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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28화 (29/222)

28. 흑역사

성검의 조각 중 하나가 저 안에 잠들어있다.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하던 이네스가 말했다.

[확실히. 희미하게나마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어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안으로 들어가 꺼내오고 싶다.

하지만…….

“이곳에는 무슨 용무로 찾아온 거지?”

사슬갑옷과 창으로 중무장한 기사가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기사가 서슬 퍼런 눈으로 묻자 황급히 답했다.

“아. 이번에 들어온 신입생이라서요. 그냥 돌아다니다가 찾아온 건데…… 이곳은 뭐 하는 곳이죠?”

이안이 시치미를 떼며 묻자, 기사가 한결 부드러운 태도로 답했다.

“이곳은 학사의 금고이자 무기창고다. 수백 년에 걸쳐 모아 온 유물들이 잠들어있지.”

“혹시 안에 들어가 견학해도 될까요?”

“안 된다.”

기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학교장님의 허락이 없는 한 이곳에는 들여보내 줄 수 없어.”

“제가 듣기로는 전시에는 개방해서 학생들에게 무기를 지급한다고 들었는데요?”

“어디까지나 전시에 준하는 상황 때뿐이야.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쓸데없는 생각은 말아라.”

이안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더 질문을 던졌다가는 불필요한 경계를 사게 될 것 같았다.

이네스는 기사 쪽을 쳐다보다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생각보다 그렇게 경계가 삼엄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 저 기사의 실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혼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벽에 비해 딱히 출입문이 단단한 것 같지도 않고…….]

‘그렇게 쉽지만은 않아요.’

이네스의 추측대로. 저 창고 안에 침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경계를 서는 기사가 있지만…… 꾀만 잘 낸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경계 알람이 울린다는 것.

알람이 울리는 즉시 내벽의 모든 문이 봉쇄되고 해자 위의 다리가 올라간다.

하늘을 날지 못하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저 창고 안에 갖가지 함정이 설치되어 있고요.’

[하긴. 이곳은 섬이니까 설령 내벽을 빠져나가도 쉬이 도망칠 수는 힘들겠네요.]

그렇기에 저 창고를 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플레이어가 저곳에 합법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학교장의 허락을 받는 것.

그리고 그 허락을 받아내는 방법은 학년 말에 치르는 순위 평가에서 전교 1등을 차지하는 것뿐이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더럽게 어려운 일이었다.

‘뭐. 결국에는 훔치는 방법밖에 답이 없네요.’

[저 경계를 뚫고요?]

‘뭐든지 완벽할 수는 없고, 빈틈은 있는 법이니까요.’

1학기 말.

코르디스에는 악마가 소환되며 학사는 아수라장이 된다.

그때가 적기다.

‘악마 소환으로 학사가 쑥대밭이 되면 성검을 탈취할 거예요. 그다음에 악마를 처치하고, 혼란스러울 때 학사를 탈출하면 완벽하죠.’

당장 성검을 가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욕심일 뿐이다.

기회는 반드시 온다.

이안은 그때를 기다리며,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

이안은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이네스는 그럴 때마다 좁은 방 안에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콘크리트 세상.

제국에서 온 평생을 살아온 이네스에게는 여전히 낯선 광경이다.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구경하는 재미라도 있으련만.

이 살풍경한 풍경에 살아 있는 건 없다. 나무도, 동물도, 인간도. 이네스도 엄밀히 따지면…… 살아 있지는 않았고.

이럴 때마다 이네스는 사뭇 치는 공허함을 느꼈다.

성검에 갇혀 혼자서 수백 년을 보냈던 그때의 고독이 되살아났다.

요즘 이안과 보내는 일상은 꽤 즐겁다.

이안은 여러모로 그녀와는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고, 마음에 안 드는 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목표를 향해 같이 나아간다는 그 느낌.

그 느낌은 다른 그 무엇보다 이네스의 마음을 충만하게 해주었다.

결사대의 동료들과 함께했던 그때 느꼈던 그 행복한 기분.

하지만 마음속이 차오를수록 공포 또한 커진다.

언제든지 외롭고 고독했던 그때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그 공포가.

전설로 남은 업적을 이룬 이네스도 결국 한 명 인간일 뿐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말자.’

이네스는 양 볼을 짝―하고 두드렸다. 부정적인 상상은 하면 할수록 그 몸집을 불리는 법이다.

머릿속을 환기한 이네스는 매일같이 하던 일과를 시작했다.

이안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의 기술을 더 잘 전수할 수 있을지, 꼼꼼히 고민하고 설계하는 것.

‘기본 동작은 기초가 확실히 잡히고 있으니까…….’

이네스는 계획을 하나하나 검토하며 무의식적으로 방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이것도 일과 중의 하나였다.

평소였다면 절대 열리지 않았을 문이…….

벌컥.

“어?”

열렸다.

이네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문 너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환하게 미소지었다.

이 너머에 있는 건 이 이안의 기억들. 이 문이 열렸다는 건, 이안이 비로소 이네스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뜻이다.

“후우. 후우. 이안의 기억이라…….”

이네스는 흥분으로 심호흡했다. 간절히 기다려온 일이 마침내 이뤄졌다.

이네스는 신중하게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

복도였다.

그 외에는 더 설명할 방법이 없는 공간이었다.

긴 복도에는 철문 여러 개가 줄지어 서 있을 뿐이었다.

이네스는 가장 가까운 철문의 손잡이를 당겼다.

철컥.

열리지 않았다.

‘역시…….’

아마도 이안이 남들에게 가장 보이기 싫은 기억인 듯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안은 이네스에게 온전히 마음을 연 건 아니었다.

살짝 실망이 들었지만 이네스는 곧이어 다음 문을 잡아당겼다.

열리지 않으면 또 다른 문을 잡아당겼고. 마지막에 비로소 열 수 있는 문을 찾아냈다.

“좋아.”

이네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 앞에 어떤 광경이 펼쳐져도 놀라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네스는 문을 힘껏 열었다.

함성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좋아! 이대로 마무리하자!”

“화이팅!”

“와아아아!”

어딘가의 경기장이었다.

수천 명의 관중이 함성을 지르고 있었고, 초록 코트에서 사내들이 공을 주고받고 있었다.

‘아, 이안은 운동선수라고 했었죠. 그렇다면 저기 위에 뛰고 있는 건…….’

하지만 이네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바로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하는 거야 이 새끼들아!”

걸걸하고 탁한 목소리.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과 산발이 된 머리. 초점을 잃은 채 세차게 흔들리는 눈동자. 언제 빨았는지 꾀죄죄한 옷. 손에 든 찌그러진 맥주 캔.

영락없는 폐인이 그곳에 있었다.

“……이안?”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처음 이안을 만났을 때는 비록 초췌한 몰골이라도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두 눈에서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빛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인생을 포기한 인간 같았다.

깡!

방망이를 든 선수가 날아오는 공을 쳐냈다. 하지만 이내 다른 선수가 그 공이 땅에 닿기 전에 잡아냈다.

이안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뭐하냐고! 내가 너네한테 건 돈이 얼만지 알아?”

애절한 목소리. 자세히 보면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뛰어! 한심한 새끼야! 뛰라고! 다리 몽둥이 분질러 버리기 전에! 시발. 시발. 왜…… 왜 하필. 왜 나는 되는 일이 없는 건데!”

이후로도 이안은 선수들을 향해 욕설을 쏟아냈다.

묘하게 애처로운 어조로 말하는 이안을 향해 사방에서 따가운 눈초리가 날아왔다.

안 그래도 응원하는 팀이 지고 있는데, 웬 도박 중독자가 큰소리를 내니 불쾌할 수밖에.

그 이후의 일은 뻔했다.

몇몇 사내들이 이안의 행동을 지적했고, 격앙되어 있던 이안은 곧장 싸움을 걸었다.

그 뒤. 홀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던 이안은 경찰인지. 경기장 관리인인지 모를 사람들에게 양팔을 붙잡혀 끌려갔다.

“…….”

처음에는 어이없어 하던 이네스도 측은한 얼굴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시합이 끝났다.

이안이 응원하던 팀의 처참한 패배였다.

***

[…….그런 일이 있었어요.]

이네스는 밤 사이 자신이 듣고 본 것들에 대해 전부 설명했다.

얘기를 듣던 이안이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하…… 하하. 보셨어요? 그때 제가 많이 심리적으로 몰려 있을 때긴 했죠.”

[선수들에 대해 욕설을 뱉을 정도로요?]

이안이 머쓱하게 답했다.

“철이 좀 없었죠. 그리고 그때 가진 돈을 다 걸었는데, 져 버려서…….”

[그건 도박이잖아요!]

이안이 황급히 설명했다.

“그, 그때 10연승을 달리고 있던 팀이고, 상대는 꼴찌였거든요. 당연히 이길 줄 알았죠.”

[도박 중독자들이 다 그런 말을 하는 거 알아요? 그리고 제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뭐. 그 뒤로는 손 털었습니다. 아버지한테 뒤지게 맞았거든요. 그것보다 수련장에 빨리 가야죠. 네.”

이안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안 그랬다가는 이네스가 기사도에 대한 잔소리를 몇 시간에 걸쳐 늘어놓을 것 같았다.

그 의도가 뻔히 들여다보였지만, 이네스도 더 말을 잇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누구나 남에게 얘기 못 할 흑역사 하나쯤은 있고.

사실상 멋대로 남의 아픈 기억을 들춘 것과 다름없는데, 상처를 더 후비는 것도 못 할 짓이었다.

[후우. 학교 수련장 시설은 큰 편이고, 아직 학기가 시작도 안 했으니 천천히 가도 될 거예요.]

하지만 이네스의 예상과 달리. 수련장 앞은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힘들 정도.

[어, 음. 다들 엄청 부지런하네요.]

‘그러게요.’

자세히 다가가 보니, 정작 수련하는 이는 소수였고 다들 누군가를 구경하고 있었다.

‘저건…….’

이안도 아는 인물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황금빛 단발에 바다를 연상케 하는 짙은 푸른색의 눈동자.

아름다운 외모와 착 가라앉은 눈동자 때문에 쉽사리 다가가기 힘든 차가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녀.

‘황녀…….네요.’

황녀.

이안이 또 하나의 동료로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게임에서 성능이 끝내줬거든요. 플로라가 화력 부분의 끝판왕이라면, 황녀는 기본적으로 몸이 엄청 튼튼하다고 해야 할까. 웬만해서는 잘 안 죽더라고요. 그래서 몸빵으로 쓰기 좋았어요.’

[…….이안. 사람한테는 성능이라는 단어는 쓰지 마세요. 굉장히 실례에요.]

‘아, 예. 그렇죠 참.’

기본적으로 파티에는 전위가 두 명 정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두 명에게 적절히 시선이 배분되고, 안전성이 크게 오른다.

이안이 게임에 시간을 갈아 넣으며 몸으로 터득한 경험이었다.

이네스가 말했다.

[황가의 핏줄은 특별해요. 혈관에 신의 힘이 흐른다고도 말하죠. 신체가 튼튼…… 뛰어날 수밖에 없어요.]

‘그런가요.’

이안은 건성으로 답하며 황녀를 구경했다.

그녀는 목검을 들고 허공을 향해 검을 내지르고 있었는데, 하나의 동작이 끝날 때마다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와아…… 역시 황녀님이야.”

“저게 황가에만 내려오는 검술이라는 거지?”

“너무 아름다우셔요.”

하지만 이안은 황녀를 보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이안이 보기에도 훌륭한 솜씨는 맞았지만…… 어딘가 부족한 느낌.

게다가 보면 볼수록 누군가와 닮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음. 그러고 보니 황녀의 이름이 뭐였더라…….’

[레아 클로딘. 통지서에 가장 첫 번째로 적혀 있던 이름이잖아요?]

‘아 그랬죠. 잠깐. 클로딘 클로딘…… 이네스 님이랑 똑같네요?’

[참 빨리도 알아채네요.]

그제야 이안은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레아와 이네스는 묘하게 닮아 있었다. 특히 갈색 하나 섞이지 않은 황금빛 금발은 똑같다고 해도 무방했다.

당황한 이안이 물었다.

‘이네스님의 먼 혈육이네요? 아니 근데 황녀라고 했는데…… 그럼 이네스님도 황족인 건가요?’

이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 예전, 이네스는 기사 가문 출신이라 하지 않았던가.

[클로딘 가문은 원래 기사 가문이 맞아요.]

‘그러면…….’

[제국에는 오랜 관습이 있어요. 악마를 무찌른 영웅에게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황족과 맺어주고, 황가의 성을 영웅의 성씨로 바꾸어주죠.]

긴 세월 동안 악마는 주기적으로 대륙에 마수를 뻗쳐왔고, 그럴 때마다 영웅이 나타나 악마를 무찔러왔다.

제국의 황족들은 그런 영웅들의 피가 대를 이어 섞여왔으니, 어찌 보면 약할 수가 없는 셈이었다.

‘그래도 자기 원래 성씨까지 포기하다니, 어떻게 보면 최대의 예우를 하는 셈이네요.’

[그게 관습이니까요.]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 그런데 이네스 님은 악마와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거 아니었어요?’

[저는 죽었지만, 함께 싸웠던…… 제 오라버니는 살아남았으니까요. 아마 오라버니의 후손이겠죠.]

이네스는 덤덤하게 설명을 마쳤다. 이안도 이네스의 기분을 생각해 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어쨌든 한 가지 사실을 더 알았다.

게임에서 좋은 성능의 캐릭터들은 사실 과거 결사대의 후손이었다는 개연성이 있었던 것이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레아의 수련이 끝이 났다.

아니. 끝이 났다기보다는 주위 시선 때문에 더 이어가질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레아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수련이 멈추자마자 학생들이 레아에게 몰려들어 말을 걸어댔다.

“레아 님. 저는 이스트월 가문의 차남인…….”

“황녀 저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순식간에 펼쳐지는 아수라장.

그러나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귀족들이 많은 코르디스에서도 황녀면 엄청나게 높은 신분이니까요. 이 기회에 어떻게든 연을 이어보려고 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죠.]

레아는 자신한테 몰려드는 학생들을 귀찮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러곤 차갑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관심 없습니다.”

“……예?”

서늘하다 못해 한기가 들 정도의 어조.

예상 못 한 냉대에 학생들은 벙쪄서 입을 다물었지만, 레아는 차분한 어조로 계속 말했다.

“그리고 이곳은 수련장. 잡담이나 나누려고 오는 곳이 아닙니다. 검을 휘두르고 몸을 움직이는 곳이죠. 부디 장소를 가려 행동해주시길.”

“그런…….”

“아! 저는 황녀 저하와 검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었습니다!”

기회를 포착한 듯, 치고 들어오는 기사 가문의 학생.

레아는 살짝 흥미가 동했는지, 그 학생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까?”

“예! 저희 가문에 내려오는 검술은…….”

“저는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직접 검을 맞대어보는 게 더 효과적이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의 의미는 간단했다.

대련을 해보자는 것.

레아의 선언에 기사 가문 자재들의 눈이 번쩍 뜨이며, 앞다투어 외쳐댔다.

“저도! 저도 레아 님과 대련해보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이건 기회였다.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고, 어쩌면 황녀의 눈에 들 수도 있는 기회.

레아는 서로 아웅다웅하며 순서를 정하는 학생을 서늘하게 쳐다보며, 천천히 목검을 들었다.

***

결론부터 말하면, 볼만한 대련은 나오지 않았다.

딱!

“끄악!”

마지막 지원자가 레아의 검에 얻어맞아 바닥에 쓰러졌다. 그대로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

지켜보던 다른 이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이제 수련장에도 사람이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호기롭게 나섰던 이들은 모두 레아의 검에 얻어맞아 다 실려 나갔던 것이다.

레아는 실망스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은 인재가 이리도 없다니.’

대륙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드는 코르디스라 조금쯤은 기대했거늘.

아무리 상위권 학생들이 오지 않았다지만, 단 세 합을 버티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단 말인가.

이런 자들이 제국의 미래를 자처한다는 게 조금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모르는 학생들을 레아를 보며 멀찍이서 칭찬의 말을 쏟아냈다.

역시 황가의 핏줄이니, 대단한 재능이니 추켜세웠다.

레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저들은 모른다. 레아가 어떤 사명을 짊어지고 있는지. 어떤 노력을 통해 이 경지까지 이르렀는지. 저들은 모른다.

이 정도면 충분히 받아주었다. 더는 수련을 방해받을 수 없다. 레아는 정중히 학생들을 물리려 했다.

“이제 이만하면 됐으니…….”

“저도 대련해보고 싶은데요.”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그곳에는 검은 머리를 한 소년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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