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42화 (43/222)

42. 황태자 강림

다음날부터 이안은 정령에 관한 서적을 찾기 시작했다.

악마에 관한 책과는 달리, 정령학 서적은 따로 분류가 되어 있을 만큼 그 양이 방대했다.

“야! 딴짓하지 말고 너도 좀 도와!”

그렉이 볼멘소리를 했지만, 깔끔히 무시한 이안은 서적을 훑었다.

막막하게만 느껴졌던 예전과 달리. 그래도 지금은 한 걸음씩 더 나아간다는 기분이 들었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라이젤의 번번한 방해에도 부탁받았던 도서관 구역은 깔끔하게 정리를 끝마쳤다.

의뢰가 끝이 나고, 마틴은 예정보다 더 많은 돈이 든 주머니를 내밀며 말했다.

“사서님이 성실하게 일을 끝마쳐줘서 너무 고맙다고. 마음을 더 쓰셨어.”

“흐흐. 고맙게 받을게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돈주머니를 챙긴 이안에게 마틴이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사서님이 계속 도와줄 수 없냐고 물어보시더라고. 혹시 생각 있어?”

이안은 잠시 고민하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죠.”

어차피 정령에 대한 정보를 계속 찾아야 하니,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 뒤로도 이안은 정령학 서적을 뒤지며, 서적들을 정리해나갔다.

의리를 지키는 건지. 아니면 도서관이 생각보다 마음에 든 건지.

그렉과 마리도 계속해서 이안을 도왔다.

옆에서 감시하던 라이젤은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게 좀이 쑤시는지. 죽을상을 지었지만.

그렇게 주머니도 점점 두둑해져 가고. 악마에 대한 실마리도 점점 가까워져 가고.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길 몇주. 드디어 황태자의 방문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흠흠. 어때. 이 정도면 예쁜 거 같아?”

“음…… 너무 과한 거 아니야? 그리고 꿈 깨라. 좀.”

“모르지. 황태자님이 나 같은 사람이 취향일 수도 있잖아.”

여자를 밝힌다는 황태자의 소문에 여학생들은 장밋빛 꿈을 꾸며 한껏 치장했고.

남학생들도 혹시나 있을 스카우트 제의를 위해 옷을 차려입거나, 괜히 어깨에 힘을 주고 걷곤 했다.

전체적으로 학사의 분위기가 붕 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딱 사고 나기 좋은 환경이네요…….’

[학사의 모든 행정력이 이번 황태자의 방문에 쏠려 있으니. 오히려 뒤에서 일을 벌이기에는 절호의 조건이긴 하죠.]

‘뭐. 그래도 황태자가 방문해 있는 동안은 큰일은 없을 거예요.’

괴물 중의 괴물인 황태자.

그리고 그 호위가 따라붙은 상황에서 무언가 사건을 일으킬 멍청이는 없을 것이다.

‘저였다면 이런 시기에 최대한 준비를 끝마치고. 황태자가 돌아가서 느슨해진 그때를…….’

이안은 말을 끊었다. 복도의 저편에서 루크가 걸어오고 있었다.

적당히 화려하면서도 결코 과하지 않은 복장을 한 루크는 이안조차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모습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저도 모르게 루크에게 길을 비켜주었다.

딱히 루크가 부탁한 건 아니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여유롭게 걷던 루크는 이안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이안은 떨떠름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쳐다봤다.

‘뭔가 이상하네요.’

[뭐가 말이죠?]

‘엄청 여유롭잖아요. 당당하고. 하나도 긴장한 느낌이 안 들어요.’

이안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 플로라랑 싸워야 한다면, 저였다면 벌써 덜덜 떨고 있었을걸요? 그렇다고 플로라의 실력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표정을 감추는 데에 능숙한 사람이니까요. 여유를 가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른 학생들도 이안과 비슷한 걸 느꼈는지. 저마다 감탄을 내뱉었다.

“와. 대단하다. 루크 님은 떨리지도 않나 봐.”

“귀족의 귀감과도 같은 분이시니, 이런 거로는 긴장도 안 하는 거지.”

“이번에 루크 님이 꼭 이겼으면 좋겠다.”

여론은 루크의 편이었다.

그동안 루크가 꾸준히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온 것과 대비되게. 플로라는 사실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내가 봐도 플로라는 좀 재수 없긴 하니까요.’

플로라는 학창 시절에 한 명쯤 있던, 집 잘살고 공부 잘하던 모범생과 같다고 해야 할까.

항상 가문을 자랑하거나 잘난척하듯 으스대는 플로라를 별로 안 좋게 생각하는 학생들은 많았다.

게다가 그 재능만큼은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으니. 질투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당연지사.

저절로 루크는 선역. 플로라는 악역이 되어 루크가 악역을 박살 내주길 바라는 사람이 늘었다.

‘뭐. 그래도 플로라가 질 일은 없지만요.’

객관적으로 봐도 둘의 전력 차이는 뒤집을 수 없다.

그렇다면 루크는 왜 그렇게 여유로울까?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루크라면 충분히 수작을 부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로라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탄다거나, 말도 안 되는 아티팩트를 준비한다거나.

‘그래도 승패를 뒤집기는 힘들 것 같긴 한데…….’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그런 방법으로 루크가 이길 수 있었다면, 게임에서 플로라가 언제나 토너먼트 우승을 거머쥘 수도 없었을 거다.

그보다 더 걱정인 건 바로 황태자다.

황태자가 이 시기에 코르디스에 방문하는 목적이 뭘까. 그리고 황태자의 방문은 대체 어떤 결과를 낳을까.

일단 이안은 황태자랑 엮이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할 생각이었다.

‘그런 높으신 분이 검은 머리 나부랭이랑 엮일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렇게 애써 위안해봐도 느껴지는 이 불안감은 대체 뭘까.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다던데 이번에도 그럴까.

이안은 잡생각을 억지로 지워내며, 복도를 거닐었다.

***

“어서 와요.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죠?”

“요즘엔 많이 바빴으니까요.”

여느 때와 같이, 이네스가 화사한 미소로 이안을 맞이했다.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미소.

이네스가 침대 아래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찻주전자를 꺼내 물을 끓였다. 은은한 차 향이 좁은 방안을 메웠다.

“……차는 어디서 난 거예요?”

“얼마 전에 마틴과 같이 차를 마셨잖아요? 그 기억을 참고해서 만들어냈죠.”

“그런 것도 가능하세요?”

“해보니까 되더라고요.”

이네스가 뿌듯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미묘한 표정을 한 이안은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방이 좀 달라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인지는 모르지만, 이안의 자취방은 그 크기가 더 커져 있었다.

알 수 없는 식물이 심긴 화분이 놓여 있었고. 창문에는 이네스의 취향으로 보이는 순백의 커튼이 새로 처져 있었다.

내 집이지만 집이 아닌듯한 기묘한 느낌.

이네스의 능력은 과연 어디까지 닿아 있는 건지, 조금은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것저것 할 수 있게 되면서 심심함이 많이 줄었어요. 이안이 자고 있을 동안은 정말 지루했거든요. 차라는 것도 생각보다 끓이는 재미가 있었고요.”

“……그거 다행이네요.”

이안은 이네스가 건네준 차를 홀짝였다. 솔직히. 별로 맛있지는 않았다.

의외로 손재주는 없는 듯했다.

이안의 표정을 본 이네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혹시 맛없나요?”

“아뇨. 맛있습니다. 진짜로요.”

“다행이네요.”

차마 바른대로 말할 수 없어 거짓말을 한 이안을 보며 이네스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찻잔을 비우자 이네스가 물었다.

“그럼 바로 시작해볼까요?”

“예.”

둘은 동시에 일어나 검을 쥐었다.

이네스가 말했다.

“이번에 제가 선보일 건 동부 대초원의 전사들에게서 본 검술이에요. 잘 보고 검술의 장점이나 파훼법, 보완할 점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옙.”

근래의 수련 방법은 이러했다.

이네스가 여러 검술 중 하나를 선보이면, 이안이 그 검에 대해 꼼꼼히 분석한다.

한 번 본 검술은 절대 잊지 않는 이네스이기에 가능한 교육 방식이었는데.

이안이 직접 정답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절대 답을 알려주지 않는 게, 이네스의 엄격함을 잘 보여주었다.

덕분에 이안은 어떤 검술에 대해서는 파훼법을 알아내기 위해 몇 주 동안 끙끙 앓기도 했다.

이네스의 재능을 물려받은 덕분인지. 아니면 이안이 원래 재능이 있는 건지.

시간이 걸려도 결국에는 답을 찾아냈지만.

“갈게요.”

이네스가 독특한 스텝을 밟으며 빠르게 다가왔다.

현란하게 발을 디뎌 공격 타이밍이나 방향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었는데, 이안은 어쩔 수 없이 수비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캉. 카캉.

대초원의 전사들이 휘두르는 검에는 특유의 경쾌함과 시원시원함이 있었다.

두려움을 느끼는 걸 죽음보다 치욕스럽게 여기기에, 수비 없이 오로지 공격 일변도로 싸우는 사나움.

그렇다고 검술이 무식한가? 아니. 오히려 영리하다.

순식간에 펼쳐지는 동작 3개 중 두 개는 눈을 현혹하는 함정이다.

게다가 그 함정이 어찌나 절묘한지, 미끼를 물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끄악!”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이안은 도리어 가슴이 칼에 꿰이고 말았다.

생생한 고통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이네스는 검을 뽑아내며 차분히 말했다.

“수많은 재능있는 검사들이 경험 부족으로 허무하게 목숨을 잃곤 하죠. 실력 있는 전사라면 다들 한 가지씩 비장의 한 수가 있고. 대개 그 한 수는 직접 당해보기 전에는 대처하기 힘들거든요. 좋은 경험은 전사에게 여벌의 목숨이다, 라는 말도 있잖아요?”

‘모르면 죽어야지’라는 말은 현실에서도 통용되었다.

그렇기에 이안은 운이 좋다.

이렇게 죽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검사로서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딱히 기분이 좋거나 감사하거나 그렇지는 않았다.

더럽게 아팠으니까.

이를 악물고 일어선 이안이 다시 검을 들었다.

“한번 찔려봤으니, 다음에는 안 당할 거예요.”

“글쎄요…… 어쨌든 분발해보세요.”

조금 섬뜩하게 웃은 이네스가 다시 경쾌하게 달려들었다.

***

상인들과 어부들로 언제나 북적거리는 페어윈드의 중앙거리. 그런 중앙거리는 오늘따라 유독 더 사람들로 붐볐다.

“모두 비켜라!”

“전하께서 행차하신다!”

광택이 나는 푸른색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한 강철 기사단원들이 크게 호통치자, 인파가 대로의 양옆으로 갈라졌다.

따가닥. 따가닥.

기사들이 뚫어놓은 길로, 네 마리의 흰 군마가 이끄는 전차 한 대가 지나갔다.

그 전차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건, 제국의 계승자이자 대륙의 지배자.

유일하게 선대 황제에게 제국의 국명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걸 허락받은 자.

그리고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는 황태자.

레온 그레이스 클로딘.

백마에, 전차. 그 위에 화려한 복장을 한 올라탄 황태자라니.

몇몇 귀족은 이 같은 모습을 보며 황태자의 취향이 촌스럽다고 비웃곤 했다. 졸부나 할 법한 태도라고…….

하지만 지켜보는 시민들이 느끼는 감상은 다르다.

특별한 혈통의 군마와 화려한 전차는 신화 속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게다가 오후의 햇살을 받아 황금색 금발이 두드러지는 황태자의 외모는 찬란함 그 자체였다.

“세상에…….”

“신이시여…….”

바닥에 엎드려 그 모습을 곁눈질한 시민들은 숨을 삼키거나. 몇몇은 눈물을 흘렸다.

시성된 옛 영웅들의 혈통을 이은 황태자는 반인반신의 취급을 받는다.

그런 황태자를 직접 눈앞에서 목도하다니.

그들에게는 오늘의 일이 하나의 강렬한 종교적 체험이자,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터.

그렇기에 황태자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특히 신경 쓰곤 했다.

인기라는 건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게 아니기에.

황태자는 그대로 미리 준비된 배에 올라탔고. 기사단원들과 기타 시종들이 그 뒤를 따랐다.

곧장 갑판의 최선두로 향한 황태자는 저 멀리 보이는 코르디스를 보며 감탄했다.

“정말 천혜의 요새가 따로 없구나. 괜히 악마의 군세를 막아낸 게 아니야.”

그런 황태자의 뒤에 새하얀 로브를 입은 나이 많은 마법사와 검은 로브를 걸친 젊은 마법사가 뒤에 섰다.

꽤 기묘한 대비를 이루는 그림이었는데, 황태자는 친근한 태도로 둘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군사를 일으킨다면 얼마 만에 함락시킬 수 있을 것 같소.”

그런 황태자의 대답에 두 마법사는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씀은 하면 안 됩니다 전하.”

화들짝 놀라며 말하는 흰색 로브의 마법사.

“굳이 군대까지 필요하겠습니까? 빠르고 강한 배 한 척이면 전하 혼자서도 능히 저 섬을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 진데.”

사납게 웃으며 말하는 검은 로브의 마법사.

그런 둘의 반응에 황태자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하. 어디까지나 가정이었소. 대륙의 심장을 굳이 내 손으로 부술 이유는 없지.”

흰 로브의 마법사는 떨떠름하게 웃었다. 그의 주군이 하는 농담은 가끔 진심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게 진짜 무서운 점이었지만.

“오랜만에 동생 얼굴도 보고. 즐거운 시간이 되겠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황태자는 섬을 바라보았다.

근래에 한가지 흥미로운 소문이 그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한 기묘한 입학생에 대한 소문이었는데, 으레 소문이 그렇듯.

단순히 이리저리 부풀려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황태자는 왜인지 그 소문 속의 인물이 진짜배기가 아닐까 하고.

반쯤은 확신에 가깝게 기대하고 있었다.

***

“그, 그, 그, 그럼. 지, 지 그으으음부터. 수, 수, 수, 엡. 아니.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예.”

푸른 머리의 중년 교수. 페이 험멜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말을 더듬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녀가 지금 이렇게 떨고 있는 건 교실의 뒤편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는 사내 때문이었다.

‘설마 여기로 참관하러 오다니.’

점심이 갓 지났을 시각. 섬에 도착한 황태자를 학생들과 교수들은 성대하게 맞이했다.

코르디스의 교장, 피에트로는 예정된 계획에 따라 우선 황태자를 데리고 섬 이곳저곳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섬은 넓고, 코르디스에는 자랑할 것이 많았다.

그다음에는 4학년 어퍼 클래스의 수업을 함께 참관할 계획이었다.

당연하게도. 선정된 교수와 학생들은 약 두 주 동안 리허설을 하며, 어떤 질문을 던질지와 누가 답할지까지 세밀하게 설계를 마쳐두었다.

마지막으로 교수들과 학생들의 연구 성과를 보여주면서 첫날을 마무리.

꽤나 완벽한 계획이라고 확신했지만…….

“피에트로 교장. 우선 학생들이 수업 듣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소.”

섬에 발을 디딘 황태자는. 피에트로가 계획 설명을 하기도 전에 그리 말했다.

“아, 알겠습니다 전하. 그러면 4학년 수업을…….”

“내 동생이 있는 반이 좋겠소.”

“예?”

피에트로는 저도 모르게 얼빠진 대답을 하고 말았다.

식은땀 한 줄기가 그의 이마를 타고 흘렀다.

그런 피에트로에게 황태자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안 되오?”

피에트로는 눈을 질끔 감았다. 그리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될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피에트로는 억지로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1학년 교수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당연히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교수들은 난리가 났다.

중요한 건 누가 첫 번째로 수업하냐였다.

결국. 교수들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그 사람의 평소 신앙심까지 엿볼 수 있는 방법.

제비뽑기로 순서를 정했고, 안타깝게도 페이 험멜 교수가 첫 번째라는 영광을 거머쥐게 되었다.

이안은 혼자서 벌벌 떨고 있는 험멜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불쌍하네요. 더럽게 운도 없지.’

황태자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학생들에게 잘 좀 부탁한다고.

특히 이안에게 제발 졸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했다.

오늘만큼은 조금 졸려도 참아주기로 생각하며. 이안은 험멜이 하는 수업에 집중했다.

“무, 물이 열을 받게 되어. 기화하면 주변 온도는 내려가게 되는데. 이 같은 점을 마법에 응용하면…….”

처음에는 조금 헤매던 험멜이지만, 노련한 교수답게 이내 평소처럼 수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수업은 큰 이변 없이 이어가는 듯했지만…….

“하암.”

황태자의 하품 한 번에 교실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눈이 땡그래진 험멜에게 황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아. 미안하오. 계속하시오.”

그 말을 듣고 어찌 그대로 진행할 수 있을까.

다시 한번 위기감을 느낀 험멜이 황급히 교재를 집어넣었다.

“따, 따분한 이론은 여기까지 하고. 바로 실습부터 할까요?”

험멜은 이리저리 기묘한 모양으로 구부러진 유리관을 꺼낸 뒤. 그 안에 물을 넣어 빠른 속도로 순환시켰다.

그 속도에는 학생들도 감탄할 정도.

“물 마법을 다루려면 ‘흐른다’는 물의 특징을 잘 이해해야 해요. 제가 물을 빠르게 순환시켜 볼 건데요. 이렇게 흐르는 물에 검은색 물감을 넣으면…….”

내심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 보일 수 있어 한시름 놓은 표정을 짓던 험멜에게 돌연. 황태자가 말했다.

“그것보다, 교수. 나는 학생들이 지난 시간 동안 이 수업에서 얼마만큼 얻어갔는지가 궁금하오. 아무리 가르치는 자의 역량이 뛰어나도, 배우는 학생들이 얻어가는 게 없다면 의미 없지 않겠소?”

갑작스럽게 선언한 황태자는 앞으로 걸어가 험멜에게 교재를 받았다.

대충 교재의 앞부분을 펼친 황태자가 한 학생에게 손가락을 가리켰다.

“질문을 하나 하겠다. 틀려도 상관없으니 부담 갖지 말거라.”

“여, 영광입니다. 전하.”

“물은 빛을 굴절하는 특성이 있는데, 이 각도는 조건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데…….”

듣는 이안은 멍하게 황태자가 하는 모양새를 바라봤다.

황태자가 낸 질문은 꽤 절묘했다. 문제 자체는 지금껏 배운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히 암기로는 풀 수 없고, 직접 생각하고 고민해야 답을 얻을 수 있는 종류의 문제였다.

[즉석에서 저런 문제를 만들어내다니. 머리가 나쁜 인물은 아니네요.]

문제는 질문을 받은 학생은 기사 가문 출신의. 마법에는 딱히 관심 없는 학생이라는 점이었다.

“아, 그. 그러니까…….”

학생은 횡설수설하며 가까스로 답을 내놓았지만. 누가 들어도 궁핍한 답이었다.

결국. 학생은 안타까운 얼굴로 자리에 앉았고, 험멜은 아예 울상을 지었다.

“괜찮다. 잘 모를 수도 있지. 그럼 다음.”

그 뒤로도 황태자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주로 마법이나 정령사가 아닌 학생들을 골랐는데. 대부분은 답을 하지 못 했다.

멋들어지게 답을 한 건 그나마 루크 정도.

자기가 답하고 싶어 끙끙 앓는 플로라를 제외하고는 학생들은 황태자와 직접 대화하는 명예를 마다하고, 눈을 내리깔기 바빴다.

하지만 황태자의 질문은 집요하게 이어졌고.

레아까지 질문을 끝내자. 마침내 이안의 순서가 왔다.

“흠.”

황태자는 이안을 보며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동물원의 흥미로운 생물을 보는 듯한 표정.

황태자는 한참 동안 말없이 이안을 쳐다봤다. 마치 마음속을 엿보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묘한 압박감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교재로 시선을 내린 황태자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자. 지금까지 나는 아홉 명의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소. 별로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고 생각하오. 제대로 배웠다면 누구나 답할 수 있는 문제였지. 그렇지 않소. 교수.”

“그, 그렇습니다.”

험멜은 고개를 푹 숙이며 힘겹게 대답했다. 마치 형벌 집행을 기다리는 죄인 같은 모습이었다.

황태자는 짐짓 실망스럽다는 듯. 교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아홉 명 중 고작 한 명 만이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았소. 학생이 문제였나? 아니. 이곳은 대륙 제일의 인재들이 모이는 코르디스요. 학생의 수준은 이유가 될 수 없을 것 같소. 그렇다면 역시 교육자의 문제겠지. 내 말이 틀렸소? 피에트로 교수.”

황태자의 눈빛을 받은 피에트로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옳으신 말이옵니다. 전하.”

“교수와 교장의 동의를 얻었으니 마지막으로 학생에게 물어야겠군. 학생.”

“……예.”

“이 무능한 자가 명예로운 코르디스의 교수 자리에 계속해서 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하나라도 있느냐? 대답해보거라.”

질문의 화살이 이안을 향해 쏘아졌다.

페이 험멜 교수가 해고당할지. 아니면 교육자로서 학사에 남아 있을지.

그 잔인한 선택지가 이안에게 들이밀어 졌다.

‘씁. 개 같은 질문이네.’

이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주위의 시선이 모두 이안에게 쏠려 있었다.

다들 당황한 눈치였다.

이안은 그 시선에서 안타까움과 체념을 엿보았다.

그들도 갑작스럽게 교수가 바뀌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 콧대 높은 놈들이 체념이라니.’

좋은 가문 출신이라는 긍지. 코르디스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어퍼클래스라는 자부심.

그런 것들은 더 큰 권위 앞에서는 한낱 먼지가 되어 버리는 것일까.

조금은 우습게 느껴졌다.

이안은 우선 페이 험멜을 쳐다봤다.

이미 눈물을 글썽거리는 험멜은 그 짧은 새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초췌해 보였다.

‘딱히 수업은 열심히 들은 적은 없지만…….’

페이 험멜의 수업은 지루하다.

험멜이 직접 마법 시범을 보여주지 않는 한, 이안은 매번 졸곤 했다.

하지만 험멜이 훌륭한 교육자라는 건 알았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했을 노력과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적어도 이렇게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해고당할 사람은 아니다.

그게 설령 말 한마디로 제국을 뒤흔드는 황태자라도. 지켜야 할 도리와 예의는 있는 법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좀 꼽네.’

이안은 황태자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인기 있는 황제. 기본적으로 유능하지만 자주 돌발행동을 하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 대륙의 최강자답게 싸움 자체를 즐기는 설정도 있었던가.’

게임에 너무나 큰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기에. 기본적으로 스토리에 관심 없는 이안도 제법 많은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여자를 밝힌다는 설정도 있었지. 여자 때문에 나중에 전쟁을 일으키던가? 생각해보니 완전 미친놈이네.’

그리고 스토리 후반부. 악마와 내통하는 게 들킨 황태자는 모든 명예와 시민들의 지지를 잃고.

플레이어와 레아가 주축인 연합군에게 타도 당한다는 게 게임의 후반부 스토리다.

이안은 떠올린 기억들을 토대로 머릿속에 답을 그려나갔다.

‘싸울 때는 1대1 전투를 선호하고, 용기 있고 명예롭게 싸운 기사를 살려 보낸 적도 많아. 호탕한 면도 있고, 의외로 뒤끝이 없다. 그렇다면…….’

고민하던 이안이 답을 내렸다.

이안은 황태자의 푸른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유라면 있습니다.”

주위 학생들이 경악했다.

설마 이안이 여기서 답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오직 황태자만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유가 있다고? 말해 보거라.”

“험멜 교수님에게 제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목숨?”

황태자가 흘끗 쳐다보다 이안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어서 더 설명해보라는 눈빛이었다.

“언젠가 험멜 교수님이 물로 만들어진 창을 보여줬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물의 창이 저를 향했을 때.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이안은 눈을 감으며 차분히 설명했다.

“처음에는 검으로 물의 창을 갈랐습니다. 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드럽게 검을 통과해 제 목을 꿰뚫었습니다. 그다음으로 생각한 건 방패입니다. 방패로 후려쳐 창을 분쇄하는 것이죠. 하지만 여러 갈래로 나뉜 물방울들은 이내 다시 뭉쳐, 제 빈틈을 찔렀습니다. 그다음에는 갑옷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물은 어떤 형태로든 변할 수 있더군요. 갑옷의 좁은 틈을 통과해 들어온 얇은 창이 저를 꿰뚫었습니다. 그다음에 생각한 수는…….”

이안은 하나하나 상황들을 가정했다.

아까 황태자에게 한 말처럼, 원래부터 고민하던 것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즉석에서도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레 머리에 떠올랐다.

요근래 한 이네스와의 수련이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만약. 제가 험멜 교수님의 마법을 보지 못하고, 물을 다루는 마법사나 괴수를 적으로 만났다면. 저는 꼼짝없이 목숨을 잃었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겠죠.”

흥미로운 얼굴로 이야기를 듣던 황태자가 물었다.

“그래서. 문제에 대한 답은 찾아냈느냐?”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 답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남은 학기 동안 수업을 듣다 보면, 답을 찾을 수도 있겠죠.”

“과연. 그렇기에 교수에게 목숨이 달려 있다고 한 거로구나?”

“저뿐만 아니라 이곳에 있는 다른 학생들의 목숨도 달려 있겠죠.”

말을 마친 이안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멍청한 짓을 한 건가. 이놈의 반골 기질’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냥 넘어가는 게 좋았다.

황태자랑은 최대한 엮이고 싶지 않았고…….

하지만.

조금은 욱한 마음에 나서고 말았다.

그리고 안쓰러운 험멜의 모습이 계속 눈에 밟혔다.

‘별로 옹호해줄 정도로 의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왠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이건 이네스에게 영향을 받은 부분일까.

이네스가 이안을 대견스럽게 보고 있는 건 확실했다.

그래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 정도로는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걸 증명하듯. 황태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은 경험은 전사에게 여벌의 목숨…….인가. 장차 제국을 이끌어갈 학생들의 목숨을 내 손으로 끊어낼 수는 없지.”

황태자는 험멜에게 말했다.

“교수.”

“예, 옙!”

“교수는 당분간은 지금의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되었소. 하지만 착각하지는 마시오. 그건 교수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한 학생의 용기 있고 슬기로운 답변 덕이었으니.”

“가, 감사합니다. 전하.”

“오늘 같은 일이 없으려면 더욱 발전해야 할 것이요. 자. 다음으로 안내해주시오.”

“예, 예!”

험멜은 황송하게 고개를 조아렸고. 멍하니 있던 피에트로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피에트로의 안내를 받으며 문을 나서기 전. 황태자는 이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였으면 마법사를 죽였을 것이다. 어디에 숨었든. 얼마나 멀리 떨어졌든. 반드시 찾아서 원흉을 칼로 찔렀을 거다. 대개는 그편이 가장 깔끔하고 간편하더구나.”

조금 섬뜩한 말을 남긴 황태자는 그렇게 떠났다.

분위기를 수습할 험멜 교수마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렇게 내려앉는 침묵 속에서 학생들의 기묘한 시선들만이 이안에게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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