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독한 사람이네
레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제안 자체는 특별할 거 없지만, 그 상대가 의외였다.
“그러니까…….”
“이안입니다.”
레아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그녀도 들어봤다.
요즘 이안에 대한 소문은 평민층에서보다 오히려 귀족들 사이에서 더 화제였으니까.
부도덕한 수단을 썼을 거라느니, 금지된 힘을 받아들였다느니 대부분 악의 가득한 소문이었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오히려 격한 반응은 주위에서 터져 나왔다.
“건방진 놈!”
“천한 놈이 어딜 감히 황녀 저하께 함부로 말을 걸어! 주제를 알아라!”
학생들은 마치 이안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황녀의 고결함이 더러워지는 것 마냥 이안을 비난했다.
거기에 대고 이안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거 참 더럽게 땍땍대네. 그래서 너네 어퍼 클래스야? 등수 몇으로 들어왔는데. 나보다 높아?”
이안은 학력이나 등수, 등급 따위로 긁으면 상대를 쉽게 화나게 할 수 있다는 걸 잘 알았다.
한국에서 수십 년을 살며 터득한 삶의 진리였다.
그리고 그 진리는 여기서도 통하는 모양이다. 학생들이 이를 갈며 살벌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안. 또 또 애처럼 구는군요.]
‘쟤들이 먼저 시비 걸었잖아요. 그리고 저는 신체 나이로만 보면 애가 맞다…….’
[씁!]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해.’
다행히 상황이 격화되기 전에 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죠.”
레아가 받아들이자, 여태까지 핏대 올려 소리치던 학생들의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었다.
“역시 황녀님이야……!”
“평민에게도 자비로우셔.”
“황녀님! 응원하겠습니다! 저 녀석을 박살 내세요! 아니, 그냥 죽이셔도 됩니다!”
학생들의 열렬한 환호를 깔끔히 무시한 레아가 이안에게 목검을 건네주었다.
학사에서 기본적으로 제공해주는 목검이었는데, 한눈에도 품질이 뛰어나 보였다.
“잠시 휘둘러 봐도 될까요?”
레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검과 평소에 사용하는 성검은 무게 중심이나 길이 따위가 달랐다.
그 미묘한 느낌을 손에 익히기 위해, 이안은 허공에 목검을 휘둘렀다.
부웅. 부웅.
내려 베기. 가로 베기. 그리고 찌르기. 평범하고 기초적인 동작들에 구경꾼들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레아만은 눈을 가늘게 좁히며 그 동작을 유심히 보았다.
부웅!
마지막으로 목검을 한 번 휘두른 이안이 레아에게 물었다.
“끝났습니다. 시작할까요?”
“…….
“레아 님?”
“……시작하죠.”
레아는 목검을 손가락으로 스윽 훑은 뒤, 이안을 향해 겨누었다.
그 자세는 역시나 낯이 익었다.
‘이네스 님이랑 똑같네요.’
[아마도 제 오라버니가 전수한 게,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거겠죠.]
이안은 차분히 레아를 살폈다.
다소 충동적으로 제안한 대련이다.
레아는 동료로서 꽤나 매력적인 캐릭터다. 실력도 뛰어나고 플로라와 달리 안 좋은 쪽으로 엇나갈 일도 없다.
게다가 레아와의 친분은 훗날 황태자 관련 스토리가 진행될 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여기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 그래도 내 이름 정도는 기억하게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이안은 레아가 귀족들을 압도적으로 때려눕히는 걸 보며, 마음속 한 부근이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경쟁심. 혹은 호승심.
아주 오래전 버렸었던. 아니, 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감정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레아와 검을 맞대고, 그간의 결실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기긴 힘들 거예요. 아니, 냉정히 말해 불가능해요.]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일반 귀족만 해도 일반인의 신체 능력을 훨씬 상회한다.
하물며 황족이다.
겉으로는 가냘파 보여도, 레아는 이안의 신체 스펙을 아득히 웃돌 것이다.
그래도 순순히 져줄 생각은 없었다.
[도와줄까요?]
‘아니요. 이번에는 제가 혼자 해볼게요. 그래야 대련이 의미가 있지 않겠어요?’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목검을 든 레아를 향해 이안 역시 자세를 잡았다.
레아와 똑같은 자세.
누군가가 외쳤다.
“자세를 따라 하다니! 건방지게 레아 님을 조롱하는 거냐?”
“졌을 때 변명거리를 만드는 거냐!”
레아 역시 조금 의아한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지만 기본 동작 자체는 흔한 편이다.
의구심을 지운 레아가 말했다.
“먼저 갑니다.”
“네…… 윽!”
탁!
채 대답할 새도 없이, 목검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이안은 목검을 비스듬히 기울여 가까스로 공격을 튕겨냈다.
분명 힘을 많이 흘려냈는데도, 양손이 얼얼했다.
‘진짜 살벌하네…….’
레아 역시 조금 놀란 눈치였다.
이안이 공격을 꽤 정교하게 막아낸 탓이었다.
하지만 그걸 티 내지는 않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무자비한 후속타가 날아들었다.
탁! 탁! 탕!
옆구리와 종아리를 노리는 공격 후, 회전을 더해 위력을 높인 가로 베기.
이 모든 동작을 물 흐르듯이 펼쳐내 보였다.
웬만한 귀족들은 여기서 뻗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막아냈다.
비록 손이 덜덜 떨리고, 뒤로 세 걸음이나 밀려났지만 아직 멀쩡히 서 있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역시. 이네스 님과 비슷해요. 하지만 이네스 님보다…… 여러모로 실력이 떨어져요.’
이틀에 한 번꼴로 이네스와 겨루는 이안이다.
이네스의 검에는 감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아득함이 있었다.
하지만 레아의 검에는 그런 압도적인 느낌이 없다.
비슷하지만 그래 봤자 열화판. 이네스의 검보다 더 약했고, 더 느렸고, 덜 정교했고, 덜 날카로웠다.
이네스와 비슷한 검술이라 그 경로까지 예측이 되니, 생각보다 더 상대하기 쉬웠던 것.
한 차례의 공방을 마치고 잠시 뒤로 물러난 레아는 의아한 얼굴로 이안을 쳐다봤다.
‘이상해. 내 움직임을 모두 읽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야.’
황가에만 내려오는 검술은 변칙적이고 유연한 게 그 장점이었다.
그만큼 검로를 읽기가 어려웠는데, 상대는 자신이 검을 뻗기도 전에 미리 방어를 준비했다.
마치 어디로 검이 올지 다 안다는 것 마냥.
그게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열이 받았다.
“……재밌네.”
열 받은 걸 숨기기 위해 그렇게 내뱉었다. 의식적으로 사용하던 경어 마저 잊어버렸다.
착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처음으로 빛을 발하고, 레아가 곧바로 거리를 좁혀왔다.
후웅!
목검이 위에서 아래로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강한 만큼 동작이 크다. 이안은 검을 아래로 비스듬하게 기울여 흘려보냈다.
하지만 이건 속임수.
순간적으로 검에서 한 손을 뗀 레아가 왼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탁!
원래였으면 이안의 갈비뼈에 맞아 그대로 주저앉혔을 일격.
하지만 똑같은 타이밍에 뻗어진 이안의 오른팔이 이네스의 팔목을 쳐냈다.
순식간에 검과 검. 팔과 팔이 교차한 모양새가 되었다.
곧바로 레아가 팔을 뻗어 이안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팔로 막을까?’
아니. 육탄전은 불리하다.
이안은 오히려 안쪽으로 파고들어 어깨로 레아의 몸을 힘껏 들이받은 뒤, 그 반동을 이용해 뒤로 물러났다.
뒤늦게 노림수를 깨달은 레아가 팔을 뻗었지만, 허공을 휘저을 뿐.
비로소 다시 거리를 벌린 이안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나름 열심히 단련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진짜들을 상대로는 한참이나 모자랐다.
“…….
고요했다.
학생들은 숨소리마저 죽이며 대련을 지켜보았다.
지금껏 다른 학생들을 가볍게 압도하던 레아다.
하지만 이안과의 승부는 쉽사리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봐주고 있는 건가?
아니. 오히려 다른 이들을 상대할 때보다 더 맹렬하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상상도 못 한 일에 학생들은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죽을 맛이네.’
이안은 숨을 몰아쉬며 상황을 점검했다. 언뜻 보기에는 이안이 레아와 호각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꾸준히 검을 받아치느라 신체. 특히 팔과 손목에 누적된 충격이 작지 않다.
약자는 단지 막기만 해도 불리해진다니. 조금은 억울했다. 하지만 원래 싸움이란 불합리한 것이다.
그렇기에 강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고.
[포기할 건가요?]
‘그럴 수는 없죠. 이렇게 얻어맞았는데, 한 방 정도는 때려줘야 직성이 풀리겠어요.’
[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대련 아니었나요?]
이안은 이네스의 중얼거림을 깔끔히 무시하며 레아를 살폈다.
십수 합을 주고받았는데도 여전히 고른 숨을 내쉬는 레아. 하지만 레아도 마냥 멀쩡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레아의 이마에 맺힌 땀 한 방울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단순한 땀이 아니다.
아무리 강해도. 레아 역시 인간이라는 증거였다.
툭!
흘러내린 땀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비산했다. 그와 동시에 이안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어쩌면 처음으로 이안이 레아를 상대로 주도적으로 펼쳐 보이는 공격.
하지만 레아는 방어를 취하는 대신, 마주 공격하는 걸 택했다.
이 또한 강자의 특권.
이안의 찌르기가 레아의 가슴을 향했고, 레아의 찌르기 역시 이안의 가슴을 노렸다.
레아의 검에는 이제껏 없던 섬뜩함이 서려 있었다. 대련이라는 틀로 스스로를 구속하던 속박을 모두 벗어 버린 것이다.
더 쉽게 말하면, 이제 대련이고 뭐고 이기는 데에만 집중한다는 의미였다.
‘씁. 더럽게 살벌하네.’
눈으로 읽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게 접근해오는 검을 보노라면 오금이 저렸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담력 싸움이다.
여기서 어설프게 피하거나 막는 동작으로 전환하면 무조건 패배다.
먼저 운전대를 돌리는 쪽이 죽는 치킨 게임.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얻어맞으면 얻어맞았지, 먼저 빼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후욱.
올곧게 뻗어 나가는 두 목검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결과는 아직 미지수.
먼저 검을 뻗었고 팔이 더 긴 이안이 아주 살짝 유리해 보였지만, 레아의 검이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내가 무조건 진다.’
계산이 섰다.
무조건 레아의 목검이 먼저 닿는다.
이안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목검에서 눈을 뗐다. 이렇게 된 거, 당할 때 당하더라도…….
쾅!
미처 생각을 끝마치지 못한 채, 이안의 몸이 강한 충격에 의해 뒤로 밀려나 벽에 부딪혔다.
벽에 부딪힌 이안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스르르 쓰러졌다.
“어. 어. 끝난 건가?”
“이, 이겼다. 역시 황녀 저하야!”
“푸하하. 나대더니 꼴좋다!”
“역시 대단하셔.”
구경하던 학생들은 경사라도 난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레아는 주위의 대화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쓸 수 없었다.
“후우. 후우.”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체력이 다 해서…… 는 아니었다.
레아는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서로에게 목검을 뻗던 그 순간을. 이안이 뿜어내던 알 수 없는 기백을. 그리고 그 눈동자 속에 섞여 있는 악착같음을.
그때 아주 잠깐. 아주 조금이지만 레아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뭣 때문에…….’
알 수 없는 사내였다. 검술 실력도 그렇고, 의지도 보통이 아니었다.
처음 코르디스에 평민이 들어왔다 들었을 때, 레아 역시 의아하게 여겼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역시 코르디스라 이건가.’
레아는 실컷 떠들고 있던 학생들에게 부탁해 기절한 이안을 의무실에 데려다 달라 부탁했다.
그들은 탐탁지 않은 눈빛이었지만, 이내 황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어 영광이라는 듯.
이안을 챙겨 의무실로 향했다.
다리를 잡아당겨 머리가 질질 끌리는 모양새였지만…….
레아는 한숨 돌리며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가슴 한편이 욱신거렸다.
알 수 없는 감각에 의아해하던 레아는 명치에 난 자그마한 멍을 보았다.
목검에 명치를 얻어맞고 의식이 끊기기 직전까지 집중을 유지하며, 어떻게든 목검을 몸에 닿게 했다는 거다.
피가 다 식고 나서야 느껴질 정도로 얕은 상처.
하지만 대련에서 상처를 입은 게 대체 얼마 만이었을까.
또래에서는 적수를 찾아볼 수 없거니와, 기사들에게 대련을 청해도 행여나 귀한 몸에 상처라도 날까. 대충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정중히 거절하고 도망가 버리거나.
그렇기에 이렇게 진심으로 검을 섞는 건 퍽 신선한 느낌이었다.
“독한 사람이야.”
레아는 피식 웃으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즐거운 대련이었다. 배울 것도 있었고.
잠시 몸을 푼 레아는 다시 검을 잡았다.
이제 귀찮게 하는 방해꾼들도 다 사라졌으니 제대로 수련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