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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23화 (24/222)

23. 돌파

참가자는 많았지만, 생각보다 대기 줄은 빨리 줄어들었다.

“다음.”

“옙!”

“건투를 빌겠다.”

들어간 지 20분이 지나도록 아무 신호가 안 들린다면 페리는 참가자가 죽은 거로 판단했고, 다음 참가자를 들여보냈다.

그렇게 들어간 참가자의 대부분은 첫 번째 구역에서 목숨을 잃었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도 구조 요청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총감독관 페리는 재빠르게 달려가 구출해오곤 했다.

중간 순서였던 이안의 차례가 오기 전까지는 채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다음.”

“예.”

이안이 앞으로 나오자, 그의 행색을 훑어본 페리가 말을 걸었다.

다른 참가자들은 무감정하게 들여보냈던 걸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곡괭이랑 검이라. 무기가 특이하군. 상당히 무거워 보이는데, 그걸 들고 달릴 수 있겠나?”

“문제없습니다.”

이안의 확언에 페리는 더 말을 얹지 않았다.

“그런가. 그럼 건투를 빈다.”

페리는 시험장의 철문을 열었고, 이안은 그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의 동굴.

이안은 횃불이 걸린 벽면을 따라 앞으로 걸어나갔고, 이내 또 하나의 철문에 다다랐다.

‘여기서부터 시험 시작이네요.’

[대체 뭐가 있길래 이런 식으로 이중으로 분리해놨을까요.]

‘곧 보게 될 거예요.’

이안은 철문을 열기 전, 작게 심호흡을 하다 이내 크게 숨을 들이켰다.

곧바로 철문을 열고 진입.

매캐한 공기가 흐르는 어두컴컴한 미로가 눈앞에 펼쳐졌다.

‘점점 숨을 쉬기 힘들게 만들고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가루가 공기에 섞여 있어요.’

용기와 재치를 평가하는 시험.

한 치 앞만이 겨우 보이는 어둠 속에서 숨은 점점 막혀오고, 그런 상황에서 어딘지도 모를 미로를 헤맨다는 건 강한 정신력을 필요로 한다.

일반적인 참가자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 패닉에 빠져 벽을 두드리며 내보내 달라고 애원하곤 한다.

그러다가 숨이 막혀 고통스럽게 죽는 경우가 대다수.

‘하지만 준비는 충분히 했어요.’

그걸 위해 그동안 이안은 분주히 돌아다녔다.

시계탑에 잠든 신비는 밝은 밤눈을. 선원들의 영약은 폐활량과 체력을. 인어의 비늘은 민감한 감각을.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지금도 보라.

원래라면 바로 앞만이 간신히 보여야 할 어둠이, 이안에게는 제법 선명히 보이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숨을 참고 걸을 수 있는 게 4분 정도려나. 4분이면 충분하죠.’

이미 몇 번이고 지나온 길.

길을 알고 있다면 미로도 더는 두렵지 않다.

이안의 설명을 듣던 이네스가 황망히 중얼거렸다.

[충격이네요. 이건 마치…… 대놓고 죽으라고 해놓은 거랑 같잖아요.]

확실히. 게임으로 플레이하는 것과는 다르게, 직접 이런 공간을 헤매는 건 그 난도가 다르다.

아무 지식도 없는 참가자들을 이런 곳에 몰아넣는 건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

감히 자기 분수 이상의 것을 바란 자들에 대한 응징일까.

이 시험장을 만들어낸 인간의 오만함과 분노가 엿보이는 듯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적어도, 이렇게 길바닥에 어린 참가자들이 시체가 되어 널브러져 있는 걸 보고도 무덤덤할 정도로 이안의 피는 차갑지 않았다.

‘빨리 통과할 수 있지만…… 그냥 넘어가기에는 마음에 안 들어요.’

이안은 품에서 밝은 노란색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냈다.

기름 물감이었는데, 이안은 부츠에 물감을 묻혀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그러자 이안이 걸어간 길 뒤로 선명한 노란색의 길이 생겼다.

주변이 어둡기에 다리를 굽혀야만 볼 수 있는 노란 선.

그리고 이 어두운 미로에서 다리를 굽힐만한 상황은 하나다.

‘패닉에 빠졌을 때,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겠죠.’

어떻게든 노란 선을 따라 문에 도착하면, 적어도 목숨을 건질 수는 있을 것이다.

게임에서라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이들에 대한 배려.

예상대로 이네스는 이안의 재치에 크게 기꺼워했다.

[훌륭한 생각이에요! 이거라면 무의미한 죽음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겠어요.]

‘이걸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이 안 되겠지만요. 임시방편 정도는 되겠죠.’

그렇게 발을 끌며 걷다 보니, 어느새 미로의 출구에 도착했다.

4분을 살짝 넘긴 시간.

좀 더 빨리 움직였다면 기록을 단축할 수도 있었겠지만, 아직 충분히 여유로웠다.

이안은 문을 열어 그다음으로 향했다.

***

신호가 왔다.

예상치 못한 일에 차가운 얼굴로 서 있던 페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보기 드물게 당황했다는 증거.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지?’

주머니에서 재빨리 회중시계를 꺼낸 페리는 더욱 당황했다.

‘4분이라고?’

지금껏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참가자 중, 가장 빨랐던 기록이 14분이었다.

그때에도 감독관들은 정말 평민이 맞는 거냐며 호들갑을 떨어댔었다.

근데 그보다 10분이나 더 단축되어서 4분이란다.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건가?’

길을 모두 꿰고 있는 페리가 안에 들어간다면 2분 정도로 돌파할 수 있으니, 이론적으로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심상치 않은 일인 건 확실하다.

페리는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감독관들을 불러들였다.

뒷배를 통해 꿀보직을 얻은, 무능하고 게으른 놈들이었지만 그래도 혼자 생각하는 것보다는 나을 터.

예상대로 페리의 설명을 전해 들은 감독관들은 경악했다.

“허, 허억. 4분이라고요?”

“뭔가 착각하신 건…… 아니. 총감독관님이 그러실 리 없지.”

“아니면 정보가 새나갔다거나…….”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미로의 지도를 참가자들에게 거액을 받고 팔아치운다.

지금껏 이런 일은 처음이었지만…….

감독관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서로의 성격을 잘 알았다.

고지식한 페리라면 몰라도, 감독관 중에 정보를 유출한 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미묘해지는 걸 알아챈 한 감독관이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일단 다음 참가자를 들여보내야죠.”

“아, 그렇군. 너무 당황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페리가 서둘러 다음 참가자를 불러들였다.

지금까지의 참가자 중 가장 어린아이였는데, 자신의 차례가 되어서 불안함에 울상을 짓고 있었다.

페리는 여느 때와 같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철문을 열었다.

그 사이. 서로 간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억지로 걷어낸 감독관들이 의논했다.

“우선 2차 시험을 보죠. 2차 시험은 총 감독관님을 제외하면 아무도 정확한 답을 모르니, 정보가 유출되었어도 상관없을 겁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유출했다는 말은 아니고요. 예.”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1차에서는 그저 운이 좋았을 수 있죠. 그 왜, 가끔 유별나게 운이 좋은 참가자가 있지 않습니까.”

“2차 시험은 저희가 들어가도 통과하기 어려울 정도니, 걱정 놓아도 될 겁니다. 그리고 만약에 2차까지 통과한다 해도…….”

감독관이 말을 흐렸다. 2차 시험을 통과하고 그 너머.

3차 시험장에 있는 건 감독관들조차도 제어하는 게 불가능했다.

여태껏 1차 2차 시험을 통과한 참가자는 간간이 있어왔다.

평민 중에서도 이른바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두각을 드러내던 이들.

하지만 그런 천재들조차 3차의 벽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좀 더 느긋이 있어 보죠. 예.”

“다시 차나 마실까요?”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감독관들은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총감독관 페리만은 혼자서 시험장 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느낌이 이상하군.’

페리는 스스로의 감을 꽤나 신뢰하는 편이었다.

지금은 사실상 은퇴했지만, 전장을 누비던 시절에도 그의 감을 믿어서 결과가 안 좋았던 적은 드물었다.

꽤나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거라는 불안함과 지루한 일상을 부수어줄 무언가가 나타날 거라는 기대감이 한데 어우러졌다.

피부를 타고 흐르는 묘한 기분.

어떤 수를 써도 상관없냐고 물어보던 검은 머리 청년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 눈빛도. 목소리에 담긴 힘도. 행동거지도. 허리에 찬 허름한 검까지.

왠지. 왜인지. 쉽사리 무시할 수 없던 청년.

‘미리 주의하고 있…….’

그때.

새로운 신호가 왔다.

두 번째 시험 역시 통과해 버렸다는 신호였다.

***

두 번째 시험은 쉽게 설명하자면 방 탈출이다.

첫 번째 미로와 달리, 길을 찾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전 시험과 똑같이 시간제한은 있다.

콰드득.

잡동사니가 널려 있는 창고 같은 공간. 날카로운 송곳이 빼곡히 박힌 천장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천장이 내려오고 있어요!]

‘예. 그래도 괜찮아요. 이 방안에 숨겨진 간단한 수수께끼만 풀면 되니까요.’

[간단한 수수께끼요?]

‘예. 일단 저 책장 윗열 3번째에 있는 책을 펴 숫자를 알아낸 뒤, 바닥 아래에 있는 금고를 열고. 그 금고에 있는 퍼즐을 맞춰 열쇠를 얻은 뒤. 처음의 책장 뒤에 숨겨진 비밀 공간에서 번호 세 자리를 얻으면 돼요.’

‘……전혀 간단하지 않은데요?’

당연하다. 애초에 게임 제작자가 여러 번 죽어가며 정답을 찾아내라고 만들어 놓은 구간이니까.

다만 이러한 수수께끼의 특징은, 한번 답을 알면 너무나 쉽다는 거다.

그리고 이안은 이런 류의 설계를 좋아했다.

정답은 인터넷 공략으로 찾고, 귀찮은 과정은 다 스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간을 크게 아낄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게 할 거고.

‘비밀번호는 486. 하지만 이번에도 그냥 지나가기는 싫으니까…….’

이안은 챙겨온 곡괭이를 손에 들고 어깨를 풀었다.

‘이제부터 깽판 좀만 치고 가겠습니다. 어차피 다음 시험장에서 마주해야 하는 걸 생각하면, 미리 몸도 풀어두는 게 좋겠죠.’

아마 시험장을 설계한 사람은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 했을 거다.

천장이 다 내려오기 전에 수수께끼를 풀기도 바쁠 텐데, 의도적으로 퍼즐을 훼손할 시간이 어딨겠나.

하지만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사람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쾅! 쾅! 쾅!

이안은 가벼운 움직임으로 주위에 부술 수 있는 모든 걸 부숴나갔다.

오랜만에 무언갈 때려 부수니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기분.

이런 기분 나쁜 시험장을 만든 놈들이 분해할 걸 생각해서 더 신이 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양반은 못 된다고.

이안은 생각했다.

***

이안의 다음 차례인 소년은 겁에 질려 걸음을 옮겼다.

횃불이 일렁이는 어두컴컴한 시야도, 동굴 특유의 차가운 공기도 어린 소년에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솔직히. 포기하고 싶었다. 주저앉아 다 그만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가난한 집에서 빚까지 져가며 응시한 시험이다.

소년은 부모, 형제,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희망이었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

그래도 가야만 한다. 기대를 걸어준 모두를 위해.

소년은 덜덜 떨리는 손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시험장으로 통하는 철문을 열었다.

“윽!”

훅하고 불어온 공기에 머리가 아파온다.

쾅!

뒤에서 저절로 닫힌 철문에 소년은 겁에 질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주위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은은하게 빛나는 야광석도 어둠을 모두 내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서. 어서 가야 해.’

소년은 어둠을 더듬으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왜인지 두통이 점점 심해지고, 호흡이 점점 힘들어졌다.

오래 있으면 안 된다고 본능이 소리쳤다.

하지만 여정은 녹록지 않았다.

소년의 앞에 등장한 갈림길. 영리한 소년은 어디선가 배운 지식을 적절히 활용했다.

‘미로에서는 계속 왼쪽으로만 가면 된다고 그랬어.’

이론적으로는 맞는 얘기였다. 시간제한이 없다는 전제가 있다면 말이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5분, 10분, 15분이 빠르게 지나고.

점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데 출구는 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허억. 허억.”

심장은 쿵쿵 뛰는데, 어둠 속에는 오직 나 하나. 죽음의 공포가 서서히 마음속에 스며든다.

어린 소년이 버터 내기에는 너무나 큰 공포다.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부모를 찾았다.

“어, 엄마. 아빠…….”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린다.

그만두고 싶다. 포기하고 싶다. 살고 싶다.

하지만 시험장 안에서는 구조를 요청할 방법조차 없다.

소년은 절망에 빠진 얼굴로 벽을 쿵쿵 두드렸다. 두드리며 살려달라 외쳤다. 그렇게 하면, 혹시나 벽 너머에 있을 누가 기적적으로 구하러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짧은 인생동안 그토록 열심히 교회를 다녔건만.

기적은 없었다.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부탁이에…… 억!”

벽을 치던 소년이 땅에 미끄러졌다. 소년은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모든 걸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소년의 눈에 뜨인 건…… 선명한 노란색 길.

“이건…….”

어쩌면 기적은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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