‘용병 의뢰를 빠르게 해서 돈을 더 벌어? 아니면 몸 만드는 데에 집중해?’

이안은 묵직한 금화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괜스레 자루를 흔들어, 동전들이 부딪치는 소리를 음미했다.

팅. 팅팅.

마음이 절로 풍족해지는 소리. 그렇게 한참을 듣고 있자, 보다 못한 이네스가 말했다.

[지금 완전 이야기 속에 나오는 악독한 구두쇠 같은 거 알아요? 아예 돈 냄새도 맡지 그래요?]

‘음. 그거 괜찮은데요?’

이안이 진짜 자루를 열어 냄새를 맡으려 하자, 이네스가 질색했다.

다시 자루를 내려놓은 이안은 조금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이제 등록금이나 입학 시험 준비로 전부 써 버릴 텐데, 마지막으로 좀 즐길 수도 있잖아요.’

[등록금을 빼도 금화가 꽤 많이 남는데, 대체 무슨 장비를 사려고 그러는 건가요. 저 때는 모든 전투에서 성검 한 자루로 해결했다고요.]

자연스럽게 ‘나 때는 말이야’가 나오는 이네스의 말에 실소를 흘린 이안은 성검을 들어 올렸다.

성스럽지도,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 투박한 롱소드.

‘지금은 성검이 온전하지 않잖아요. 그리고 평상시에 성검은 그냥 조금 날카롭고, 조금 튼튼한 검이니까요.’

성검이 좋은 무기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특정한 상황을 제외하면, ‘최고’의 무기는 아니다.

그렇기에 다른 장비에 대한 투자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래요. 그래서 결국, 돈이 모자란다는 건가요?]

‘여윳돈이 거의 없다시피 해요. 이렇게 되면 입학하고 나서 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데…….’

이안은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원래였다면 이렇게까지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예처럼 잡혀 사느라,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남은 시간은 최대한 효율적으로 계산하고 신중히 사용해야 한다.

한 번의 실패가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니까.

벼랑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듯한 아찔함.

한참을 고민하던 이안은 결정을 내렸다.

‘일단 돈 문제는 나중으로 넘기죠. 코르디스에 입학해도 돈 벌 방법은 있으니까요.’

[예? 학사 내에서 돈을 벌 방법이란 게…….]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합법적인 방법이랑 불법적인 방법이랑.’

[......]

입학시험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까딱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게다가 코르디스에서도 ‘어퍼 클래스’에 들어가려면, 단순히 합격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뛰어난 성적을 내야 한다.

‘그걸 위해서는 돈은 조금 포기하더라도, 미리 최상의 컨디션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어요. 뭐, 정 돈이 없으면 길바닥에 쥐라도 잡아먹으면 되는 거니까요.’

[음, 아, 예. 되도록 쥐는 안 먹었으면 좋겠네요. 어쨌든 신체를 단련한다는 거죠? 그렇다면 뒷마당이 있는 여관으로 옮기는 게 좋겠네요.]

‘아뇨. 단련할 곳은 따로 정해져 있어요.’

이안은 새로 산 로브를 걸치고, 페어윈드의 거리를 서둘러 걸었다.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고, 지나가는 시민들은 작년에 비해 부쩍 추워졌다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이안이 향한 곳은, 페어윈드의 여러 거리 중. 용병 길드나 검술 길드, 무투가 길드 따위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발걸음을 멈춘 곳은 ‘단련장’이라는 간판을 건 건물.

문을 힘껏 열어젖히자 따뜻한 공기가 훅 불어닥쳤다.

널따란 공간에 쇠로 만들어진 기구가 늘어서 있었고, 웃통을 깐 남정네들이 땀을 흘리며 기구를 들고 있었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헬스장 같은 곳이었다.

‘사람이 엄청 많네요.’

[겨울이니까요.]

어지간히 돈이 급한 용병이 아니고서야, 겨울은 휴식의 계절이다.

그 시간 동안 주점에 들어앉아 술이나 퍼붓는 용병이 있는가 하면, 검술 길드나 무투가 길드에 들어 전투 기술을 배우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전투 기술의 기본은 신체 단련이기에, 겨울에는 단련장이 북적이는 것.

이안은 단련장의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등록하고 싶어서 왔는데요.”

자리에 앉아 아령을 들어 올리던 근육질 노인이 이안을 훑으며 짧게 물었다.

“기한은?”

“3주요.”

“겨우 3주 가지고 그 비실비실한 몸을 바꿀 수는 없을 텐데?”

노인의 말에, 실내에 있던 용병들이 실실 웃어댔다.

안 그래도 북적이는 실내에 사람이 늘어나는 게 불만이던 터다.

그것도 그 상대가 불길하다 여겨지는 검은 머리 검은 눈. 거기다 체격도 그리 좋지 않다.

이네스의 힘을 얻어 강해진 것과는 별개로, 아직 이안의 몸은 10개월간의 혹사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용병들은 이안의 얼굴을 살폈다. 내심 이안이 얼굴이 새빨개지거나, 못 참고 화를 내길 바랐다.

하지만 이안은 코웃음을 한 번 친 뒤,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거야 뭐. 해봐야 아는 거죠.”

“하. 몇 달을 등록해놓고 일주일도 안 나오는 놈들보다는 낫겠군.”

노인은 그렇게 말했지만 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마 말 속에 악의가 없기 때문이리라.

그냥 동네에 한 명씩 있는 오지랖 부리기 좋아하는 노인 같은 느낌이었다.

“검술 길드나 무투가 길드에 등록되어 있으면 절반 할인이야.”

“둘 다 등록 안 돼 있습니다.”

“그럼 원가로 다 내야지.”

이안은 순순히 자루에서 돈을 꺼내 내밀었다.

그러면서 단련장 한구석을 가리켰다.

“저걸 들면 특별한 일이 생긴다는데, 제가 아는 게 맞나요?”

사람 몸통보다 조금 더 큰 울퉁불퉁한 바위.

주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부자연스러운 물건이었다.

노인은 조금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너도 저걸 들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소문을 듣고 찾아온 얼간이냐?”

“음. 그런 셈이죠.”

정확히 말하면 소문이 아닌 게임 속 지식으로 알게 된 거지만,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저게 무슨 물건인지 아나?”

“글쎄요. 자세히는 잘…….”

“아틀라스의 돌이라 부르는 바위다. 저 안에 얽힌 역사를 얘기하려면 꽤나 길어지지만…… 어쨌든 우리 가문에서는 저걸 들고 설 수 있게 되어야, 비로소 사내로 인정하고 이 단련장을 물려주지.”

별 관심 없는 얘기에 이안은 떨떠름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군요.”

“저걸 든다고 힘을 얻는다는 건 확실하지 않아. 내가 직접 들어봤지만, 잘 모르겠더군. 저 바위를 들 정도면 이미 힘이 차고 넘치거든. 알겠나? 단순히 미신일 수도 있다는 거야.”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곳은 믿음이 곧 힘을 발휘하는 세계다.

단순한 미신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한번 해보면 알겠죠.”

“우습게 보지마라 꼬맹아. 평생을 단련에만 전념한 내 아들도 아직 저걸 제대로 들어 올리지 못해. 그래서 아직도 내가 은퇴도 못 하고 있다.”

“딱히 우습게 본 건 아니지만…….”

“뭐, 어찌 됐든. 마음대로 해라. 만약 네가 들어 올리는 데에 성공하면, 지금 낸 돈도 다 돌려주지.”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다시 묵묵히 아령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설마 돈까지 돌려준다니. 봉 잡았네.’

돈 굳었다는 생각에 마냥 기분이 좋아진 이안은 적당한 운동 기구를 찾아 걸었다.

하지만 이미 웬만한 운동 기구에는 사내들이 전부 선점하고 있었고, 이안에게 자리를 양보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이거 곤란하네요.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나.’

[굳이 이곳에서 단련을 할 이유가 있나요? 물론 기구를 사용하는 게 근육을 기르는데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신체의 유연함이나 근육의 협응성을 기르는 데에는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어요.]

이안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굳이 이 단련장을 찾아온 데에도 이유가 있다.

[혹시 저 노인이 말했던 저 바위 때문인가요?]

‘예. 게임 초반에 근력 능력치를 가장 많이 주는 게 이곳이었거든요.’

게임에서 단련장의 여러 기구를 사용하고, 마지막에 저 ‘아틀라스의 돌’을 드는 데 성공하면 추가 업적과 함께 여러 능력치를 골고루 주곤 했다.

다만, 저 바위를 들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근력 능력치가 필요하다는 게 문제였다.

‘근력만 준다면 굳이 올 필요는 없지만…… 다른 능력치를 준다면 얘기가 다르지.’

게임을 플레이할 때와는 달리, 이안은 이곳에서 자신의 능력치나 기술을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능력치가 볼 수 없다뿐이지,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네스에게 힘을 받았을 때나, 그레이의 웅담을 먹고 강해졌을 때. 확실히 느꼈다.

아틀라스 스톤을 들어 올린다고 극적인 효과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소한 차이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안은 챙길 수 있는 모든 건 다 챙기고 갈 생각이었다.

“후우.”

어차피 다른 기구에도 자리가 없겠다. 이안은 아틀라스의 돌 앞에서서 심호흡했다.

주위에 쳐다보는 용병들의 조소 어린 눈길. 모르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이쪽을 곁눈질하는 노인.

그런 시선을 덤덤히 받아넘기며, 이안은 허리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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