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첫 친구
눈을 떴을 때는 의무실 안이었다.
묘하게 이안을 어려워하던 의사의 말로는 갈비뼈에 금이 갔단다.
‘그런 일격에 얻어맞고 겨우 금이 가는 걸로 끝나다니. 내 몸이 진짜 튼튼해지긴 했구나.’
이안은 붕대로 칭칭 감긴 부근을 어루만졌다. 아직도 목검이 명치를 찌를 때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레아 양과의 대련에서 무엇을 느꼈나요?]
‘음. 좀만 더하면 해볼 만하겠던데요?’
대련의 형식이니만큼, 레아가 모든 실력을 드러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검을 맞대면서 실력의 차이가 그렇게까지 크지 않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깨닫는 게 있어서 다행이네요.]
‘이네스 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황녀의 검술에 대해서.’
[저의 검술과 비슷한 향취가 많이 나요. 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오면서, 여러 부분이 바뀌거나 변질 된 것 같네요.]
시간이 흐를수록 기술이 꼭 발전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특히 황족에게만 전해지는 검술처럼 적은 인원에게 전승되는 기술은 오히려 전대만 못 하게 변질되기도 한다.
레아의 경우도 비슷했다.
[분명 레아 양도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요. 천재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하지만…….]
‘이네스 님 만큼은 아니다 이거죠?’
[그래요. 부끄러워서 하기 힘든 말을 굳이 적나라하게 말해주다니, 차암 고맙네요.]
‘별말씀을.’
천재가 만든 검술은 천재만이 이해하고 온전히 사용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전의 황족들은 그렇게까지 뛰어난 재능은 없었던 모양.
아예 이네스의 재능 일부를 전해 받은 이안과는 사정이 달랐다.
‘어쨌든 당장의 목표가 생겼네요. 황녀. 제가 한번 이겨보죠.’
[그러면 또 부지런히 수련해야겠네요.]
‘일단…… 상처부터 나아야겠지만요.’
이안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조용히 맞았다. 따스했다. 봄이 다가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이안은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으며 햇살을 즐기다, 스르르 잠에 들었다.
***
“올해에도 대륙 각지에서 찾아온 원석들이 이곳, 코르디스를 찾아왔군요. 긴 시간 학교장 직을 맡아온 저이지만, 이렇게 뛰어난 인재들이 한 학년에 들어온 적은 처음입니다. 이 원석들이 어떤 보석이 되어, 찬란한 빛을 내뿜을지 벌써 기대가 되는데요…….”
“다음은 부교장을 맡고 계신 로버트님의 축사입니다.”
“다음은 코르디스를 후원해주시는 리벨 백작의…….”
“그다음은…….”
입학식은 이곳에서도 입학식이었다.
누군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은 인사들의 끝없는 축하 연설.
이네스만이 눈을 빛내며 올라오는 이들을 구경할 뿐이었다.
[와. 리벨 공작이라니. 저와 동료들이 한때 리벨 백작령에서 악마의 군세를 막아내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거든요. 그때는 남작령이었는데…….]
이안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대륙 최고의 교육기관이라는 명성답게 입학식을 굉장히 화려하게 해서 눈이 심심하지는 않다는 거다.
이안은 화려하게 반짝이는 거대한 샹들리에를 보며 말했다.
‘저런 거 있으면 꼭 한 번씩 떨어트려 보고 싶지 않아요?’
[이안이 말하면 농담으로 안 들리니까 그러지 마세요.]
‘농담 아닌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떨어트려 보자. 그렇게 머릿속에 생각을 집어넣은 이안은 주위 소리에 집중했다.
대부분은 고명한 인사들의 연설을 열심히 들으려 했지만, 지루한 건 어쩔 수 없는 법. 몇몇 학생이나 교직원들은 자기들끼리 떠들어댔다.
“올해에는 황제 폐하께서 안 오시는 건가?”
“안 오시는 게 아니라 못 오시는 거지. 병마와 싸우고 계신다잖아.”
“그럼 하다못해 황태자 전하라도 오셔야…….”
“쉿.”
동료의 입단속을 시킨 교직원이 뜬금없이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 안에 담긴 시선은 다른 학생들의 그것과 달랐다.
학생들은 순수하게 이안을 멸시하거나 경멸한다면, 교직원들의 눈에 깃든 건 경계.
다만 그 경계의 이유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왜 황태자를 언급하면서 나를 경계하는 거야.’
황태자는 아마도 크레이 사가의 메인 가장 비중 있는 인물 중 하나일 것이다.
스토리에 미치는 영향력도 어마어마하고, 강하기도 더럽게 강하다.
정상적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면 5년 차의 보스로 상대해야 되니, 그 강함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뭔가 머리에 나사가 빠진 캐릭터였던 것 같은데. 황제의 식사에 독을 탄 것도 그놈이었던가.’
이안은 황태자에 대해 생각하다, 이내 신경을 껐다.
일러야 2,3년 이내에야 마주칠 상대에 대해 당장 고민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뭐. 일단은 여기에 온 목적부터 이뤄야겠지.’
***
입학식이 끝나고.
이안을 비롯한 학생들이 배정받은 교실로 향했다.
곧바로 내성에 있는 학사 건물로 가는 어퍼 클래스 학생들과 달리, 사이드 클래스 학생들은 성 밖으로 향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어퍼 클래스를 향한 부러움과 질투가 노골적으로 눈에 보였는데, 학생들은 오히려 그 시선을 즐기는 듯했다.
교실에 도착한 학생들은 각자 원하는 자리에 앉았다.
새 학기임에도 이미 친한 사람끼리 모여 앉는 게 인상적이었다.
“대단해요 플로라 님!”
“역시 플로라 님이에요!”
“후후. 이 정도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고!”
플로라는 추종자로 보이는 두 소녀에게 한껏 가슴을 펴며 으스대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안을 노려보는 게, 이게 자신이 받아야 할 정당한 대우라는 걸 몸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 시선을 싹 무시해 버린 이안은 다른 곳을 살폈다.
교실 한구석에 모여 있는 일곱 명 정도의 패거리.
그 중심에는 회색 머리와 갈색 눈이 인상적인. 서글서글한 느낌의 소년이 있었다.
‘루크 브레이브하트. 레아 다음인 2순위로 들어왔던가.’
이안도 알고 있는 캐릭터다. 가문도 훌륭하고 실력도 출중. 외모도 눈에 띄는 그림에 그린듯한 귀족 자제.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언급만 있지, 스토리에서 이상할 정도로 비중이 없었다.
‘호감도를 쌓기도 불가능하고 말이야. 가능했다면, 쟤도 동료로 삼아보는 것도 괜찮았을 텐데.’
어쨌든 이곳은 게임이 아닌 현실이다. 저 사내가 이 학급에서 꽤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 외에도 친해 보이는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 있었는데, 혼자 앉은 학생은 딱 둘이었다.
이안과 레아.
이안은 당연하게도 다가오는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고. 레아는 합석을 제안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차갑게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
‘어쨌든. 이 중에 악마를 불러내는 장본인이 있을 수 있겠네요.’
2년 차의 여름. 코르디스에는 큰 이벤트가 발생한다.
악마의 강림.
학사의 인물 중 누군가가 악마를 소환해 코르디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만약 플레이어가 이벤트를 포기하면 코르디스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이후 스토리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문제는 누가 악마를 소환하는지는 안 알려준단 말이죠.’
제작사의 의도인지. 아니면 그냥 대충 만든 것인지. 끝끝내 범인이 누군지는 플레이어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찝찝하게 마무리되는 이벤트데, 지금으로선 그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미리 알았으면 여러모로 더 대응하기 쉬웠을 텐데요.’
[아니면. 차라리 악마가 소환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리는 건 어떨까요?]
‘누가 믿어주겠어요. 오히려 악마에 홀린 거 아니냐고 교단에 안 넘기면 다행이지. 그리고 이벤트 자체를 없애 버리는 건 원하지 않아요.’
크레이 사가에는 정해진 흐름이 있고, 그 흐름에 따라 이벤트가 진행되면 이안의 지식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중간에 무언가 엇나가서, 상상도 못 한 결과로 돌아온다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이안은 아직은 그런 큰 리스크를 짊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큰 그림을 그리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변수를 최소화하는 것이니까.
‘베스트는 상황을 내 통제 안에 두면서 이벤트를 발생시키는 것이지만…….’
그걸 위해서는 범인이 누군지 특정해내야만 한다.
특정을 하고 싶어도, 지금으로선 압도적으로 정보가 부족하지만.
그렇게 고민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퍼클래스의 지도를 맡은 교수가 어느새 1년간의 커리큘럼에 대해 설명을 모두 마친 뒤였다.
입학식이니만큼 그대로 수업은 끝.
학생들은 그대로 자기들끼리 조잘거리며 반을 나섰다.
‘뭐. 첫날부터 머리 싸매고 고민할 필요는 없겠죠. 오늘부터 해야 할 일도 많고.’
이안도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벗어났다.
한산한 복도를 지나 학사 건물을 나서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루크 브레이브하트.
분명 자기 패거리와 함께 교실을 나섰던 녀석이, 어찌 된 일인지 건물 앞에 세워진 동상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이안은 그런 루크를 지나쳐 가려 했다.
내심 말을 걸어보고도 싶었지만, 괜스레 안 좋은 인상만 줄 것 같아 자제했다.
“이 동상이 뭔지 알아?”
이안이 우뚝 멈췄다.
듣기 좋은 미성이 흘러나온 곳은 당연히 루크의 입이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건 루크와 이안 뿐.
루크가 미친 게 아니라면 당연히 이안에게 말을 건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저한테 말 건 거 맞죠?’
[당연하죠.]
‘근데 엄청 살갑게 말하네요.’
[슬프네요…… 멸시와 무시에 너무 익숙해져서 이젠 당연한 대우를 받아도 믿지 못한다는 게.]
어쨌든 먼저 말을 걸어줬으니, 이안은 루크의 시선을 따라 동상을 쳐다보았다.
근엄한 얼굴로 한 손에 검을 들고 다른 손에는 지팡이를 든 청년.
이네스가 학사를 구경시켜 줄 때 한 번 설명해준 적 있는 인물이었다.
“몇백 년 전에 악마를 쓰러트렸다는 영웅 아니야?”
“배니아 로웰. 로웰 후작의 장남으로, 검과 화염 마법을 모두 수준급으로 다루던 천재 중의 천재. 배니아 로웰 이전의 코르디스는 사실 흔하디 흔한 교육기관이었던 거 알아?”
“아…… 그래?”
루크는 그림에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배니아 로웰은 학생들을 결집해 악마의 군세를 막아내고, 곧바로 뜻있는 학생들을 모아 악마들의 영토로 향했어. 거기서 힘겨운 전투와 많은 희생 끝에 악마를 잠재우는 데에 성공했지. 위업을 이뤄낸 배니아 로웰은 다시 이곳 코르디스로 돌아와, 학사의 발전에 나머지 인생을 바쳤어.”
이안은 루크가 해주는 역사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솔직히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설명하는 루크의 미소가 너무 반짝여서 초를 치기가 싫었다.
이안이 말했다.
“배니아 로웰을 엄청 좋아하나 보네.”
“응.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거든. 그래서 그가 일으켜 세운 이 코르디스도 사랑해.”
자기 학교를 사랑하다니.
이 무슨 드라마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바른 생활 사나이란 말인가.
적어도 이안의 인생에서, 자기 학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루크가 처음이었다.
‘어. 지금 분위기 좋은데.’
언제나 멸시만을 받아온 이안이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그렇다고 이안이 그런 대우를 즐기는 건 절대 아니었다.
드디어 이곳에도 친구라고 부를만한 이가 생기는 걸까.
“난 코르디스가 언제나 빛났으면 좋겠어. 티끌이나 흠 하나 없이, 밝게. 찬란하게. 그러니까…….”
루크는 친근하게 이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적당히 알아서 그만두지? 죽여 버리기 전에.”
순간.
봄처럼 따스하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이안은 자기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도 그럴게. 살벌한 말을 뱉은 루크는 지금도 여전히 그림 같은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이없어진 이안이 툭 쏘아붙였다.
“아니, 깜빡이 좀 키고 들어와 미친놈아.”
“깜빡이……?”
잠시 멈칫한 루크가 뒷짐을 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눈빛은 아까와 달리 한없이 냉랭했다.
“이곳은 우리 같이 선택받은 인간들을 위한 공간이야. 너 같은 열등한 버러지가 더럽혀도 좋을 곳이 아니지. 나는 네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고 있어.”
“......꾸며?”
이안의 의문을 무시하며 루크는 이어 말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할게. 나는 너 말고도 신경 쓸 사람이 많아. 그러니 내가 자비를 베풀 때 알아서 이곳을 떠나.”
듣던 이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눈감아준다니. 누가 보면 내가 죄라도 지은 줄 알겠어?”
“자기 분수를 모르는 건 명백히 죄야.”
“말을 말자. 그래. 우리 속이 시커먼 양반. 이거 어쩌나. 나는 여기서 할 일이 있는데.”
루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말로 안 되면 다음 수단을 쓸 뿐이지. 한 가지 확실한 건, 네가 사지 멀쩡히 이 섬을 나갈 가능성은 방금 사라졌다는 거야.”
제법 살벌한 협박을 내뱉은 루크는 그대로 등을 돌려 사라지기 전. 마지막 말을 뱉었다.
“허튼짓할 생각은 하지 마. 그 쓸모없는 목숨이라도 보전하고 싶으면.”
이안은 한동안 그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와아. 이건 진짜 예상 못 했는데…….’
지금껏 베일에 싸여 있던 캐릭터의 성격을 알게 된 것이 충격이었다. 진실이 이랬다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게다가 이안은 루크의 악의와 의지를 엿보았다.
지금껏 그에게 야유를 보내던 학생들과 본질 자체는 비슷했지만, 그 결은 조금 달랐다.
말뿐인 협박이 아니라 진짜로 실행에 옮길 거라는 의지가 느껴졌다고 할까.
‘변수는 가급적 줄이고 싶었는데…… 벌써 변수가 생겨 버렸네요.’
실력도 뛰어나고 명문가에 벌써 학사 내에 자기 세력을 만드는 인물이라니.
꽤 골치 아픈 상대한테 찍혔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