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미련
묘한 시선들이 날아왔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이 나댄다는 분노.
그토록 무시하던 사람의 의외의 면을 보게 됐다는 놀람.
황태자에게 직접 할 말 다 했다는 감탄.
험멜이 남아 있게 해줬다는 조금의 고마움.
그리고 그런 마음들을 인정하기 싫어서 생기는 짜증.
특히 레아가 느끼는 놀라움이 가장 컸는데. 정작 황태자의 하나뿐인 핏줄인 자신도 황태자가 종종 어렵게 느껴지곤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태자는 이곳에 온 뒤, 레아를 한번 쳐다봤을 뿐. 살가운 말 하나 건네거나 하지도 않았고.
‘오라버니께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평민들이 귀족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것처럼. 어지간한 귀족들도 황족에게는 기를 못 편다.
뒤에서 조금 욕을 할 뿐. 정작 앞에 서면 차마 거역할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마치 뱀 앞에 선 쥐처럼.
마음속 깊이 자신과 상대의 격의 차이를 알아 버리게 되는 거다.
그게 바로 수백. 수천 년 동안 쌓인 권위고, 이 세상에 얽힌 규칙이다.
하지만 이 검은 머리 사내. 심지어 평민인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황태자의 말을 받아냈다.
마치 이 권위와 규칙에서 동떨어진 사람인 것처럼.
‘무모한 건가? 아니면 두려움이 없는 건가.’
가슴 속 궁금함이 더 커졌다.
이안이 속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그 바닥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어쩌면 레아가 간절히 찾아 헤매던…….
“가, 감사를 표할게요. 이안 군.”
“아뇨. 할 말을 했을 뿐입니다.”
가까스로 마음을 수습한 험멜이 이안에게 다가와 감사를 표했다.
험멜은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이 사람이 황태자가 보낸 사람?’
교수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는 소문이 있었다.
황권을 강화하는 데에 혈안인 황태자가 이곳저곳에 손을 뻗치고 있고. 상징성이 큰 코르디스도 그중 하나라고.
그리고. 이안이 바로 그 황태자의 앞잡이로, 학사 운영을 감시하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된 인물이라고.
그리고 이번 황태자의 방문도 그런 맥락일 거라는 얘기가 많았다.
‘예측이 전부 사실이었어!’
황태자는 자신을 해고하려 했고, 이안은 그걸 막았다.
그 모습에서 험멜이 느끼는 감상은, 다른 학생들과는 명백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도 난 산 건가?’
험멜은 여전히 이안이 껄끄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무한한 감사를 느꼈다.
어쨌든.
황태자의 앞에서 직접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준 것 아닌가.
“흐. 흐흐.”
나는 살았다는 안도감에 절로 흘러나오는 웃음. 이안은 그런 험멜을 미친 인간 보듯이 바라보았다.
***
“어떠셨습니까? 전하.”
“음. 그럭저럭 괜찮았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고는 입가에 웃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검은색 로브의 마법사의 말에, 황태자는 더욱 진한 미소를 그렸다.
“티가 났나 보군. 솔직히 좋았소. 직접 보니 내 예상보다 더 재미난 친구더군.”
“잘된 일입니다.”
황태자가 말했다.
“역시. 굳이 시간 내서 직접 와보길 잘한 것 같군. 동생도 잘 있는 것 같고, 이렇게 반짝이는 원석들을 직접 볼 수 있으니 말이야.”
“전하. 아직, 이곳에서의 일정은 많이 남았습니다.”
흰 로브의 마법사가 그리 말하자, 황태자가 되물었다.
“내일은 시범 대련이 준비되었다 했나?”
“그렇습니다 전하. 학년별로 우수한 학생들이 대련을 선보일 것입니다.”
“그거 기대되는군.”
싱글거리던 황태자는, 돌연. 차가운 얼굴로 바꿔 흰 로브의 마법사에게 말했다.
“그대는 인원을 끌고 가 학사의 재정을 조사하시오. 혹시라도 중간에 착복된 정황이 보이거나, 의심스러운 자금 흐름이 있으면 다 파악해두고. 더불어 긴 시간 동안 그럴듯한 실적이 없거나, 교육자로서 자질이 떨어지는 교수들에 대해서도 명단을 작성하시오.”
“알겠습니다.”
흰색 로브의 마법사는 고개를 한번 숙인 뒤, 수행인 수십을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검은 로브 마법사는 히죽 웃었다.
“철두철미하십니다. 전하.”
“썩은 사과를 빨리 솎아내지 않으면, 바구니 안에 있는 모든 사과가 썩어 버리는 법이오.”
검은 로브 마법사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이런 부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마법사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전하. 이 섬에서 익숙한 냄새가 납니다.”
황태자가 우뚝 멈춰 섰다.
잠시 고민하더니 되물었다.
“……악마를 말하는 거요?”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흠.”
황태자는 멈춰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혼자서 경치를 즐기고 싶다는 말에, 멀리 떨어져서 걷던 피에트로가 불안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황태자는 잠시 생각했고.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건 차차 생각해보지.”
***
[정말. 그 용기! 저 이네스. 다시 한번 감탄했어요! 이안도 할 때는 하는군요!]
‘……이제 그만 해요. 낯 뜨거우니까.’
[교수님에게 제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크으…… 주위 학생들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는 걸 이안이 봤어야 하는 데!]
‘그만 하라니까요?’
수업이 끝나고. 이네스는 연신 호들갑을 떨어댔다.
마치 아들 자랑하는 엄마 같은 느낌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은 낯뜨거움과 어딘가 간질간질한 감정을 느꼈다.
‘에휴. 가끔 사람이 삘 받아서 안 하던 행동을 할 수도 있는 거죠.’
[작은 변화가 모이다 보면, 어느샌가 사람은 달라지는 법이에요.]
이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럴 때 무시하고 얘기라도 나눌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도서관에는 이안은 혼자뿐이었다.
‘하긴. 이런 날 누가 도서관에 오겠어.’
황태자의 방문으로 취소된 오후 수업.
게다가 이런저런 행사를 하는 모양이라, 오늘만큼은 도서관을 지키는 사서도.
함께 서적을 정리하던 마리와 그렉도.
심지어 눈엣가시였던 라이젤도 황태자를 구경하러 갔으니, 본의 아니게 이안은 이 넓은 도서관을 홀로 독점하게 되었다.
이안은 이네스가 조용해질 때까지 책을 훑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황태자를 말하는 건가요?]
‘네…….’
황태자는 이네스의 형제가 꾸린 가정의 먼 후손이다.
혹시라도 기분 상하게 할까, 이안의 태도는 조심스러웠다.
[글쎄요…….]
잠시 생각하던 이네스가 말했다.
‘잘 모르겠네요. 꽤 기묘한 사람인 것 같긴 한데…….’
이안 역시 황태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과연 이네스와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답게 찬란한 외모.
강자 특유의 단단한 분위기.
뭐가 그리 재밌는지 계속해서 짓던 짓궂은 미소까지.
동생인 레아와 비교하면 여러모로 닮으면서도 닮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마법사들은…….’
흰색 마법사는 공간 마법을 다루는 ‘대현자 오테르’.
그 뒤에 있는 검은 마법사는 ‘악마 숭배자 테이오스.’
둘 다 게임 후반부. 황태자를 상대하기 전에 마주치는 중간 보스급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이들이었고.
‘실제로 보니 보통이 아니구나.’
게임에서 중요 역할을 맡은 걸출한 인물들을 직접 마주치는 건 꽤 묘한 경험이었다.
특히. 화면 속에서는 체감할 수 없는 강자 특유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꼬장꼬장하면서도 현명해 보이는 오테르와 한눈에 봐도 호전적이고 사악해 보이는 테이오스를 보며 이안은 생각했다.
‘지금 덤비면 한방에 뒤지겠구나.’
이안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강대한 상대들이었다. 아직은 말이다.
‘어쨌든. 이제 도서관에 처박혀 있으면 더 마주칠 일도 없겠죠.’
황태자는 피에트로의 안내를 받으며 학사를 구경 다니고 있는 모양이다.
결국. 왜 뜬금없이 학사에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안과 황태자가 얼굴을 마주칠 일은 더 없는 거다.
‘내일 있을 시범 대련만 보면 돌아간다고 했던가?’
문득. 시범 대련에 대한 것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확실히. 보고 싶기는 한데 말이죠.’
이안이 요즘 느끼는 건.
직접 칼을 휘두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의 하는 모양새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도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
그런 면에서 보면 이네스는 최고의 스승이었지만. 그 수준이 너무 높기에 오히려 잘 이해가 안 되는 면도 있었다.
‘1학년뿐만 아니라, 2,3,4 학년도 나오니까요…….’
플로라만큼의 천재는 아니어도. 대륙에서 알아주는 인재들이 수년간 재능을 갈고닦고.
그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이들이 황태자에게 자기 실력을 뽐내는 것이다.
그들이 싸우는 걸 보며 얼마나 많은 걸 배우고, 느낄 수 있을까.
이네스 역시 이안의 생각에 동의했다.
[최대한 많은 싸움을 봐두면 좋겠죠. 저라고 대륙의 모든 무예를 아는 건 아니고. 기존의 무예들도 수백 년 동안 발전을 거듭했을 거니까요.]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결정을 내렸다.
‘그럼 보러 가죠. 뭐. 별일이야 있겠어요?’
시범 대련은 황태자도 참관하겠지만. 귀빈석에 앉을 황태자와 마주칠 확률은 지극히 낮다.
이미 한 번 대화까지 나눴는데, 이제 와서 피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루크 그놈이 플로라한테 얻어터지는 것도 보고 싶고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일반적인 환경에서 루크에게 승산이 없었다.
무언가 수작을 부리지 않으면, 플로라의 압도적인 화력에 샌드백 취급당할 미래밖에 보이지 않았다.
‘수를 쓰긴 할 텐데…….’
코르디스의 모든 학생과 교직원, 그리고 황태자까지 지켜보는 자리다.
수를 써도, 일정 선을 넘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어중간한 정도로는 플로라를 이길 수 없다. 절대로.
‘놈이 어떻게 나올지. 한번 구경이나 해보죠.’
***
다음날.
이안은 시범 대련을 구경하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미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리를 잡기 위해 모두 경기장으로 떠난 듯했는데.
덕분에 학사는 텅 비어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천천히 길을 걷던 이안은 저 멀리 걸어가는 익숙한 무리들이 보였는데.
마침 잘 됐다는 생각에 이안이 크게 소리쳤다.
“야!”
“……윽!”
뒤를 돌아본 빨간 머리. 플로라가 이안을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지금 제일 만나기 싫은 상대를 만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안은 플로라의 위아래를 훑었다. 평소보다 더 화려하고 장식 같은 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복장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자신보다 떨어진다고 해도 그렇지. 전투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군데군데 헝클어진 분위기.
이안이 장난스레 물었다.
“왜 참가자가 아직도 여기 있어. 설마 오늘이 기대돼서 늦잠 잤다거나?”
“…….
“……진짜냐.”
이안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플로라가 도리어 화를 냈다.
“너랑은 상관없잖아!”
“어쭈. 말하는 거 보소.”
이안은 더 뭐라 하려 했지만, 생각해보니 시범 대련까지 시간이 그리 넉넉지 않았다.
순서상으로 고학년들의 대련이 먼저지만, 그래도 플로라 나름대로 준비할 게 있을 것이다.
그래도 걱정하는 마음에 물었다.
“빈속이냐? 빵이라도 좀 먹을래?”
“안! 먹! 어!”
“그래. 응원할 테니까 열심히 해보라고.”
“…….
웬일로 이안이 고분고분 말하자, 잠시 말을 잃은 플로라가 고개를 훽 돌렸다.
“네가 응원하든 안 하든. 어차피 내가 이길 거거든? 난 플로라 피에람이니까.”
그렇게 말한 플로라는 추종자 셋을 데리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안은 그 뒷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하여튼. 싸가지하고는.’
[그래도 긴장은 안 한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뭐. 옆에 있는 친구 겸 추종자들이 잘 케어를 하겠죠…… 근데 오늘은 한 명이 비네요?’
분명, 이안의 기억 속에 플로라의 추종자는 4명이었다.
언제나 플로라의 왼쪽에 두 명, 오른쪽에 두 명이 서 균형을 이뤘기에. 기억에 남아 있다.
‘뭐. 일이라도 있나 보죠.’
그렇게 생각하며, 플로라가 떠난 길을 뒤따라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원형의 웅장한 경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안은 계단을 오르기 전, 아래층으로 향하는 통로 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여기는 분명 선수 대기석이었던가.’
소란스러운 주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적한 복도.
슬쩍 살피자니, 루크의 대기실 앞에 한 소녀가 머뭇거리며 서 있었다.
‘쟤는 분명…… 아까 없었던 플로라의 추종자잖아.’
시선을 느낀 건가. 소녀는 이안을 보며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대체 뭐지?’
이안은 알 수 없는 찝찝함을 느꼈다. 뭔가. 기분 나쁜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민해봤자 뾰족한 답이 나올 문제도 아니다.
이안은 계단을 오르며 관객석으로 향했다.
그리고 계단을 모두 올랐을 때.
“이봐.”
누군가 말을 걸었다.