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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36화 (37/222)

36. 벽

코르디스의 수련장 이용률은 굉장히 높은 편이다.

안 그래도 가문에서 혹독한 수련을 거쳐, 코르디스에 입학하는 명예를 거머쥔 학생들이다.

땀 흘려 노력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삶의 일부였다.

게다가 사이드 클래스의 학생들은 위로 올라가기 위해.

어퍼 클래스는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분발하니, 수업이 끝난 후의 수련장은 언제나 학생들로 북적였다.

그래도 어퍼 클래스는 상황이 훨씬 나은 편이다.

어퍼 클래스 전용 수련장은 사용하는 인원은 훨씬 적은데, 더 넓고 시설이 잘 갖춰줘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늦게 오면 제대로 된 수련이 힘든 사이드 클래스 수련장과는 완전히 다른 처지.

‘돈도 많은 학교가 쪼잔하게. 좀 크게크게 짓지.’

[일부러 불편함을 느끼게 설계한 거겠죠. 그래야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구가 생길 테니까요. 그게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런 차별은 알게 모르게 학사 곳곳에 녹아 있다.

가문에서 왕자, 공주처럼 대우받다가 처음으로 이런 식의 불합리를 맞닥뜨린 학생들은 더더욱 열정을 불태우게 된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학사의 예측이고, 뭐든 그렇듯. 언제나 세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만…….

‘오늘도 붐비네.’

수련장 앞은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대부분은 사이드 클래스 학생들이다.

이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와. 벌써 몇 시간 째 검을 휘두르시는 거지?”

“역시 황녀님이야…….”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아.”

홀로 검을 휘두르는 레아를 보며 학생들이 감탄을 터트렸다.

사이드 클래스 학생들은 어퍼 클래스의 수련장에는 출입금지기에, 이렇게 밖에서라도 구경하는 것.

덕분에 정작 수련장 안은 널널한 편이었다.

“지나간다.”

이안이 구경하는 학생들을 뚫고 지나가자, 따가운 시선들이 등에 내리꽂혔다.

자기들도 함부로 못 들어가는 수련장을 검은 머리 평민이 들어가니, 어지간히도 아니꼬운 모양.

그런 시선들을 무시한 이안은 수련장 안에 들어섰다.

‘역시 혼자 수련하나?’

어퍼 클래스의 다른 학생들은 보통 파트너를 구해 대련하는 식으로 수련했다.

그편이 깨닫는 바도 많았고, 재미도 더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아만큼은 언제나 홀로 검을 휘둘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레아만큼은 언제나 혼자였다.

교실에서든 식당에서든 수련장에서든.

그 고귀한 신분 때문에 레아에게 다가가는 학생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차갑다 못해 냉기가 풀풀 날리는 반응으로 철벽을 칠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가가려던 이들도 대부분 포기하고, 자연스레 혼자가 되었다.

다른 누군가랑 대화하는 걸 본 게 손에 꼽을 정도.

다른 학생들을 배척하는 느낌마저 들 때도 있었다.

오히려 그 모습이 고고하다고, 신비롭다고 학생들은 떠받들어주는 모양이지만…….

[아무하고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니. 원래 성격이 그런 걸까요?]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무언가에 엄청 집중해서 다른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 조금 슬프네요.]

레아는 여느 때와 같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안 역시 수련장을 거의 매일같이 오기에 잘 안다.

밥 먹거나 수업을 듣는 시간 외에는 레아가 온종일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걸.

학생들은 그 모습을 보며 귀족의 귀감이라고. 정말 대단하다고 호들갑을 떨어대곤 했다.

‘글쎄…….’

이안 역시 그런 식으로 수련에 온 힘을 쏟곤 한다.

하지만 그런 가혹한 스케쥴을 견딜 수 있는 건 이안이 그만큼 절박해서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확률을 조금이라도 올리려는 발버둥.

어쩐지 레아에게서 그런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뭐. 사람 속내는 모르는 거니까요.’

어쨌든. 지금은 혹시 어떻게 레아랑 친분을 만들 수 없을까 고민하러 온 거다.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긴 플로라와 다르게, 레아랑은 대련한 그날 이후로 대화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얘랑 좀 친해지면 그 자체로 저를 쉽게 못 건드리겠죠.’

황녀의 이름은 가볍지 않다.

만약 이안이 황녀 쪽 인물이라는 소문이 돌면, 루크도 함부로 행동하기 힘들어질 터다.

겨우 평민 하나 담그려고 하다 자칫 황녀와 트러블이 생기면 본전도 못 챙기는 꼴이니까.

‘문제는 어떻게 말을 걸어볼까인데…….’

그 루크도 번번이 말을 걸다 까일 정도로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다.

어중간하게 접근해서는 무시당해 버릴 터.

이것저것 고민하던 이안은 레아가 연습하는 모양새를 유심히 지켜봤다.

붕. 붕.

연습용 목검이 공기를 찢었다.

깔끔한 동작.

궤적은 간결하고 효율적이다.

웬만한 이들이 봤다면 그저 감탄만을 흘렸을 모습.

하지만 이네스의 재능을 전수받고, 레아와도 한번 검을 섞었던 이안은 느낄 수 있었다.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황가의 검술은 곧 이네스의 검술의 열화판.

이네스의 재능이 너무 뛰어나, 그 후대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개량된 부분이 여럿 있었다.

그리고 개량된 부분은 곧 흠이 되었다.

당연히 레아의 움직임에서도 그런 흠을 엿볼 수 있었고, 그 흠이 부족함으로 이어졌다.

그걸 다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로 레아의 신체 능력이 뛰어났지만.

‘그때 보였던 문제점들이 지금도 그대로 보이네요.’

[원래 실력이라는 건 그렇게 휙휙 느는 게 아니에요. 이안이 굉장히 특별한 환경에 있는 것뿐이죠. 게다가…… 황가에서 내려오는 검술이에요. 검술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보다는, 본인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겠죠.]

당연한 일이다.

그 누가 황가의 검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검술 자체의 결함이 레아의 실력 향상을 막고 있었다.

동작과 동작 사이의 매끄럽지 않은 부분.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려 레아는 헤매고 있었다.

이안이 보기에는 1주일의 정체였지만, 실은 레아가 훨씬 전부터 가지고 있던 고민이었다.

‘음…… 여기서 제가 조언을 건네주면 괜찮으려나요.’

[글쎄요. 사람에 따라서는 무례하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심지어 황가의 검술이니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이안은 뺨을 긁적였다.

확실히.

평민 나부랭이가 갑자기 검술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하면 듣는 이는 얼마나 황당할까.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레아가 빠르게 성장할수록 곧 이안의 생존 확률은 높아질 테니 말이다.

그래서 말했다.

“그 부분에서는 허리를 좀 더 트는 게 어떨까요. 발을 디딜 때 좀 더 앞쪽으로 딛고. 대신 균형을 살짝 아래에서 잡고요.”

“…….

레아가 이안을 흘끗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다시 이안을 쳐다봤다.

“……설마 저한테 한 말인가요?”

“예.”

“허리를 더 틀라고요?”

“어, 그 부분에서 막혀 있는 것 같아서요. 뭔가 완벽함을 추구하시는 것 같은데, 애초에 검술 쪽에…….”

레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순간 이안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기본적으로 다른 학생들한테 무관심한 레아가 이렇게 화난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봤다.

“주제넘네요.”

그게 첫마디였다.

“당신이 재능있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뿐이에요.”

“…….

“과거에 위대한 영웅들이 검으로 악마를 무찌른 그 순간부터. 이 검술은 황가의. 그리고 인류의 자존심이자 자부심입니다. 그걸 지적하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모르는 건가요? 아니면 당신이 한 시대를 호령하던 그 천재들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할 셈인가요?”

이안은 말을 잃었다.

레아는 자기 자신이 모욕당한 것처럼 분노했다.

기본적으로 웬만한 일에는 능구렁이처럼 넘어가는 이안도 당황할 정도.

레아가 차갑게 뱉었다.

“자신의 재능에 취하든 말든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분수를 알았으면 좋겠네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휙 돌린 레아는 수련장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원래 밤늦게까지 수련하던 걸 생각하면, 어지간히도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거 야단났네요…….’

[그러게요. 생각보다 반응이 더 격하네요.]

친분도 다지고, 루크의 견제도 피할 겸 말을 걸었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나 버렸다.

황녀가 떠나고 비어 버린 수련장.

학생들의 따가운 시선이 이안의 등에 내리꽂혔다.

***

사람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각자의 사명을 부여받는다.

노예의 자식도. 농사꾼의 아들도. 상인의 딸도. 귀족의 사생아도.

그리고 황제의 여식도.

각자가 일생 동안 지고 가야 할 사명이 있다.

단지, 대부분은 그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레아는 다르다. 레아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잘 안다.

아주 어렸을 때.

이제 갓 세상을 알아가던 그 시기에. 레아의 하나뿐인 형제는 그녀가 무엇을 짊어져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어린아이가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무게였다.

하지만 레아는 안다.

그녀가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이들에 비해 너무나 많은 걸 받았기에, 그만큼 더 짊어져야 한다는 걸.

그게 의무라는 거니까.

“…….

조용히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던 레아가 눈을 떴다.

문득. 검은 머리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니었을지도 몰라.’

레아는 오랜 시간 헤매고 있었다.

벽에 가로막혀, 한참을 방황하고 있었다.

승승장구하다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는 검사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흔하다.

레아는 그들 중 하나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 벽을 넘어보기 위해 언제나 몸을 혹사시켰고.

혹시라도 실마리를 얻을까 싶어 대륙의 뛰어난 재능들이 모이는 이곳 코르디스에 왔다.

하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학생들과 대련을 해봐도 그저 그런 수준. 그중에 그래도 기억에 남는 건…….

다시 이안이 떠올랐다.

이안은 검술 그 자체를 지적했다.

레아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만, 애써 외면해오던 그런 진실을.

‘정말로 검술의 문제라면…….’

수백 년 전. 위대한 영웅이자 자신의 선조가 사용하던 검술.

인류의 자존심이자 황가의 자부심이자. 그리고 레아의 전부.

하지만 그 검술이 온전하게 전해 내려왔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소수에게만 비밀리에 내려오는 기술이라는 건 으레 훼손되기 마련이니.

검은 그녀의 전부였다.

결코, 의심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은 의심해야 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외면해왔던 부분.’

이안의 검술은 놀랄 정도로 황가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레아도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알 수 없어 의아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묘한 기대가 생겼다.

‘허리를 더 틀고. 왼발을 딛는 부분은 좀 더 앞으로. 균형은 아래로…….라고 했지.’

어디까지나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레아는 검을 쥐었다.

검을 휘둘렀고.

눈을 부릅떴다.

”.......!“

긴 시간 동안 그녀를 괴롭히던 벽이 너무나 맥없이 허물어졌다.

단지 생각과 관점을 조금 바꾸고, 조언 몇 마디를 들은 것뿐이다.

‘지나고 나면 이렇게 별거 아닌데.’

기쁨과 허탈함.

레아는 혼자 앉아 공허한 웃음을 흘렸다.

해답을 얻지 못했을 때는 그토록 괴롭고, 고통스러웠거늘.

깨달음이란 이렇게 덧없는 것인가.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사과하지.’

답을 찾지 못한 레아는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

그 이후로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껄끄러운 일이 있었지만, 그 이후로 이안에게 레아가 더 문제 삼는 일은 없었다.

가끔 미묘한 눈으로 이안을 쳐다보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일상이 지나간다.

학생들도 어느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점점 편한 얼굴로 다니곤 했다.

이안도 수업을 들으며 성장에 집중했다. 하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승마나 예절 같은 건 얼추 알겠는데, 정령술이나 마법은 감도 안 잡히네요.’

[저도 마법은 잘…….]

게임에서는 수업만 들어도 ‘초급 정령술’ 이나 ‘기초 화염 마법’ 따위는 쉽게 습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어찌 된 게 아무런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아직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너무 조급한 거 아닌가요? 검술 실력은 순조롭게 늘고 있잖아요. 얼마 뒤에 성검의 조각을 하나 더 모으면, 충분히 빠른 성장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죠.’

원래는 이 학사 곳곳에 숨겨진 히든 피스 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은 그것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당연히 얻을 수 있을 거라 여기던 하급 정령술과 마법을 얻지 못했다.

게다가 평화로운 일상에 적응하니, 점점 마음속의 치열함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굶주리던 그때를 잊으면 안 돼. 헝그리 정신. 헝그리 정신.’

늘 명심해야 했다.

이안은 노예처럼 살며 수개월의 시간을 날렸다는 걸.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더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을.

‘설령 루크의 견제를 받더라도 더 활발히 활동해야겠어요.’

결정을 내리고 당장 움직이려던 그때. 한 학생이 다급한 얼굴로 교실에 뛰어들어왔다.

“화, 황태자 전하께서 코르디스에 참관하러 오신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안

불길한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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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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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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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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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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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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