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검광
까다로운 적이 생겼다.
가장 큰 문제는 이안이 루크에 대해 아는 정보가 한정적이라는 것.
‘브레이브하트 가문이라…… 아시나요?’
[알다마다요. 브레이브하트 가문 역시 먼 옛날 악마를 토벌한 영웅을 배출한 곳이에요. 아까 말한 배니아 로웰과 함께한 동료였죠.]
제국의 역사는 길다.
긴 역사 동안 악마는 몇 번이고 나타났다.
자연스레 악마를 토벌해 이름을 날린 가문도 많아졌다.
브레이브하트도 그중 하나였다.
‘먼 옛날에 공을 세운 가문. 하지만 계속해서 영웅들이 생기니, 그 이름값은 점점 떨어지겠네요?’
[아무래도 너무 먼 과거의 무용담은 잘 안 와 닿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플로라가 속한 피에람 가문과는 위상이 다르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몇 가지 사실 정도는 유추할 수 있어요.’
[뭔가요?]
‘게임에서 루크는 특정 상황 외에서는 거의 얼굴을 들이밀지 않아요.’
그 정도의 인물이 가끔 언급만 된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딱히 조용히 지내는 걸 선호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아마 자기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 뒤에서 수를 쓰는 걸 선호하는 타입이겠죠. 승리가 확실할 때만 얼굴을 들이밀거나.’
[그럴 수도 있겠죠. 속이 시커멓지만, 표정만큼은 놀랄 정도로 평온했으니까요. 이런 말 하기에는 그렇지만…… 타고난 귀족이에요.]
‘그런 인간이 굳이 직접 와서 경고할 정도라. 그만큼 자신이 있거나…….’
이안은 문득 루크가 한 말 중 걸리는 게 있었다.
―나는 너 말고도 신경 쓸 사람이 많아. 그러니 내가 자비를 베풀 때 알아서 이곳을 떠나.
이 말은 달리 해석하면, 루크에게는 다른 경쟁자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경쟁자들이 꽤 까다로워서, 저한테 여력을 쏟기 싫다 이거겠죠.’
[경쟁자라…… 그래도 조금은 다행이네요.]
‘예. 어차피 저야 한 학기만 있으면 되니, 그때까지 그 경쟁자가 잘 버텨주기를 바라야죠.’
이안은 문득, 그 경쟁자가 누구일지 호기심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고로 너무 많은 걸 알려 들면 다치는 법이다.
‘뭐. 저놈이 지금 당장 뭘 할지 모르지만, 저는 당장 제 일을 해결해야죠.’
당장 당면한 문제가 있었다.
오래도록 이안을 괴롭히는 문제.
바로 돈이었다.
***
“의뢰를 받고 싶다고?”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청년이 눈매를 좁히며 이안을 쳐다보았다.
서류 더미에 파묻혀 있는 책상 위에는 검은색 명패에 ‘자치회 서기 마틴 화이트 가드’라 적혀 있었다.
‘화이트 가드.’
상단 호위 중 함께했던 기사, 에스테반이 속한 가문이다.
아마 이 사내는 에스테반의 동생일 터.
‘닮은 듯 안 닮았네.’
갈색 곱슬머리와 푸른 눈은 에스테반과 판박이였다.
하지만 야성미를 풀풀 풍기던 에스테반과 달리, 눈 앞의 사내는 기사보다는 샌님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듣고 있어?”
이안이 생각에 잠기자, 마틴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학기 초라 안 그래도 바쁜데, 빨리 끝냈으면 좋겠는데. 어쨌든, 의뢰를 받으러 왔다고?”
“예. 여기서 의뢰를 받고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치회에서 내주는 퀘스트. 게임에서는 쏠쏠히 돈을 벌게 해주는 중요한 시스템이다.
어느 정도 코르디스 내부 스토리와도 연관이 있고.
사실, 코르디스에서 이것 외에는 합법적으로 돈을 버는 방법이 없다시피 하다.
마틴은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서류를 훑었다.
“맞아. 학생들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세상에 대한 너른 시야를 얻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우리 자치회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프로그램이지.”
마틴은 여러모로 자기 형과 닮아 있었다. 굳이 관심 없는 것까지 주절주절 설명한다는 점까지 말이다.
“다만 그것도 보통 2, 3 학년 학생들이 시간 남을 때 하는 거야. 넌 1학년 아니야? 그것도 심지어 오늘이 입학식이고. 재학생 중에서도 관심 없는 사람은 이런 제도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적은데, 대체 어떻게 안 거야.”
합당한 의문이다.
애초에 가문에서 오냐오냐 자란 귀족 학생들의 자립심을 기르고, 세상 물정도 가르칠 겸 시행되는 제도다.
하지만 교육적인 제도가 으레 그렇듯 그 참여율은 지극히 낮다.
그런데 뜬금없이 1학년 신입생이 찾아오니 의아할 수 밖에.
이안이 적당히 변명했다.
“어…… 어쩌다 주워들은 거죠.”
“그래? 그보다 시간은 넉넉해? 이제 학기 시작이라 이것저것 바쁠 텐데. 오히려 이럴 때는 학사에 적응하고 학우들과 친해지거나…… 앗.”
설교를 늘어놓으려던 마틴은 이안을 보며 무언가 생각나는 게 있는지, 급하게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어색한 얼굴을 급하게 말을 바꿨다.
“음!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좋지. 어.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잘하면 선배들과도 친분을 쌓을 수 있고.”
이안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대충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다만 의뢰들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을 거야. 너무 쉬우면 교육의 의미가 없으니까. 혹시 이런 일을 해본 적 있어?”
“예. 잠시 용병 일도 해봤습니다.”
마틴은 서둘러 서류를 꺼내 눈으로 훑었다.
“그래. 그럼 크게 문제 될 건 없겠네. 지금 할 만한 의뢰는 연금술 학부에서 의뢰한 약초 캐기 정도려나? 섬 동쪽에 있는 정령의 숲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로 할게요.”
“어. 설명도 다 안 듣고? 시원시원한 구석이 있구나. 근데 일단 당장은 어려워. 최소 4명이 안 모이면 숲에는 못 들어가는 게 원칙이거든. 의뢰를 함께할 다른 학생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할 거야. 이미 한 명은 차 있지만…….”
이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게임에서도 강제로 파티를 맺게 했으니까.
큰 상관은 없었다.
숲에서는 가끔 사나운 정령이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코르디스 학생이라면 크게 위험하지는 않은 정도.
난도가 높다기보다는 플레이어를 귀찮게 하는 종류의 퀘스트다.
마틴은 서류 작업을 끝내고, 복잡한 표정으로 이안을 보며 입을 달싹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쉽게 입이 안 떨어지는 모양.
그러다 마음을 잡았는지, 마틴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형님의 편지에 네 이름이 있더라고. 곧 이곳으로 오니, 잘 부탁한다고 달랑한 줄 쓰여 있더라.”
“어, 음. 그건 좀 감동이네요.”
그 에스테반이 편지를 쓸 줄이야. 책상에 앉아 펜대를 놀리는 모습이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마틴이 입을 열었다.
“형님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었어?”
머뭇거리는 어조에는 혈육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이안은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일부러 힘을 줘 말했다.
“너무 건강해서 문제일 정도죠.”
“그래?”
마틴은 뒷짐을 지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내벽 아래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그의 뒤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학사 생활을 하면서 물어보거나 도움 필요한 일 있으면 와서 말해. 겨우 서기 나부랭이지만, 손 닿는 데까지는 도와줄게.”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오늘. 화창한 태양 아래에서 이안을 코르디스에서 배제할 거라 선언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저무는 석양을 보며 이안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 말했다.
그 대비가 꽤나 극명해, 이안에게는 기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
이네스는 침대 위에서 다소곳하게 정좌한 채, 말했다.
“학생들의 선출로 뽑히는 자치회는 학사 내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요. 학사에서 운영 방침을 정할 때, 반드시 자치회의 동의를 받아야 할 정도로요. 우호적인 인물이 하나쯤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건 좀 이상하네요. 이 학교가 귀족 학생들로 구성되어서 그런 건가요?”
“그것도 있지만, 과거에 악마의 군세가 몰려들었을 때 학사의 교직원들이 전부 도망가 버렸거든요. 그때 학생들을 규합한 게 배니아 로웰이 이끄는 자치회였죠.”
무책임하게 학생들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 교사들과 스스로 악마에 맞선 학생들.
그러한 역사는 지금까지도 교권의 약화로 이어졌다.
“그나저나 여기서는 배니아 로웰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네요. 이네스 님도 코르디스 출신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뭔가 이네스 님 얘기는 잘 안 보이네요.”
“……그건.”
당황한 이네스가 씁쓸하게 얼버무렸다.
“제가 별로 인기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하하…….”
“이네스 님이요?”
잘 이해는 안 갔다.
이미 이네스는 그 수려한 외모만으로 인기를 사기에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굳이 더 언급하는 대신, 검을 들어 올렸다.
“뭐, 그건 됐고. 오늘도 부지런히 해보죠.”
“좋아요.”
가볍게 검을 휘둘러 상념을 베어낸 이네스가 빠르게 스텝을 밟아 다가왔다.
후웅.
살벌하게 뻗어진 검이 이안의 목을 노렸다.
급하게 고개를 튼 이안은 가까스로 검을 피했지만 뒤이어 날아오는 이네스의 발차기에 명치를 얻어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어…….윽. 좀 살살 하면 안 돼요?”
“엄살 그만 부리고 일어서요.”
꿈이라서 죽을 일은 없지만, 통증은 느껴진다. 가끔 이 정도의 통증을 느끼는데 왜 꿈에서 안 깨는 게 궁금할 따름.
하지만 이네스의 손속에는 자비심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고통에 익숙해져야 실전에서 당황하지 않는다고 더 가혹하게 몰아붙였다.
이네스의 검이 이안의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악!”
“아프다고 검 놓지 말고!”
강한 통증에 무심코 손에 힘이 풀리려 했지만, 이안은 가까스로 견뎌냈다.
그러고는 반사적으로 이네스에게 검을 내질렀다.
탁!
그 공격조차 너무나 쉽게 빗겨낸 이네스지만, 이안을 향해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훌륭해요. 공격을 받아도 경직되지 않는다니. 이제 제법 검사다워졌는데요?”
이네스의 진심 어린 칭찬에 이안은 대답 대신 씨익 웃었다.
재밌었다.
좁은 방 안에서 연필을 쥐고 있던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성취감이 있었다.
게다가 이안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뭣도 모르고 검을 잡았던 처음과 비교하면 몰라볼 정도였다.
“저번 레아 양과의 대련 때도 느낀 거지만 실력이 빠르게 느는 것 같네요.”
“흐. 감사합니다.”
뿌듯해하는 이안에게 이네스가 엄한 어조로 말했다.
“다만, 아직 기초단계를 간신히 벗어났다는 건 잊지 말아야 해요. 뭐든지 처음 배울 때 가장 실력이 빨리 느는 법이잖아요? 승승장구하다가 하나의 벽에 가로막혀서 좌절하는 검사가 밤하늘의 별처럼 많답니다.”
“벽이라…… 이네스 님도 그런 벽을 겪은 적이 있나요?”
“글쎄요. 저는 아직 그런 경험은 없네요.”
“……엄청 재수 없는 말이네요. 그거.”
이안의 핀잔에도 이네스는 맑게 웃을 뿐이었다.
한숨을 내쉰 이안이 말했다.
“평소처럼 그거나 보여줘요.”
“또요?”
“네. 봐도 봐도 안 질리더라고요. 뭔가 깨달음을 얻을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이네스는 검을 잡고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아지랑이가 검신에서 한올 한올 피어나더니 이내 화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경지에 오른 검사가 자신의 삶을 벼려내 만드는 찬란한 광채.
이안은 이네스의 검광이 발하는 빛을 홀린 듯이 구경했다.
‘고결하다.’
그 단어 외에는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한치의 더러움도 없는 찬란한 빛.
하지만 너무나 눈부시기에, 오히려 고독하게 느껴지는 그 빛을 향해 이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고…….
딱!
이네스에게 꿀밤을 얻어맞았다.
“아야…….”
“정신 차리세요.”
이네스는 새침하게 말하며 검광을 해제했다.
아쉬움에 탄식을 내뱉던 이안이 물었다.
“저는 언제쯤 검광을 뽑아낼 수 있을까요?”
“글쎄요. 검광을 피워낼 수 있다는 건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의 반열에 드는 건데…… 아직 한참 멀었죠.”
“역시 그렇겠죠?”
“그래도 저와 함께니, 언젠가 꼭 이안만의 검광을 피워낼 수 있을 거예요.”
아직은 아득하게 멀어 보이는 경지.
이네스의 상냥한 격려에 이안도 이내 기운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하다 보면 다 되겠죠.”
“좋은 마음가짐이에요.”
다시 일어선 이안은 다시 검을 들었고, 둘은 다시 검을 섞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