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33화 (34/222)

33. 로든

갑작스러운 말에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뜻이야.”

“아 신경 쓰지 마.”

이안은 대충 손을 휘저어주고 말을 삼켰다.

사내가 더 무어라 얘기를 하려 했지만, 옆에 있던 여자가 제지했다.

“나는 마리야. 이쪽은 그렉. 둘 다 사이드 클래스 1반이야. 잠깐 함께하는 거지만 잘 부탁해. 선배님도요.”

“아, 으, 응. 잘 부탁해.”

로든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빨리 가자. 주말인데 빨리 끝내고 쉬고 싶잖아?”

딱딱해질 수도 있는 분위기를 마리가 능숙하게 이끌었다.

마리와 그렉이 앞장섰고, 어벙하게 서 있던 로든이 황급히 뒤따랐다.

“애, 애들아. 기, 길 알아? 내가 앞장설까?”

“그 정도 조사는 다 해왔죠. 선배는 그냥 따라오기만 하세요.”

“으, 응.”

학년으로 보면 으레 로든이 이끄는 게 옳았으나, 마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리더 포지션을 잡았다.

묘한 표정을 짓던 로든은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 뒤를 따라 걸었다.

그 모든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던 이안도 로든을 뒤따랐다.

숲을 향해 말없이 걷기를 한참.

지루함을 못 이긴 그렉과 마리가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주로 서로의 실력을 늘리기 위한 방법에 대해 토론했는데, 이안이 보기에는 꽤나 건설적인 대화였다.

그렉과 마리가 앞서 나가고, 거리가 조금 떨어지자 이안이 로든에게 말을 걸었다.

“선배님.”

“어, 응? 나?”

“그럼 여기서 선배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달리 누가 있겠어요?”

“아, 응. 그렇네. 헤헤. 미안.”

어색한 미소.

이안은 계속해서 참고 있던 화두를 꺼냈다.

“선배도 머리가 검네요? 저 외에는 처음 봤어요.”

“아, 응. 나도 처음이야. 엄청 힘들었겠다. 너도.”

그 말은 자기도 힘든 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상할 건 없다.

검은 머리 검은 눈을 불길하고 사악하다 여기는 이 세계에서 로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뻔하니까.

눈까지 검은 이안보다는 상황이 나았겠지만.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야 뭐 익숙하죠.”

“그, 그래?”

“그보다 선배는 왜 굳이 이런 일을 하시는 거예요? 혹시 저처럼 돈이 부족해서?”

“어, 응. 부끄럽지만…… 맞아. 가문에서 나는 없는 자식 취급이거든. 그나마 등록금 자체는 장학금으로 어떻게 해결했지만, 생활비가 부족해서…… 헤헤.”

로든이 푼수처럼 웃었다.

처음에는 사람이랑 대화하는 것 자체를 어색해하던 로든이었다.

하지만 같은 어려움을 공유하는 이안에게 동질감을 느끼는지 점점 불편해하는 낌새가 줄었다.

곰곰이 얘기를 듣던 이안이 물었다.

“장학금…… 장학금이 있어요?”

“어, 응. 희소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어.”

이건 또 난생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이안이 바로 물었다.

“특별한 능력이라니요?”

“어…… 보, 보고 놀라지 마.”

로든은 쭈뼛거리며 품 안에서 검은색 양산을 꺼냈다.

그대로 양산을 펼쳐 태양을 향했는데, 로든은 양산이 만들어낸 그늘에 말을 걸었다.

“나, 나와줘.”

그러자 그림자 속에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생겨나더니, 자그마한 그림자 인간이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 정령이야. 시, 신기하지?”

로든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그림자 정령을 가리켰다. 그림자 정령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와…….”

[그림자 정령이라니. 확실히 희소한 능력이긴 하네요.]

“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나요?”

이안은 그림자 정령을 툭 건드려보았다.

하지만 딱히 형체는 없는지, 그림자 정령의 몸속에 손가락이 쑥 빨려들어 갔다.

기겁한 이안은 황급히 손을 뗐다.

“어, 어. 지금은 어둠을 조금 불러와 눈을 가리거나, 정찰 정도. 더 실력이 늘면 감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데 아직 거기까지는…….”

“그래요? 근데 엄청 귀엽긴 하네요.”

“그, 그래? 다들 불길하다고 말하던데. 헤헤.”

정령이 칭찬받은 게 기쁜지, 로든이 맑게 웃었다.

이안은 정령을 보며 생각했다.

‘또 하나 배웠네.’

그림자 정령은 게임에서도 마주쳐본 적 없는 종류의 정령이었다.

단순히 희귀한 종류의 정령이라 그런지, 아니면 쓸모가 없어서 기억에서 지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실전에서 쓰는 걸 보고 싶은데. 어떻게 정령과 계약했던 건지도 듣고 싶고. 역시 그건 어렵겠지?’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하는 사이, 저 앞에서 가고 있던 둘이 어느새 멈춰 서 기다리고 있었다.

로든은 황급히 그림자 정령을 다시 그림자 속으로 들여보냈다.

양산을 어정쩡하게 든 로든을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한 마리가 말했다.

“정령의 숲이야. 연금술 학사에서 요구한 재료가…….”

“블루 허브잎 10개. 겨울 넝쿨 20뿌리. 레드 히아신스 20뿌리. 들 박하 꽃 10개. 가급적 뿌리와 잎을 훼손하지 않고 온전하게 가져올 것.”

“……다 외우고 있었구나.”

이미 몇 번이고 해본 퀘스트다. 당연히 세부적인 내용은 다 알고 있었다.

설명을 듣던 그렉이 말했다.

“그럼 4종류니까 각자 흩어져서 하나씩 찾으면 되겠네. 그치?”

“어, 어? 그건 좀…….”

당황한 로든이 횡설수설 설명했다.

“아, 아무리 섬 내에 있는 숲이라도 숲은 숲이라…… 떨어져서 다니면 길을 잃을 수도 있고, 또 습격을 당할 수도 있고…….”

“거참. 그러면 큰소리로 외치면 되잖아요. 그리고 무슨 길을 잃어요. 애새끼도 아니고.”

거칠다.

도저히 선배를 대하는 태도라고 믿을 수 없다.

하지만 로든은 되레 어깨를 움츠리며 사과했다.

“어, 어. 미안.”

“그렉.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예의 없게. 그래도 저도 그렉 말에는 동의해요. 함께 다니면 어느 세월에 전부 다 캐겠어요. 기본적으로 흩어져서 찾아다니고, 무슨 일이 있으면 큰소리를 지르는 거로. 괜찮죠?”

부드럽게 타이르는 마리의 말에 이미 기가 죽은 로든은 휙휙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가 이안을 쳐다봤고, 이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해졌네요. 그럼 우선, 로든 선배님은 저쪽으로 가서 레드 히아신스를 찾아주세요.”

“어, 어. 나?”

“예. 여기에 선배라고 불릴 사람이 달리 더 있나요.”

본의 아니게 이안에게 들은 것과 똑같은 핀잔을 듣게 된 로든이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표정이었고, 그렉은 로든을 사납게 노려볼 뿐이었다.

“알았어…….”

그 등쌀에 못 이긴 로든은 뭐라 항변조차 몸하고, 서둘러 마리가 가리킨 곳을 향해 떠났다.

그렉은 그 등에 대고 병신 같은 새끼라며 작게 중얼거렸다.

마리가 말했다.

“그럼 우리는 안쪽으로 더 가볼까?”

마리가 앞장서고, 그렉이 이안의 뒤에 섰다.

이안도 순순히 걸었다.

잠깐의 침묵.

하지만 마리가 먼저 침묵을 깼다.

계속 신경 쓰이던 게 한가지 있었다.

“아까 처음 봤을 때, 연기가 어색했었다고 했잖아?”

“그랬지.”

“그 말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어. 무슨 의밀까, 하고.”

이안은 순순히 대답했다.

“말 그대론데?”

“그대로라니?”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활엽수가 어우러진 깊은 숲속.

봄을 맞아 푸르름이 돋아나고 있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누가 찾아올 가능성도 적다.

“자기 의도를 숨기기 위해 하는 게 연기라면, 네 연기는 실패라고.”

“글쎄. 무슨 말일까?”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그렉이 고함을 질렀다.

마리와 다르게 그는 성급한 성격이었다.

이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너희 목적이 애초에 나였다는 걸 다 알아챘다고.”

“음…… 어떻게?”

아니라고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건 곧 이안이 추측이 옳다고 인정하는 꼴.

“나를 보자마자 미소를 짓더라고. 열심히 연습했는지 제법 보기 좋았어.”

“그러면…….”

“근데 생각해봐. 검은 머리 검은 눈, 그것도 어퍼 클래스에 있는 평민이 같은 팀에 있다는데 웃음 지을 놈이 세상 몇이나 되겠냐.”

뒷골목을 살아가려면 그러한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알아야 한다.

꺼리는 기색을 내비쳤다가 급하게 미소짓는 게 아닌, 처음부터 이안을 보고 미소지었다면 상황은 뻔하다.

“성격이 아주 좋은 사람이거나, 내가 있는 걸 이미 알고 있거나.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크겠지. 게다가 선배들도 잘 모르는 이런 제도를 신입생들이 갑자기 짝지어서 찾아온다? 너무 이상하잖아.”

마리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여기까지 와서 굳이 변명하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배후에는 역시 루크려나. 생각보다 더 빨리 손을 썼네.’

아직 그때의 만남 이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 이안의 동향을 파악해낸 루크는 주저 없이 행동에 나선 것이다.

마리는 한숨을 푹 내쉬고, 길게 내린 머리칼을 한데로 묶었다.

“하아. 적당히 불쾌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이거야? 설마 너한테서 뭔갈 배울 줄은 몰랐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야. 알아챘든 아니든, 함정에 걸려든 건 똑같잖아!”

가슴을 쿵쿵 두드린 그렉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라면 아무도 도와주러 올 사람이 없어. 설마 로든 그 찌질이가 소리를 듣고 찾아오길 원하는 건 아니지?”

“왜? 날 여기서 죽이기라도 하게?”

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거야. 사람이 죽는 건 큰일이니까. 하지만 의외로 코르디스에서 폭력 사태에 대해서는 유순하게 대처하는 거 알아?”

귀족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다.

만약 폭력 사건에도 일일이 엄격한 잣대를 정해놓았다가, 자칫해서 지체 높은 귀족 자제를 퇴학시켜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골치 아프다.

그렇기에 교내에서 행해지는 폭력 사태에 대해서는 엄중히 처벌한다고 명시하지만, 실상은 쌍방 과실이니 아직 나이가 어리니 하는 명목으로 솜방망이 처벌만 내리기 일쑤다.

심해봤자 정학이나 근신 정도려나.

하물며 뒷배 없는 이안이면 말할 것도 없다.

“뼈 하나둘 정도는 부러트려서 수업을 못 들을 정도. 그 정도만 할게.”

“아주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이안은 검집째로 검을 들었다.

여기서 검을 휘두르다 혹시라도 저 둘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면, 그것이야말로 루크의 노림수에 말려드는 거다.

이안은 목을 두둑 꺾으며 말했다.

“아까 함정에 걸렸다고 했었나? 정확히 말하면 걸린 게 아니라 내가 걸려준 거야.”

“……뭐?”

“황녀한테 대련에서 졌다고 요즘 날 만만하게 보는 친구들이 많더라고. 실력이 안 돼서 어퍼 클래스에도 못 오는 놈들이라면…… 둘로는 한참 부족하지.”

그렉의 두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굳어 있던 마리의 눈썹도 팔자로 휘었다.

어퍼 클래스.

아마도 모든 사이드 클래스 학생들의 역린.

격렬한 열등감과 그것보다 더 큰 분노가 그렉의 눈빛에서 소용돌이쳤다.

“이 새끼가……!”

그렉이 고함을 지르며 손에 든 무기를 휘둘렀다.

메이스와 원형 방패. 정석적인 만큼 까다로운 조합이다.

강철로 만들어진 메이스가 안에서 바깥으로 맹렬하게 휘둘러졌다.

탁.

이안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 빈틈을 찾았다.

하지만…….

‘단단하네요.’

[잘 훈련된 자세에요.]

거칠어 보이는 행동과 달리, 도무지 그렉의 단단한 방어를 뚫어낼 틈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검을 뻗어도 왼손의 방패에 튕겨 나가는 그림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부웅.

계속해서 메이스를 휘두르는 그렉에 맞춰 이안도 뒤로 물러났다.

‘언뜻 보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은데…… 다 계산된 것 같아요.’

[코르디스 입학증을 주사위 놀이로 따낸 건 아니라는 거죠.]

그렉의 공격에는 명백히 의도가 있다. 이안의 움직임을 한쪽으로 유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이안은 우선 지켜보기로 했다.

섣불리 나서기에는 정보가 부족한 데다, 이들이 어떤 공격을 해 올 지에 대해서도 조금 흥미가 있었다.

많이 보고 경험하는 게 결국 실력의 향상으로 이어진다.

‘경험을 쌓아야 해.’

이안은 실력이 빨리 느는 만큼, 경험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게임에서의 지식들은 분명 도움이 되었지만, 결국 그 정도다.

게임과 현실은 역시 다르니까.

앞으로는 직접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만큼, 오히려 이렇게 싸워볼 기회는 귀하다.

팡!

그렉의 메이스가 이안이 서 있던 바닥을 강타했다.

그 잠깐의 틈을 노려 이안은 검을 찔러 넣었지만, 이미 그 자리에는 방패가 가로막고 있었다.

퉁!

방패에 튕겨 나간 반동으로 이안의 몸이 균형을 잃었다.

동시에 그렉의 눈이 빛났다.

기회를 포착한 맹수의 눈.

“먹어라아!”

방패를 바닥에 던진 그렉은 양손으로 메이스를 붙잡고, 온 힘을 다해 휘둘렀다.

급하게 균형을 다시 잡은 이안은 서둘러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노리는 건 이안이 아니었다.

퍽! 우지끈!

아직 덜 자란 참나무가 메이스에 얻어맞아 서서히 기울더니, 순식간에 바닥을 향해 넘어갔다.

쿵.

굉음과 함께 흙과 부식토가 피어올라 진한 먼지구름을 만들어냈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시야.

그제야 이안은 저들의 노림수를 알아챘다.

‘처음부터 시야를 가리는 게 목적이었어…… 그러고 보니 아직 여자 쪽이.’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먼지구름을 뚫고 수십 개의 돌덩이들이 이안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콰륵.

다시 한번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

그렉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후우. 끝났나? 설마 이걸로 죽은 건 아니겠지?”

“글쎄. 그렇게 약골은 아닐 것 같은데. 그래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아. 머리 위로 그만큼 돌덩이를 얻어맞으면 멀쩡하기는 힘들지.”

한 건 해결했다는 생각에 마리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이것으로 목적은 이뤘다.

이제 루크의 약속대로 어퍼 클래스에 오르는 데에 도움을…….

“무슨 냄새 안 나?”

그렉이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마리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마리는 그렉을 속으로 등신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전사로서의 감각 하나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소한 말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무슨 냄새.”

“아니, 타는 냄새 같은 게 나는데?”

“갑자기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무언가 불길한 감각을 느낀 마리가 고개를 훽 돌려 돌덩이를 떨군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 자욱하게 깔린 흙먼지 구름. 그 흙먼지 구름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구름이 걷혔다.

마리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말을 잃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흙먼지 구름 속에 있는 건 맹렬히 타오르는 화염의 장막 속에 서 있는 이안.

그 비현실적인 모습에 그렉과 마리는 둘 다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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