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놀고 있을 시간은 없다
이안은 아틀라스의 돌의 옆을 부여잡고 온 힘을 끌어모았다.
“끄읍!”
꿈쩍도 하지 않는 바위. 지켜보던 사내들은 피식피식 웃어댔고, 노인도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사람들은 하나둘, 비웃음을 흘리며 이안에게서 신경을 꺼 나갔다.
다들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마 저녁에 술을 마시면서 씹을 거리가 하나 생겨서 즐거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내들은 굳건히 서 있던 아틀라스의 돌의 위치가 조금 바뀌었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아직 좀 부족한가.’
아틀라스 돌을 들어 능력치를 얻으려면, 약 7초간을 버텨야 한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지금 무리하면 아주 잠깐 동안은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러면 근육이 크게 상처 입겠죠.]
이안은 바위의 윗부분을 어루만졌다.
정공법으로 근육을 단련해 이 바위를 들어 올리려면 대체 얼마만큼의 노력과 시간이 필요할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개월은 온전히 집중해야 할 터다.
그래. 정공법이라면.
‘아틀라스 돌을 들기 위해서는 꽤 많은 근력 능력치가 요구됐어요. 초반에는 쉽게 달성할 수 없는 수치였죠.’
하지만 필요 능력치를 달성할 때에는, 이미 아틀라스 돌이 주는 능력치가 별로 소용없을 때가 많았다.
때문에 아틀라스 돌은 계륵 같이 여겨질 때가 많았다.
[뭐, 이만한 바위를 들어 올리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겠죠.]
‘아뇨. 생각을 달리해야 해요. 바위를 들 수 있을 때까지 강해지자! 가 아닌, 어떻게든 바위를 들어 보자로. 그러면 답이 보여요.’
[…….이안이 생각하는 방법이 뭔지는 몰라도 썩 바람직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이안은 서둘러 단련장을 나섰다.
그 뒤에서 사내들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
“근력 향상 물약 3개 주세요. 효과는 가장 강한 거로.”
페어윈드의 뒷골목.
좌판을 깔고 앉아 있던 노파는 갑작스러운 주문에 느긋하게 고개를 들었다.
“킬킬킬. 처음 보는 손님이군요.”
노파는 이안의 얼굴을 살피더니, 입을 크게 벌리며 웃음을 흘렸다.
이빨이 모두 빠져 앞니가 하나밖에 안 남은 모습은 본능적인 불쾌함을 불러일으켰다.
노파는 품에서 분홍색 액체가 든 유리병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런 시시한 것보다는 이성을 사랑에 빠트리는 매혹의 묘약이나, 하루 동안 행운이 찾아오는 비약은 어떠신가요?”
노파는 아무렇지 않게 엄청난 효과를 지닌 약들을 추천했다.
하지만 이안은 이 노파의 정체를 안다.
노파가 만든 물약이 아주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지만, 그만큼 큰 부작용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매혹의 묘약은 이성 캐릭터의 호감도를 확 얻을 수 있지만, 반대로 동성 캐릭터들이 적대적으로 변하게 되고. 행운의 비약은 약효가 끝나고 운 능력치가 마이너스를 찍게 되죠. 영원히.’
그런 모든 부작용을 알면서도 노파는 약을 권하는 거다.
참으로 지독한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이안은 강하게 말했다.
“수작 부리지 말고, 제가 말한 거나 줘요.”
“끌끌. 보기보다 확고하신 분이군요. 은화 두 개입니다.”
노파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구석에 진열된 반투명한 병을 들어 올렸다.
피처럼 새빨간 액체가 출렁이고 있었다.
“아주 효과가 강력한 녀석이니, 조심히 사용하시길.”
노파는 느릿하게 이안의 손에 약병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덥석!
이안은 노파의 앙상한 팔을 재빠르게 붙잡았다.
“어디서 수작질이야.”
“가, 갑자기 무슨 일이신지……?”
“시치미 떼는 거야?”
이안이 얼굴을 들이밀며 으르렁거리자, 노파는 당최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만 지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안의 말에, 노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거, 마시면 몸속에 괴수가 태어나는 약이잖아.”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긴.
아틀라스 돌을 들기 위해 근력증가 물약을 사 먹는다는 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발상이다.
그리고 그런 플레이어를 위해 준비된 함정이 바로 이 뒷골목 물약 상인이다.
함부로 물약을 사 마셨다가 괴수의 숙주가 되어 죽는 이벤트.
이안 역시 이 고약한 수법에 당한 전적이 있다.
‘절대 두 번은 안 당하지.’
이안은 이미 물약의 색깔별로 효과와 그 부작용을 모조리 꿰고 있었다.
“내가 만만하게 보였지. 그치?”
“억울합니다…… 저는 절대 그런 장난을…….”
“그럼 직접 마셔보던가.”
억울함을 토로하던 노파가 서둘러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오늘 속이 좀 안 좋은지라.”
이안은 노파의 팔을 휙 놓았다. 뒤로 밀려나 팔을 어루만지던 노파는 알 수 없는 미소를 흘렸다.
이 상황이 썩 즐거운 것 같았다. 아니면 단순히 표정 관리를 잘 하는 거거나.
노파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이거. 어디서 소문 하나 듣고 찾아온 뜨내기인 줄 알았는데, 제가 몰라뵙군요.”
“됐고. 약이나 내놔.”
“여기 있습니다.”
노파는 이번에는 녹색 액체가 든 유리병 세 개를 내밀었다.
색깔을 자세히 살핀 이안은 병을 품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은화 두 개 대신, 한 개만 내밀었다.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 이 정도만 내면 돼지?”
“끌끌. 물론이죠. 원래 물건의 가치란 누구에게 파냐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일순. 노파는 이안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나저나 약에 대한 조예가 깊은 것 같군요? 색깔만으로도 제가 만든 약들의 효과를 짐작하는 것 같던데.”
“……뭐, 남들보다 좀 더 아는 거지.”
“혹시 스승의 존함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어쩌면 저랑 친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아니면 코헨에서 오셨으려나?”
노파는 이안이 연금술사 아래서 사사 받는 도제라 짐작하는 모양.
하지만 이안은 적당히 허세를 부려 화제를 넘겼다.
“없는 셈으로 쳐줘. 딱히 어디 가서 당당히 말할 이름은 아니거든.”
“그렇다면야.”
용건은 끝났다.
어느새 해도 서서히 져가며 온 거리가 선명한 오렌지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이안의 등을 향해 노파가 말했다.
“킬킬킬. 다시 볼 수 있기를.”
이안이 고개만 돌려 흘끗 뒤를 보자, 노파는 아까처럼 하나 남은 누런 앞니를 드러내며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안이 골목을 돌아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게 되었을 때.
홀로 앉아 낄낄거리던 노파의 얼굴은 순간, 젊은 여성의 그것으로 변했다.
***
걸음을 서두르던 이안은 골목을 돌자마자, 목덜미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후우.”
[이안을 괴수의 숙주로 만들려던 사람인데, 그냥 넘어가다니. 이안 답지 않네요. 길길이 날뛰면서 가진 재산의 절반 정도는 뺏을 줄 알았는데.]
‘저래 보여도 꽤 강한 마녀거든요.’
노파. 엄밀히 말하면 노파가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의 약물을 마시고 죽는 건 크레이사가에서 꽤 흔한 사망 원인이다.
그리고 화가 난 플레이어가 다시 찾아와 그녀를 죽이려다가, 도리어 반격을 당해 죽는 것 역시 그만큼 흔한 원인이다.
한번 죽으면 아예 삭제되는 게임의 특성상. 마녀는 유저들의 큰 원성을 사게 되었다.
‘마녀의 제자가 되어 여러 기술을 습득하는 것도 꽤 괜찮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요.’
[사악한 마녀의 제자라니. 그건 제가 절대로 허락 못 해요.]
‘어쨌든. 괜히 싸움을 걸었다면 꼼짝없이 개죽음당했을 거예요.’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피하는 게 옳다. 나중에 마주치면, 그때 갚아주면 될 일이다.
‘그리고 저한테 장난친 대가는 충분히 챙겼어요.’
[예?]
‘제가 칼날 형제들에서 맨날 얻어맞을 때도. 딱하나 잘했던 게 하나 있거든요.’
이안은 품에서 약병 세 개를 꺼냈다.
녹색 액체가 들어있는 게 셋. 하양에 가까운 푸른색 액체가 들어있는 게 둘.
당연하게도 녹색을 제외한 둘은, 노파와 실랑이 할 때 순식간에 낚아챈 것들이었다.
‘소매치기요.’
당하고만 있지 않은 게 바로 이안이었다.
***
다음날. 아칠 일찍 단련장으로 찾아간 이안은 아틀라스의 돌 앞에 섰다.
이안이 다시 한번 도전할 거라는 걸 눈치챈 노인이 충고했다.
“이봐. 지금 네 몸으로는 역부족이다. 미련 가지지 말고, 몸이나 더 키워. 무리하다가 괜히 근육에 상처만 입는다.”
차가운 어조지만 그 안에는 이안에 대한 걱정이 들어있었다.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은 이안은 품에서 유리병 세 개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코르크 마개를 따서 입안에 물약을 부어 넣었다.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한 이들이 웅성거렸다.
“저놈 저거 지금 약 먹는 거 아니야?”
“저새끼가 지금……!”
예상했던 대로 적대적인 반응. 그나마 우호적이던 노인조차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음. 헬스장 한가운데에서 로이더가 되는 기분이라. 썩 나쁘지는 않군.’
주위의 시선이야 어쨌든.
물약이 뱃속에 들어가고, 혈관 속에 흐르는 피가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꾸드득.
전신의 근육이 조금씩 팽창해나갔다.
‘좋아. 부작용이 오기 전에 후딱 들어야겠어.’
이안은 다리를 굽히고, 아틀라스의 돌에 양팔을 감아 단단히 쥐었다.
양팔에 느껴지는 압도적인 무게감에 멈칫한 것도 잠시뿐.
“흐읍!”
기합과 함께 이안은 서서히 다리에 힘을 주었다.
쿠득.
아틀라스의 돌이 조금씩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근력증가 물약을 세 병이나 마셨건만, 여전히 아틀라스의 돌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동일 크기의 다른 바위에 비해 몇 배는 더 나갈 듯한 기묘한 무게감이 이안을 짓눌렀다.
이네스가 외쳤다.
[힘내요 이안! 이제 절반 밖에 안 남았어요!]
‘거슬리니까 말 걸지 말아요!’
[…….방금 그 말은 기억해 둘게요.]
이네스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였지만, 지금은 다른 곳에 주의를 돌릴 여유는 없었다.
이안은 지금, 신체에 있는 마지막 한 톨의 잔 기운마저 끌어다 쓰고 있었다.
안구에는 실핏줄이 터져 나가고, 근육은 고통 어린 비명을 질러댄다.
하지만 이안은 일어섰다. 몸이 보내는 모든 경고 신호를 무시한 채, 팔을 들어 올렸다.
바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
정적.
이안을 뒤에서 까내리던 사내들도.
신성한 단련장에서 수상한 약을 사용한다고 뒷목을 잡던 노인도.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소란을 듣고 고개를 들이민 마을 꼬마도.
지금 만큼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마치 하늘을 지탱하던 신화 속 거인처럼.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린 이안에게서는 어딘가 경건함 마저 느껴졌다.
이안에게도. 보는 이들에게도 천겁 같던 시간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갔다.
쾅!
이안은 아틀라스의 돌을 거의 내던지다시피 하며 바닥에 내려놓았다.
“후우. 후우. 성공…….했다.”
몸속에는 새로운 힘이 맴돌고 있었다. 그레이의 웅담만큼은 아니지만,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양.
이안은 성취감이 가득한 진한 미소를 지으며, 비척비척 단련장 밖을 나섰다.
원하는 걸 얻었으니, 이곳에서는 더는 볼일이 없었다.
그 누구도 그런 이안을 붙잡고 나무라거나 시비를 걸 수 없었다.
오직 노인만이 그런 이안의 등에 소리칠 뿐이었다.
“야이 미친 새끼야! 이름이 뭐냐!”
“……이안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안은 사라졌다.
구경하던 사내들은 이안이라는 이름을 입속에서 굴리다가 서로 머쓱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앞으로 평생을 두고두고 써먹을 술안주가 하나 생겨났다는 거다.
***
마녀가 준 근력증가 물약에도 당연히 부작용이 있다.
먹고 나서 3일 동안 체력이 반토막나고 온몸이 쑤신다는 것.
게다가 이안은 3병을 동시에 마셨기 때문에, 3일 동안은 반 죽어 있는 상태로 지냈다.
4일째인 지금도 부작용의 여파가 조금 남아 있는 상태.
‘에고고. 죽겠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무식하게 행동하래요?]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다 좋잖아요.’
이안은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10개월간의 공백을 착실히 메워나가고 있는 셈이다.
그 점에 만족하며, 이안은 침대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아아악!”
[어린애처럼 비명 지를 정도로 아파하면서 일어나긴 왜 일어나요. 누워서 쉬기나 하지.]
그때 막말한 게 아직 앙금이 남아 있는 걸까. 묘하게 싸늘한 이네스의 태도에 이안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놀고 있을 수는 없죠. 이럴 시간에 다른 업적이나 히든피스들도 찾아야죠.’
[그래도…….]
‘그리고 다음에 제가 할 일은 딱히 육체적으로 힘든 곳도 아니에요. 다만 이네스 님의 도움이 필요한데…….’
[제가 도울 일이라…… 맡겨만 주세요!]
보기 드물게 직접 부탁해오는 이안의 모습에 이네스는 기꺼운 목소리로 답했다.
‘역시! 그러면 이네스 님만 믿을 게요!’
[예! 그래서 제가 할 일이라는 게 뭐죠?]
이안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도시의 광장으로 향했다.
주말을 맞아 북적이는 광장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곳.
그곳에서 한 사내가 엎어 놓은 컵 세 개를 현란하게 움직이며 도전자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었다.
돈을 걸어서, 주사위가 든 컵을 맞히면 두 배로 돈을 주는 도박.
속칭 야바위였다.
[설마. 설마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겠죠? 네? 대답해 줘요 이안!]
이네스는 기겁했지만, 이안의 시선은 정작 야바위꾼 앞에 앉아 있는 도전자에게 향했다.
“아악! 말도 안 돼! 이거 사기 아니야?”
절규를 내지르는 앳된 음성.
익숙한 빨간 머리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